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521)

라이돈을 안내해 준 치유사의 몰골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 짧은 새에 퀭하게 질린 얼굴은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크게 안도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카델은 자신을 와락 끌어안으며 달라붙는 라이돈을 토닥이며 치유사에게 그의 상태를 물었고, 완전 회복이라는 소견을 들은 뒤에야 풀어 주었다. 도망치듯 달아나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총성 들은 노루도 그보다는 빠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반의 갖은 욕설에도 굴하지 않고 카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라 하던 라이돈은, 반과 마찬가지로 단복의 치수를 재기 위해 나란히 서 있었다.

“라이돈, 얌전히 있어. 반도 그만 싸우고. 너희 때문에 힘들어하시잖아.”

“네, 단장. 하지만 그 전에 이 빌어먹을 요정 놈의 주둥이를 살짝만 찢어 둘게요.”

“내 입술에 손을 대려는 거야, 반? 파렴치해라!”

내가 부하를 거느린 건지 형제를 키우는 건지. 이마를 짚은 채 설설 고개를 젓던 카델이 문득 피어난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필립 씨, 라이돈의 옷 말인데요. 요정이라 지금처럼 인간형일 때도 있지만 엄청 작아질 때도 있는데. 그럼 치수도 두 종류를 재야 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최대 치수만 재면 돼요. 마도구를 장착할 거라… 지금 라이돈 님이 입고 계신 옷처럼 말이죠.”

재단사가 무심코 라이돈의 팔을 건드리려다, 곱게 휘어진 붉은 눈과 마주치고는 주섬주섬 손길을 거뒀다.

“마도구요…?”

라이돈의 옷에 그런 것이 달려 있었던가. 카델이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라이돈이 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꾸며 내며 투덜거렸다.

“여태 몰랐단 말이야? 내 건 마도구 같은 게 아니라 아티팩트지만.”

“전혀 몰랐는데. 어디 있는 거야?”

“여기 손목에 달린 은색 단추. 우리는 육체 변형이 자유로워서, 갑자기 알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야. 신체 크기에 맞춰서 옷도 함께 줄어들고 늘어나는 거지.”

정말이었다. 흰색 셔츠 소매에 달린 단추 중, 문양과 빛깔이 다른 은색 단추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전혀 신경 안 쓰고 살았네.’

한 번쯤은 어느 모습을 하든 멀쩡한 옷을 입고 있는 라이돈을 신기하게 여길 법도 했는데. 그가 모습을 바꿀 때는 대부분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대충 그러려니 넘겼던 것 같다.

카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며 우는소리를 내는 라이돈의 단추를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

“괜히 칭얼대기는. 나 너한테 관심 많아.”

뭘 하면 이 말괄량이 왕자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 좋아하는 건 뭔지, 뭘 미끼로 걸면 말을 잘 들어줄지. 관심이라면 차고 넘쳤다.

무심히 대꾸하자, 라이돈이 헤벌쭉 웃으며 카델에게 팔을 뻗었다.

“나도 많아, 자기야.”

그대로 카델을 품에 안으려던 행동은 얼굴을 밀친 반에게 저지되었지만, 그럼에도 라이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웃음을 잃은 것은 재단사 필립과 하인들뿐이었다. 그들은 세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미친 요정’과 ‘입 험한 검사’, ‘유일하게 정상적인 용병단장’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려 애썼다. 대충 훑어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사귀나?’

‘셋이서?’

‘미쳤어? 셋이서 사귀면 저 요정이나 검사 둘 중 한 명은 죽을 기센데.’

‘뭐라는 거야, 너희? 애초에 저분들은 용병단이라고. 전우지, 전우.’

‘넌 전우한테 자기라고 부르니?’

‘요정이 사용하는 호칭은 좀 다른가 보지!’

하인들은 저들끼리 소리 낮춰 숙덕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카델이 들었다면 기겁하며 뒤집어졌을 이야기였으나, 다행히 카델은 그들이 ‘협조성 없는 용병단’에 대해 불평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는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해 서둘러 부하들의 다툼을 중재했다.

“너희 지금부터 필립 씨 작업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마. 움직이지도 마. 그냥 나는 인형이다, 생각하고 서 있어.”

“라이돈을 인형 같은 시체로 만들어 두는 건 어떨까요, 단장?”

“솜인형이야, 나무 인형이야, 카델? 솜인형이면 서 있기 힘든데 누워도 돼?”

“계속 떠들어 봐.”

카델은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반과 라이돈을 노려보았다. 딱히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으나, 두 남자는 카델의 기분을 지켜 주기 위해 얌전히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그, 그럼 다시 치수를 재겠습니다.”

