소설리스트

183화 (183/521)

가르엘은 맞은편에 앉은 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빼앗아 간 술을 막힘없이 들이켜던 그는, 이제 인상을 찌푸리며 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대화하고 싶다더니.”

“이미 경이 술을 마셨으니, 저도 적당히 취해 보려는 겁니다.”

“그거 독해요.”

“알아요. 방금 마셔 봤으니까.”

테이블에 빈 병을 올린 카델이 조용히 숨을 골랐다.

뭘 생각하는 중일까. 자신을 본인의 세력에 끌어들이고 싶다 했으니, 그를 위한 설득을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더러운 힘을 사용할 마음은 없지만, 그럼에도 궁금은 했다. 저 자그만 머리에서 어떤 발상이 튀어나올지.

“가르엘 경은, 왜 그 힘을 혐오하는 겁니까?”

첫마디부터 실망스러웠다. 가르엘은 작게 실소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혐오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방탕하게 구니 잊으셨나 본데, 전 신성 기사입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의 악을 처단하는. ……그런데 처단해야 할 악이 알고 보니 자신이었다니. 악을 품은 채 악을 쫓고 있던 거죠.”

참으로 우습고,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생을 숭배했던 신을, 처음으로 원망해 봤습니다. 처음 순결을 맹세하던 제 모습을 굽어살피셨다면, 대체 왜 말리지 않으셨나. 왜 무지함을 일깨워 주지 않아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세상을 기만하게 하셨나.”

그날의 억울함을 되새기듯, 가르엘은 입을 다문 채 빈 술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고, 곧 작위적인 미소가 굳은 만면을 뒤덮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그린 것처럼 완벽한 호선을 그렸다.

“근본부터 글러 먹은 놈이니 감히 신을 원망할 수 있었던 거겠죠. 그래도 지금은 압니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제게 있다는 걸. 제 삶은 시작부터 잘못된 거예요. 이 더러운 힘을 품고 태어났던, 그 시작부터.”

“세상에 태어난 게 죄인 인간은 없어요.”

“왜 없습니까? 경의 눈앞에 있는데.”

과장된 손짓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카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언가 좋은 소리를 꺼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시작이 잘못됐으니 끝이라도 올바르게 맺고 싶었습니다. 모두를 기만했던 과거를 바로잡고,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까지 말살하는 것. 그게 제 인생에 허락된 유일한 끝맺음입니다.”

“……본인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게 옳은 일이라고?”

“그게 속죄라고 생각해요.”

카델은 테이블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낮게 숨을 쉬고,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늘진 표정에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동정이라도 하는 걸까. 이 정도까지 속내를 꺼내 보였으니 순순히 포기해 주었으면 했다.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끝을 정해 둔 사람이었다. 신이라도 바꿀 수 없는 끝이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화가 나서요.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할 정도로 화가 치솟습니다. 남 얘기에 이렇게까지 감정을 써 본 적이 없는데.”

카델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가르엘을 마주 보았다. 색이 변한 잿빛의 눈동자는 가르엘의 의아한 표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누가 정한 겁니까? 단순한 본인의 판단입니까?”

“그건…….”

“그렇겠죠. 선악의 기준만큼 모호한 게 어딨다고요. 세상엔 완벽한 어둠도, 완벽한 빛도 없습니다. 악인도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선인도 악한 일을 할 수 있죠. 모두에게 일관적인 선악 따윈 없어요.”

“……재밌는 소리를 하네요.”

“본인을 악이라고 규정짓는 것만큼 재밌진 않을 텐데.”

카델은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다만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고, 그랬기에 가르엘은 당혹스러웠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리도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겁니까? 왜 지금껏 경이 해 왔던 모든 선행을, 베풀었던 선의를, 전부 기만이라고 여기려는 건데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뭡니까? 자괴감? 그딴 걸 얻어서 어디다 쓰게요?”

“말이 점점 거칠어지는—”

“속죄를 죽음으로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그만큼 당신 인생이 잘못된 것 같아요? 마족의 피가 섞였으니까? 그 힘으로 사람 한 번 죽여 본 적 없을 거면서. 그 힘으로 여태껏 남을 살리고, 지켜 왔을 거면서.”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시죠.”

“적어도 경이 볼품없이 무너지는 중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카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침묵 섞인 방 안을 맴돌았다. 그는 분노를 갈무리하듯 시선을 돌리며, 허탈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구질구질하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가르엘이 되물었으나, 카델은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만약 모들렌 경이 마족의 힘을 가졌고, 그 사실을 숨기다 경에게 들켰다고 칩시다. 그럼 경은 그 사람을 악인이라고 매도할 겁니까?”

“…….”

“너는 태어나서는 안 됐다, 그러니 죽음으로 속죄해라. 그렇게 말할 거냐고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가정에 가르엘의 입이 다물렸다. 치기로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라고 답할 수 없었다. 카델은 그 침묵을 예상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남에게도 못할 말을 왜 본인한테 합니까. 차라리 경을 그렇게 낳은 부모를 원망해요. 부입니까, 모입니까. 누가 마족의 피를 섞은 거예요?”

“……모릅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으니.”

