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창문 너머로 기분 좋은 훈풍이 불어왔다. 바깥 정원을 쓸고 온 바람에 시원한 풀 냄새와 은은한 꽃향기가 섞여 들었다. 함께 스며든 햇볕은 널찍한 방 안을 꼼꼼히 밝혀 주었고, 맑은 새소리는 고요한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루멘은 그린 것처럼 곧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아래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문장의 호흡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햇살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웠다. 답답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흑발이나 단단하고 힘 있게 뻗은 콧대, 귀족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곧은 입매와 날렵하게 빠진 턱선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못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장을 넘기는 우아한 손동작이나 흥미로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볍게 올라가는 단정한 눈썹은, 그 자체만으로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듯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독서에 열중하던 루멘. 그의 주의를 흩뜨린 것은 예고 없이 날아든 꽃잎이었다. 색이 엷은 분홍색 꽃잎 한 장이 책장 위로 몸을 얹었다. 루멘은 그것을 집어 들어 말없이 바라보았다.
분홍색이라든가, 꽃이라든가. 연관이 있어 떠올릴 만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불쑥 떠오른 한 남자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가기 시작했다.
“……보고 싶네.”
딱딱하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루멘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꺾었다. 별다른 표정 없이 무덤덤했던 낯에 금세 피로감이 떠올랐다.
“종일 갇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군.”
도미닉 후작가에 복귀한 지 약 3주째. 그는 모든 바깥출입을 통제당한 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미닉가의 차남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용병단에 들어가 세계를 여행하겠다. 그리 선언한 순간부터 시작된 감금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기에 순순히 갇혀 주기는 했으나, 슬슬 다음 단계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루멘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온건하게 나가 봤자 아버지는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을 거다. 형님을 위협해서라도 어떻게든 내 의견을 밀어붙여야 해.’
오랜만에 돌아온 가문은 기억보다도 갑갑한 공기를 품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렀다간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다.
루멘은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덮어 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시간을 보내기에 독서보다 적당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채 한 문장을 읽기도 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루멘 도련님.”
집사장인 샘이었다. 그는 루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어딘지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님께서 도련님을 급히 찾으십니다. 당장 서재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방 밖으로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하인들의 뺨을 치실 거라 하지 않았나? 과연 서재까지 몇 걸음일지 궁금하군.”
“주, 중요한 사항이라 하셨으니 그건…….”
책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루멘이 샘의 옆을 스쳐 지나며 비아냥거렸다.
“최대한 적은 사람이 맞을 수 있도록 노력은 해 보지.”
서재에는 루멘의 아버지이자 도미닉가의 가주, 프로치 도미닉이 있었다. 이목구비는 루멘과 그다지 닮은 구석이 없었으나, 윤기 흐르는 흑발과 냉랭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인상만큼은 비슷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프로치 도미닉은 제 둘째 아들의 덤덤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루멘과 다를 것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올리브색 눈동자 위로는 분노에 가까운 괴팍한 감정이 아른거렸다.
그는 꼿꼿하게 선 자기 아들에게 대답 대신 신문 한 장을 던져 주었다. 루멘은 발아래로 내쳐진 신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직접 보거라.”
마이뉴 왕국의 대형 신문사에서 발행된 신문이었다. 이곳에 자신이 불려 온 이유라도 적혀 있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첫 면을 장식한 기사를 읽어 내린 루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들의 낯에 번지는 놀라움에 프로치가 기다렸다는 듯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오보가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사실이라더군. 마이뉴 왕국의 국민인 네가 제국의 기사로 임명되었다는 저 허무맹랑한 기사가 진짜라니. 네가 정녕 미친 게냐?”
루멘은 점점 높아지는 프로치의 언성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장이 제국의 기사가 됐다고……?’
자신이 없는 새에 또 한 번 전투를 치른 모양이었다. 기사에는 제국의 관문을 노린 고위 마족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적린 용병단이 제국의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한 임명식을 치렀다고 쓰여 있었다.
또한 평민 출신인 반 헤르도스나 수백 년 만에 인세에 모습을 드러낸 요정 라이돈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으나, 흥미가 동하지는 않았다. 루멘은 그저 카델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라이토스인 그가 어쩌다 제국과 손을 잡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가 뜬금없이 타국의 인재를 탐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면, 이건 그 카델이라는 기사단장과 네 녀석 사이의 거래였겠지.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느냐. 네 말도 안 되는 욕심으로 가문을 곤란에 빠뜨려!”
기뻤다.
카델이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더없이 확실한 증거였으니. 신문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오스마 제국의 황제가 자신을 공공연한 제국의 기사로 임명한 지금. 도미닉가는 그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세간을 향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카델은 가문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는 강수를 둔 것이다.
오직 루멘 도미닉을 하루라도 빨리 보기 위해서.
“……지금 웃는 게냐?”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버지. 저는 더 이상 가문의 검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택한 게 제국의 검이라는 소리냐?”
“이참에 제국과 연을 맺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네 이놈!”
루멘은 카델의 이름이 적힌 신문을 반으로 접으며 프로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 집안의 모두를 인질로 잡으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전 떠날 겁니다.”
“루멘, 너 대체……!”
“제가 가문에 남게 된다면, 언제가 됐든 아버지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실 겁니다. 그게 누가 됐든요. 두렵지 않다면 절 붙드시고, 아니라면 보내십쇼.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
루멘의 말투는 덤덤했으나, 프로치를 응시하는 눈빛엔 서늘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은 어수룩한 협박이나 투정 같은 게 아니었다. 십수 년간 켜켜이 쌓여 온 시퍼런 독기. 그것이 절절히 느껴졌기에, 프로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네놈, 네놈이 지금 감히……!”
루멘은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자신의 아버지를 눈에 담았다. 정말이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으나,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본능적으로 들끓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당장이라도 카델이 보고 싶어 애가 탈 뿐이었다.
*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주요 퀘스트 ‘제국의 기사’ 진행이 완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칭호 [제국의 신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명성이 15 증가하였습니다.」
「기사단 승격이 완료되어 코스트 한계치가 개방됩니다.」
「현재 기사단 코스트 : 9/25」
드디어 기사단으로 승격했다. 이젠 정말 스토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아득하기만 하던 산의 정상에 오른 기분이었다. 남은 내리막길이 가파르고 험난해 보이긴 했지만,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아름답고 벅차기만 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에 가장 크게 일조하는 이가 있었으니.
「주요 퀘스트를 완료하여 영입 가능한 기사의 제한이 풀립니다.」
「가까운 곳에 영입 가능한 기사가 존재합니다.」
「인원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