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부터 마계 봉인 점검을 위한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적린 기사단은 소규모였으나, 그렇다고 남들보다 준비할 것이 적은 건 아니었다.
카델은 황실에 요청할 보급품 목록을 작성하고, 동선을 논의하고, 여행 짐을 꾸리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는 두 명뿐인 부하에게 찾아가 임무의 세부 사항을 전달해야 했다.
“이번에도 그 무개념과 같은 팀이라고요? 대체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네요.”
“드레프 경을 무개념이라고 부르는 건 내 앞에서만 해 주라. 호계 기사단이 떼거리로 달려드는 꼴을 보고 싶진 않거든.”
반은 카델의 곤란한 미소에도 굴하지 않고 드레프에 대한 비호감을 분출했다.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단장인 카델을 함부로 대하는 자를 유독 경멸했으니. 반에게 있어 드레프는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인간쓰레기에 불과했다.
‘드레프가 갑자기 온순해질 리는 없고. 같이 행동하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지.’
드레프는 태생적으로 입이 험하고 삐딱한 인간이었다. 반면 속은 꽤 물렁한 듯했지만, 반이 드레프의 속내까지 살펴보아야 할 의무는 없다. 살폈대도 반은 드레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거친 성정의 드레프와 충성심 넘치는 반이 충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카델은 그 끔찍한 재앙을 맞닥뜨리기 전에 아예 분탕의 싹을 뽑아 두기로 마음먹었다.
“반. 드레프 경이 죽도록 꼴 보기 싫어서 참을 수 없을 땐 이걸 생각해.”
카델은 앉아 있는 반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동그랗게 벌어진 반의 눈을 응시하며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저 새끼가 우리 단장을 탈옥시켜 줬다. 저 새끼 아니었으면 단장은 우중충한 지하 감옥에서 썩은 시체로 발견될 뻔했다.”
다정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그에 반은 잔뜩 성을 내던 것도 잊은 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델의 다정한 표정을 담아내는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천 번이라도 참아야겠네요.”
“……천 번은 너무 많지 않아? 적당히 다섯 번 정도만 참고, 드레프 경이 계속 짜증 나게 굴면 말해. 내가 혼내 줄게.”
믿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슬쩍 눈썹을 치켜들자, 반이 좀 전보다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아— 멋있어요, 단장.”
“난 원래 멋있었어.”
“맞아요. 그런데 요새는 과할 정도로 멋있어서, 눈독 들이는 놈들이 더 늘어날까 봐 걱정이네요.”
다른 사람이라면 농담으로 듣고 넘길 말도 반이 하면 꼭 진심처럼 들린다. 카델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젖혀진 반의 턱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래 봤자 처음은 너야.”
“……자꾸 심장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마세요.”
[기사 ‘반 헤르도스’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90/100]
90이라는 충격적인 호감도 수치에 카델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올라갔다. 그가 호감도 위험군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도대체 호감도를 꽉 채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들어차는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없었기에, 일단은 말을 아껴 보기로 했다.
*
라이돈에게는 굳이 세세한 일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설명해 봤자 금세 잊을 테고,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언반구도 없이 무작정 끌고 갈 수는 없었기에, 카델은 적당히 흥미가 동할 만한 이야기를 버무려 라이돈의 협조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델의 야무진 계획은, 라이돈의 객실 광경을 목도하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졌다.
“뭐… 하는 겁니까, 제리엘 경…?”
노크라도 해야 했던 걸까. 라이돈의 객실이니 별생각 없이 편하게 문을 열었더니, 다짜고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당황한 것은 제리엘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침대 밑에 꿇어앉고 있던 몸을 어정쩡하게 일으켜며 카델을 돌아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짐작하기도 싫었다. 반면 라이돈은 침대 위에서 태연자약하게 손을 흔들며 카델의 방문을 반겼다.
“왔어, 자기?”
지금은 라이돈의 소름 돋는 호칭을 정정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체 왜 호계 기사단의 대대장이 남의 부하 침대 아래서 무릎을 꿇고 있단 말인가. 무언가를 사과하던 도중이었나 하면, 딱히 제리엘의 행동에 사죄의 느낌은 묻어 있지 않았다. 그가 라이돈에게 사죄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런 카델의 혼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한껏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제리엘이 양손을 맞잡은 채 조신하게 말했다.