“그럼 아무나 골라서 원망하면 되겠네요. 원망에 기대서라도 살란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단호한 일갈에 가르엘의 입꼬리가 움찔 떨렸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빛을 감추기 위해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살아서 증명해야죠. 당신들이 날 이렇게 낳았지만, 그래도 나는 올바르게 살았다. 무수한 인간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힘으로 무수한 인간을 살렸다. 그러니 내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고, 태어나서 다행이었다.”

“…….”

“포기하지 말란 말입니다.”

간절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가르엘은 내심 놀라움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타인의 삶을 열렬히 바라는 사람이 존재할 줄이야. 이런 일방적인 응원은 상상해 본 적도,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남자가 소리 높여 살아 달라 외칠 줄,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죽는 게 아까워서 그럽니까? 어떻게든 살려서 부하로 두고 싶어요?”

“저는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사람도, 우울한 사람도. 그러니 지금 당장 경을 끌어들인다 해도, 그다지 기쁠 것 같진 않네요.”

그렇다면 왜. 가르엘의 지친 시선은 그리 물었고, 카델은 이리 답했다.

“경이 악이라면, 나도 악이 되어 버리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기만이라면 이쪽이야말로 질리게 해 봤습니다.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곧잘 쳤어요. 그렇다고 그걸 덮을 만한 선행을 많이 했냐? 그것도 아니거든. 경의 논리대로라면 나도 지독한 악이라는 건데, 당신이 그렇게 죽어 버리면 난 어떡하라고요. 난 죽어도 죽을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그건…… 정말 최악이잖아요.”

스스로의 발언이 어이없다는 듯, 카델의 비틀린 입술 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의 마음에 들 만한 아주 많은 칭찬과 위로, 격려를 생각해 뒀어요. 잘 어르고 달래서 데려오고 싶었는데. ……전부 잊었습니다.”

카델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탈력감이 낭자한 분위기 속에서, 가르엘은 가만히 제 왼쪽 눈꺼풀을 매만졌다.

처음 마안이 존재를 드러냈을 때. 범람하는 마기 속에서 죽은 것처럼 굳어, 이것이 자신의 힘이라는 걸 인지했을 때. 꾸역꾸역 파낸 눈알이 열세 번의 재생을 반복했을 때. 몇 번이고 죽음을 다짐했다. 어디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칭송하는 국민에게. 자신의 삶은 그들의 호의를 기만으로 보답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쏟아질 비난보다, 비난하는 자들이 느낄 배신감이 더욱 두려웠다.

“……살아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선, 제가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었다고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영원히 마찬가지겠죠.”

“……비밀 하나 교환해 볼까요.”

“비밀?”

“전 마안에 대해 알고 있으니, 경에게도 제 비밀을 하나 알려 드리죠.”

카델은 젖혔던 고개를 내리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부드러운 미소였으나, 가르엘은 그 안에 담긴 묵직한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농담 아니니 진지하게 들어요.”

“노력해 보죠.”

“전 끝이 정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 의지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삶을.”

“……죽을병에라도 걸린 겁니까?”

“틀려요. 오히려 기회죠.”

작게 웃은 카델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그 표정 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랑할 만한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제겐 과분한 삶이 될 테죠. 살아가는 동안, 착실하게 옳은 길을 밟아 갈 겁니다.”

“……도착지는?”

“음,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면 좀 웃기죠? 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어디서도 그림자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밝게 빛나는 선인이 될 겁니다. 제 삶은 그렇게 끝맺어질 거예요.”

아주 밝게 빛나는 선인이라. 참으로 부러운 삶이 아니던가. 가르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카델은 자신의 모든 진심을 내보였다.

“그러니 날 따라와요. 당신의 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줄 테니, 나와 같은 길을 걸어 봅시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가르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마주한 카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고, 장난이나 농담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끝을 믿고 있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결국 경의 사람이 되라는 얘기 아닙니까.”

“이 세상에 나만큼 환한 운명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경은 절대 길을 잃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죽지 말고, 같이 걸어 봅시다. 그 끝에서 함께 살아서 다행이었다, 해 보자고요.”

카델의 비밀을 진지하게 듣는다고 그의 모든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할 만큼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델의 눈빛이 더없이 다정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리 말하는 카델의 얼굴이 유독 예뻤기 때문일지도. 어쩌면 진창 같은 삶에 멋대로 손을 뻗는 그의 모습이, 그토록 바라 왔던 구원처럼 비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는데, 이거 제안 아니고 부탁이에요. 다음은 구걸할 차례니까 꼴이 어떨지 궁금하면 한번 튕겨 보시고요.”

문득 궁금해졌다. 그토록 환한 운명을 가졌다는 사람이, 어째서 저리도 간절해 보이는지. 왜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구는지. 짧게라도 함께 걷는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젠 슬슬 억울할 지경이네요. 대체 그대가 뭐라고, 항상 이렇게 무너지고 싶은지.”

그의 비밀이 자신을 구원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니더라도, 아주 잠시 정도는. 자신의 삶을 응원하는 이 건방진 남자의 곁에 머물러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 누군가 한 명쯤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기억해 준다면. 분에 겨운 죄인의 죽음을 지켜봐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테니까. 실로 죄인다운 욕심이었다.

그랬기에 가르엘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기도하듯 말해 보았다.

“한번 살아볼까요. 그대의 빛이 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는…… 작은 기대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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