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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은 침대 위에 한쪽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흐트러진 금발 아래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환하게 아름다웠으나, 이유 모를 섬뜩함이 감돌았다. 어쩌면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치유사들의 존재 때문일지도 몰랐다.
“으음, 기분 나빠라.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도 못 배웠나 봐. 전부 죽이면 이 더러운 기분 좀 풀리려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따라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현재 그가 있는 장소는 황실의 치유실이었으나, 내부는 온통 살얼음판이었다. 분위기를 비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얼음이 가득했다. 바닥은 빙판인 데다가 천장에는 고드름이 수북했고, 하나뿐인 문짝은 얼음으로 뒤덮여 꽁꽁 얼어붙었다.
라이돈의 회복을 위해 모였던 치유사들은 난데없는 봉변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었다.
“저, 저희는 그저 라이돈 님의 회복을 돕기 위해 치유술을 사용한 겁니다. 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에요.”
그중 한 명이 용기 내어 항변하자, 라이돈의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굴러갔다. 작게 휘어진 눈매 속에 은은한 불쾌감이 떠올랐다.
“내가 이름을 알려 줬던가.”
“그, 그건…….”
“황제 폐하는 누군데?”
“예?”
“흐응, 두 번 말하게 하려고?”
“그…… 데, 데릭 오스마 황제 폐하십니다.”
모르는 인간이잖아.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그가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가뜩이나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190이 넘는 거구의 요정은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위압감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저 천사 같은 얼굴은 처음에나 감탄을 자아냈을 뿐. 마구잡이 마법 난사를 겪은 그들에게 라이돈의 웃는 낯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돈은 습관처럼 실실 웃으며 얼음 바닥을 맨발로 가로질렀다. 치유사들은 더 물러날 곳도 없는 벽에 바짝 붙어 혹시라도 저 미친 요정이 해코지할까 눈치 보기 바빴다.
라이돈은 옹기종기 모인 그들의 머리통을 대충 훑어 내리더니, 용기 있게 발언했던 치유사 한 명을 지목했다.
“너, 일어나.”
“예…?”
“귀가 낡아서 소리가 잘 안 들려? 갈아 끼우고 싶으면 말해. 도와줄게.”
“아, 아닙니다! 일어나겠습니다!”
황급히 일어서는 치유사에게 산뜻한 눈웃음을 선사한 라이돈이 얼어붙은 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얼음을 녹여 내는 줄 알았으나, 라이돈은 그 위로 얼음 창을 쑤셔 박아 문짝을 통째로 부숴 버렸다.
요란한 소음에 뒤에 서 있던 치유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라이돈은 여유롭게 밖을 나서며 그에게 말했다.
“내 인간한테 안내해.”
“예?”
“아하하! 왜 계속 예, 하고 되묻는 거야?”
“그, 그게…….”
“재미가 없으면 똑똑하게라도 굴어.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누구라도 다짜고짜 ‘내 인간한테 안내하라’는 명령을 듣는다면 예? 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치유사는 변명하는 대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라이돈의 비위를 맞췄다.
“내 인간이라고 하심은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당연한 걸 묻네. 내 인간은 카…….”
자연스럽게 카델의 이름을 꺼내려던 라이돈이 문득 말을 멈췄다.
「“여기선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그 부탁은 아직도 유효한 걸까. 수배자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이름을 부르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상식적인 사고를 해낸 라이돈은 카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밝은 갈색인데, 부드럽고 얇아서 바람이 불면 그림처럼 살랑거려. 눈동자 색은 나무껍질과 닮았고, 웃을 땐 눈매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접혀. 뺨은 뽀얗게 말랑거리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입술이 장밋빛일 만큼 생기 넘치는 얼굴이야. 이제 알겠지?”
“예…?”
알기는 뭘 알겠는가. 치유사는 예? 라고 묻고 싶지 않았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라이돈이 드물게 웃음기를 거둔 채 인상을 구겼다.
“여기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남자를 찾으라고.”
“제, 제일 예쁘고 귀여운…….”
“그냥 죽을래?”
“아닙니다! 당장 찾아보겠습니다!”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기사들이라도 찾아가 저 미친놈을 내쫓아 달라며 사정했겠으나, 라이돈은 인간이 아닌 요정이었다. 폐하께서 특별히 더 신경을 쓰라 명하시기도 했으니. 치유사는 자신의 생존 본능과 의무를 따르기로 했다.
라이돈이 말한 남자의 특징은 하나부터 열까지 쓸모없는 정보였으나, 그가 찾을 만한 인간이라면 어렵지 않게 특정 지을 수 있었다.
적린 용병단장.
유일한 동아줄에게로 향하는 치유사의 걸음이 재빨랐다.
라이돈은 느긋하게 치유사를 뒤따르며, 기나긴 꿈속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카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봤으면 질릴 법도 한데, 진짜 카델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그는 기다란 다리로 금세 치유사를 앞지르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뒤처지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니까, 빨리 안내하자?”
하지만 그것이 농담만은 아닐 것임을, 치유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의 몸을 맘대로 만지는 걸 좋아하는 거야?”
“한 번만 더 단장에게 그따위 소름 돋는 호칭을 갖다 댄다면 네 주둥이를 찢어 주마.”
“흐응, 자기라서 자기라고 부르는데 내 자기도 아닌 반은 무슨 상관일까?”
거의 습관처럼 언성을 높이는 반과 익숙한 듯 순진한 표정으로 그의 화를 돋우는 라이돈. 그들의 사이에서 쩔쩔매는 것은 카델이 아닌 재단사였다. 카델은 곤란에 빠진 재단사와 눈이 마주치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과의 대화가 끝난 뒤, 잠시 자리를 비워 주었던 재단사와 하인들이 돌아왔다. 카델은 일찌감치 치수를 쟀기에 할 일 없이 반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의식이 돌아온 라이돈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것이다.
「“아하하! 카…… 아니, 자기! 나 왔어. 보고 싶었지? 난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냐면, 이 멍청한 인간이 길을 못 찾고 꾸물거려도 살려 줬을 만큼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