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부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카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굳어 있는 그들의 표정이 우스울 법도 했지만, 카델은 괜스레 풀이 죽어 못 본 척 눈길을 돌렸다.
“단장…? 머리가 왜……. 아니, 눈은 또 왜…….”
“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거야?”
반은 차마 손을 대진 못하겠는지 애꿎은 허공만 더듬으며 카델의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그와 달리 라이돈은 금세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카델의 주위를 빙 돌았다. 더 변한 것이 없나 찾아보려는 듯했다.
카델은 정직한 부하들의 반응이 멋쩍은 듯, 검어진 머리칼을 헝클이며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한동안은 이렇게 지낼 거야. 이상해도 참아.”
“이상할 리가요! 단장이라면 머리를 무지개 색으로 물들여도 잘 어울려요. 그냥 조금 어색해서…….”
반은 처음 보는 사람과 내외라도 하는 것처럼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어색한 태도에 카델의 한 줌짜리 자신감도 덩달아 하락하던 때. 유심히 카델을 살피던 라이돈이 불쑥 고개를 숙여 그의 뺨 위로 입술 도장을 찍었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카델은 물론 반과 필립까지 경악했으나, 정작 라이돈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예뻐.”
놀란 카델이 엉거주춤하게 라이돈을 올려다보자, 반이 달려들어 라이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사이에 끼어 있던 필립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웠는지, 짧은 인사를 건네곤 서둘러 그들의 곁을 떠났다.
두 남자의 익숙한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카델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라이돈의 기습 행동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휘둘리는 쪽이 손해였다.
푹 한숨을 내쉰 카델이 가만히 제 부하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렇게까지 테가 살 필요가 있나.’
그들이 입은 단복은 자신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다른 것이라곤 망토의 생김새뿐. 그런데도 꼭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느낌이 너무 달랐다.
라이돈은 단복의 흰색 원단과 특유의 화사한 외모, 고급스럽게 색이 빠진 금발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날 때부터 입고 있던 옷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동화책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을 현실로 꺼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다정한 왕자님과는 거리가 먼 성정과 묘한 싸함이 느껴지는 붉은 눈이 보는 이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요정’이라는 그의 신비로운 정체성에 힘을 보탤 뿐이었다.
반면 반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단복을 차려입었음에도 어딘가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그의 거칠고 날 선 인상 때문일 수도, 실제로 반항심을 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유야 무엇이 됐든, 순백의 제복은 순종적인 기사와는 거리가 먼 날것의 눈빛과 남성적인 이목구비를 부각시켜, 반만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과연 이들과 함께 연회장에 입장해도 좋은가. 신분을 숨기기 위해 머리와 눈 색을 바꿨으나, 이들과 함께라면 자신에겐 한 톨의 관심조차 쏟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카델이 오늘따라 유독 강한 씁쓸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한 남자가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제의 보좌관이었다.
“준비가 다 된 듯하군요. 따라오세요. 연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살벌하게 투덕거리는 반과 라이돈의 모습에도 보좌관은 당황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카델은 그의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에 감복하며 서둘러 부하들을 챙겨 연회장으로 향했다.
*
카델은 연회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연회보다는 기사단 임명식에 무게를 두기도 했고, 황실의 연회라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간에 그는 파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
그래서인지 카델은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화려함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와……. 대체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원래 연회라는 게 다 이렇게 화려한 건가? 세상에, 진짜 샹들리에다. ……설마 저기 달린 보석까지 진짜는 아니겠지? 음식은 왜 저렇게 고급스럽고 난리야. 내 얼굴보다 윤기가 흐르잖아.’
황제는 아직 연회장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등장할 모양인 듯했다.
카델은 황제를 기다리는 동안 연회장을 마음껏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음식은 전부 먹어 두고 싶었다.
한편, 연회의 주인공들이 입장하자 초대받은 제국의 귀족들이나 황실의 임원, 타국 귀빈들의 시선이 단박에 집중되었다. 그들을 향한 넘치는 호기심과 호감에 좌중이 술렁일 정도였다.
그러나 파티의 손님들은 예비 기사단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반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표정 관리에 고역을 겪으며 구석 자리를 차지했고, 접근하면 누구 한 명은 썰어 버릴 기세를 풍겼다.
실제로 근처까지 다가갔던 한 남자는 반의 살기 어린 눈빛에 진저리를 치며 후퇴하더니, ‘듣던 대로 성격 나빠 보인다’며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반으로서는 다행인 부분이었다.
반면 라이돈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산처럼 쌓인 디저트에만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본인의 외관에 홀려 다가온 이들에게 독설을 날려 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방해하면 죽일 거야’라든가, ‘한 마디만 더 재미없으면 입을 찢을 거니까’ 등의 협박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낯으로 물러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카델.
적린 용병단의 단장이자 온갖 소문의 근원지인 그에게는 처음부터 몇 배는 더 한 관심이 쏠렸다. 제국의 신성으로 떠오를 세력의 우두머리와 연을 쌓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카델은 반과 달리 적대적으로 굴지도 않았고, 라이돈처럼 사회성이 없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카델의 주변에도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그건 초반부터 카델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한 남자 때문이었다.