“그, 지난 전투에서 라이돈 님께 크게 신세를 져서요. 단 음식을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제리엘의 시선이 침대 위를 향했다. 카델은 그제야 라이돈의 주위를 어지럽게 둘러싼 각종 포장지를 발견했다. 대충 어떤 의도로 찾아온 것인지 짐작은 갔다. 하지만.
“무릎은 왜 꿇고 계셨던…….”
만약 황실의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성이 뒤집어졌을 만한 장면이었다. 끔찍한 추문이 돌았을 테다. 제리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슬쩍 눈을 내리깔면서도 퍽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죽어도 친구는 싫다시길래 자진해서 하인이 돼 봤습니다.”
“……네?”
“우습게 보인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카델 경…! 요정인걸요! 죽을 만큼 가까워지고 싶은걸요! 요정의 모든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싶단 말입니다!”
갑자기 격양된 그가 흥분한 듯 콧구멍을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변태 같은 그 모습에 카델은 훌륭했던 제리엘의 첫인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둘의 관계가 어찌 되든 조금도 상관없는 라이돈은, 초콜릿의 포장을 벗기며 제리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시끄러워, 무능아. 이제 내 방에서 나가.”
“라이돈! 무능아라니, 말이 너무 심—”
“네, 라이돈 님! 다음에 올 땐 더 맛있는 디저트를 두 배로 챙겨 올 테니까요! 꼭 숲에 관한 얘기를 해 주셔야 합니다?”
무능아라 호명된 제리엘은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해맑게 방을 나섰다. 남겨진 카델만 황망해할 뿐이었다.
“한쪽은 무개념에 다른 한쪽은 무능아야……?”
혹여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간 공공의 적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다. 카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라이돈에게 다가갔다. 라이돈은 제게 가까이 다가온 카델에게 사탕 한 움큼을 건네주며 산뜻한 눈웃음을 지었다.
“질투해, 자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너…….”
대체 어디서부터 이 미친 관계를 바로잡아야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카델이 결국 체념하듯 사탕을 받아 들며 라이돈의 옆에 걸터앉았다.
“다른 사람 앞에선 무능아라고 부르지 마. 제리엘 경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비밀로 하고.”
“흐응, 내가 무능아를 먼저 찾을 일도 없고, 남한테 무능아 얘길 꺼낼 일도 없는데?”
“그래도 안 돼. 알아들었어?”
“음, 잘 안 들려.”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인 그가 몸을 숙여 카델의 어깨 위로 턱을 기댔다. 카델은 바로 옆에서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예쁘장한 얼굴을 가볍게 밀쳐 냈다. 그래 봤자 라이돈은 칭얼거리며 어깨에 뺨을 눕힐 뿐이었다.
“카델, 요즘 나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은 거 아니야? 섭섭해. 서운해. 이러다 내가 그 무능아한테 가 버리면 어쩌려고?”
카델은 수작 부리지 말라며 라이돈을 밀어 내려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요새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에 라이돈이 의식을 되찾고도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그동안 얌전히 있느라 꽤 무료했을 텐데, 용케 참아 줬다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겁이라도 낼 줄 알았어?”
“너무하네, 카델! 나는—”
“아주 제대로 생각했네.”
“……으응?”
“날 두고 어딜 가려고.”
휙 몸을 돌린 카델이 어깨에서 떨어진 라이돈의 뺨을 감싸 쥐었다. 카델의 눈높이와 맞추느라 구부정한 자세가 됐음에도 라이돈은 꼼짝없이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나 버리고 다른 놈이랑 세계를 구경하게? 그걸 허락해 줄 것 같아? 상상도 하지 마.”
반쯤 농담을 섞긴 했지만, 절반은 진심이었다. 이 통제 불가한 요정을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는데. 이제 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다면 피눈물이 날 것이다.
라이돈은 제법 진지한 카델의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사르르 눈꼬리를 접으며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지금 집착하는 거야?”
“부하 관리하는 거야.”
“싫어, 집착해 줘. 더 해 줘.”
기울어진 몸을 아예 침대 위로 눕혀 버린 라이돈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 카델에게 아양을 떨었다.
“카델이 원하면 그 무능아, 다시는 내 방에 못 들어오게 할게. 말도 안 섞고, 음…… 간식도 안 받을게. 어때?”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그렇게 되면 하인을 자처한 제리엘이 불쌍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라이돈은 벌써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럼 카델은 날 더 구속해 줘야 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