되찾은 평화에 필립이 마른침을 삼키며 줄자를 꺼내 들었다.

*

카델은 치유사들의 집중적인 케어와 풍족한 음식, 편안한 환경 속에서 충분한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종종 황제를 만나 중요 사항을 논의하거나 우연히 마주친 드레프에게 면박을 받는 일이 있긴 했으나, 그다지 타격은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무난한 일상을 보낸 뒤. 임명식 당일이 되었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카델 님! 예상대로 흰색을 정말 잘 받으시는군요.”

“고마워요.”

카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곧 정식으로 임명될 예정인 적린 기사단의 단복.

순백색에 가까운 단복에는 순은으로 만들어진 단추와 밝은 은색 실의 매듭이 정갈하게 얽혀 단정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색이 옅어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등에 두른 붉은 망토가 어우러지며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함까지 얹어졌다.

카델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단원들 단복은 망토가 아니라 한쪽 어깨에 천을 걸친 것처럼 되어 있던데. 다른 이유가 있나요?”

“아무래도 단장님이시니까요. 차별화를 둬 봤습니다. 그분들은 워낙 풍채가 좋고 어깨가 넓으셔서, 카델 님처럼 망토를 두르면 너무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아, 그렇다고 카델 님의 풍채가 좋지 못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멀대 같은 놈들 사이에서 묻히지 않기 위해 몸집을 부풀리는 용도란 걸까.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카델의 앞으로 필립이 서둘러 작은 귀걸이 하나를 건넸다. 아무런 보석도 박히지 않은 검은색의 귀걸이였다.

“폐하께서 내리신 마도구입니다. 착용하면 머리색과 눈 색이 바뀔 거예요.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지금 모습이 딱 단복과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굳이 바꿔야 하는 이유라도 있으신지…….”

“폐하께서 많은 걸 묻지 말라시지 않던가요.”

“아, 그, 그렇지요. 제 질문은 잊어 주십쇼.”

카델은 눈치를 보는 필립에게 작게 웃어 주며 오른쪽 귓불에 귀걸이를 가져다 댔다. 한 번도 귀걸이를 착용해 본 적 없는 카델의 귀는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짧게라도 망설일 법했지만, 카델은 주저 없이 귀걸이의 핀을 생살 위로 밀어 넣었다.

우두둑, 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귀를 뚫는 데 성공했다. 카델은 얼얼한 귓가를 쓸어내리며 거울을 응시했다.

황제는 카델에게 ‘충성’을 증명하기 전까진 신분을 숨긴 채 행동하라 명했다. 이름은 그대로 두지만, 성은 밝히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다음은 외형이었다. 카델의 곱상한 외모는 어딜 가나 눈길을 끌기 쉬웠고, 머리색과 눈 색이 유독 젠가 라이토스를 닮아 그를 아는 자라면 한 번쯤 젠가를 떠올리게끔 유도했다.

그러니 그 두 가지 부위의 색을 바꾼다면, 의심하더라도 확신하는 이는 없을 거라는 것이 카델과 황제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게다가 아예 외형을 바꿔 버리면 나중에 카델의 신분을 밝혀야 할 때의 일이 복잡해지니. 지금은 이런 식으로 눈속임을 하는 편이 나았다.

귀걸이에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며 카델의 머리색이 서서히 검게 변했다. 머리의 끝부터 검게 번지던 것이 뿌리까지 물들이자, 다음은 눈이었다. 담담히 자신의 변화를 지켜보던 카델은 짙은 고동색의 눈이 뿌연 안개처럼 흐려지는 것을 발견하곤 당혹감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가 주신 마도구가, 정말 이게 맞나요? 혹시 색을 착각하신 건…….”

“아뇨, 그게 확실합니다. 색을 직접 정하시는 걸 옆에서 들었으니까요.”

탁하게 일렁이던 눈동자는 곧 환한 회색으로 변화했다. 검은 머리에 회색 눈. 아무리 라이토스가와 최대한 동떨어진 색을 골랐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채색일 필요가 있는 것일까.

가뜩이나 부하들에 비하면 밋밋하기 짝이 없는 인상인데. 안색이 어두침침해 존재감까지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거야, 뭐야. 가뜩이나 없는 특징을 뿌리까지 죽이면 어떡해.’

부드럽고 유했던 인상은 머리와 눈 색만 바뀌었을 뿐임에도 차분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카델 본인은 그림자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필립은 천재적인 마법사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물론 단복에는 본래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리지만.

“준비는 이쯤이면 된 것 같군요.”

바뀐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카델이 연회장으로 향하기 위해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먼저 준비를 끝마친 반과 라이돈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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