“이 모습도 꽤 매력적인데요? 뭐랄까, 날 경멸하게 만들고 싶어진달까.”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십쇼.”
“카델 경 앞에만 서면 입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어떡합니까.”
남자의 정체는 바로 가르엘 몬자시였다. 그 역시 타국의 귀빈이었기에 연회에 초대되었다. 이곳에서 카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카델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단 가르엘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기는 했기에 그를 떨쳐 내지 않았다. 너무 딱 달라붙는 건 문제였지만.
“곧 정식 기사단이 될 텐데. 기분이 어때요?”
“토할 것 같네요.”
“이런, 걱정 마요. 경이 황제 앞에서 속을 게워 내더라도 모르는 척하지 않을 테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겁니까?”
“꽤 의리 있죠?”
카델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젓자, 가르엘도 그를 따라 작게 웃었다. 대화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은 퍽 살갑고 다정했다.
연회장의 손님들은 도저히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모습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걸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다른 기회를 노리는 이들도 있었다.
“뭘 자꾸 처웃는 거야. 등이라도 한 대 걷어차 주고 싶군.”
반은 짜증이 치밀 정도로 가까운 두 남자의 거리감에 미간을 구겼다. 단장의 새 옷에 때가 타기 전에 당장 가르엘을 떨어뜨려 놓고 싶건만. 도저히 귀족들 틈을 헤집으며 저기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칼부림이 나면 단장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결국 반은 흐린 눈으로 가르엘의 존재를 지우며 카델의 뒷모습에만 집중했다.
그와 달리 라이돈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가르엘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미리 점찍어 두었던 치즈 컵케이크를 집어 든 그가 해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죽여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어차피 죽일 거지만, 카델의 의견도 한 번쯤은 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섬뜩한 결론을 내린 라이돈이 평화롭게 컵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굳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각기 다른 감정을 담은 수십 개의 시선이 교차하던 연회장. 그 떠들썩한 분위기는 황제 데릭의 등장에 더욱 고조되었다.
그는 연회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간단한 감사를 전하고는, 지체 없이 연회의 주인공을 찾았다.
황제의 부름에 카델이 부하들을 이끌고 연회장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사람들이 물러서며 길을 터 주었다.
데릭은 자신의 앞에 선 카델과 반, 라이돈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목숨 바쳐 지켜 낸 제국의 관문은 수백, 수만의 삶을 감싼 울타리였네. 제국을 이끄는 황제로서 그 혁혁한 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지. 이 자리에서 짐의 감사를 전하네.”
그들을 향한 황제의 눈빛에서는 오만하고도 귀족적인 고귀함이 물씬 풍겼다. 그의 말투는 어느 순간 좌중을 압도하는 무게를 가지기도, 뭉친 분위기를 풀어내는 인자함을 머금기도 했다.
“또한 제국을 향한 그대들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수호의 자격을 내리고자 한다. 짐의 옆에서 제국을 수호하며, 제국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칠 것을 맹세할 수 있는가?”
충분히 긴장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카델은 이미 황제와 함께 예행연습을 진행한 과거가 있었다. 입장이 입장인지라 미리 입을 맞춰 둬야 서로 간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었다.
카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오스마 제국과 황제 폐하에게 목숨과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카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카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반이 치솟는 반항심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무릎을 굽혔다. 버텨 봤자 카델만 곤란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이돈은 아니었다. 그는 남의 일을 관망하듯 멀뚱히 서서 꿇어앉은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호위 기사가 라이돈에게 예를 갖출 것을 종용하였으나, 오히려 황제가 그를 저지했다.
“인세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큰 결심을 요한 일이었을 터.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예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제국의 곁에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니.”
준비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카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해 두길 잘했지.’
황제와의 예행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카델은 라이돈이란 요정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설명했다.
그의 제멋대로인 성격과 예상할 수 없는 행동, 핀하이족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출신까지. 라이돈은 분명 자신의 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카델은 그 사실을 강조하며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의 종류를 구구절절 나열했고, 황제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황제는 요정이 인간의 명령을 따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듯했다. 어찌 됐든 라이돈이 카델을 따르는 이상, 그 역시 제국의 소속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제국으로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라이돈의 무례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잠시 멈추었던 의식을 재개하며, 뭉툭한 검날이 카델의 어깨에 얹어졌다.
“지금부터 그대들을 제국의 기사로 임명한다. 단장 카델과 휘하의 반 헤르도스, 라이돈.”
새로운 기사들의 이름을 전부 말한 뒤, 데릭은 고개를 든 카델과 시선을 맞췄다. 데릭의 검은 눈동자 위로 이채가 스쳤다. 잠시 뜸을 들이듯 침묵하던 그는, 이윽고 카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루멘 도미닉까지. 켈리건의 가호가 그대들의 거룩한 맹세와 함께하기를.”
마지막 기사의 이름을 읊은 황제의 힘 있는 목소리가 회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