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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밝은 햇살이 비쳐 들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선선한 날씨,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갓 깨어난 카델은 그 평화를 누릴 수 없었다. 식은땀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하얗게 질린 얼굴. 긴 악몽을 꾼 듯 오한이 들었고, 몸이 축 늘어졌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제 무슨 낯으로 반을 봐야 하는 걸까.
「“단장은 정말, 해내지 못하는 게 없네요.”」
그리 말하던 반은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차라리 과거를 엿보지 않는 게 나았을까. 그런 비겁한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나 반은 자신보다 몇십 배는 괴로울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끔찍할 것이다.
결국 카델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홀로 앓는 것보다야 바닥에 머리라도 박고 사죄하는 편이 나았다.
단단히 마음먹은 카델이 바로 옆에 자리한 반의 객실로 향했다. 노크도 잊은 채 벌컥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단장…?”
양팔을 벌리고 선 반과, 그의 허리에 줄자를 둘러 치수를 재고 있는 재단사.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옷감을 든 채 대기하는 하인들이었다.
호기롭게 문을 열어젖힌 카델이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곤 굳어 버렸다. 방 안으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카델은 애써 어색하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급히 할 얘기가 있어서.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마침 귀찮아지려던 참이었는데 다행이에요. 무슨 단복의 치수를 잰다면서 아침부터 찾아왔거든요. 그런데 급히 할 얘기라는 게 뭐예요, 단장?”
반은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고 와 자신의 맞은편에 카델을 앉혔다. 자리에 앉은 카델은 복잡한 심경으로 입맛을 다셨다.
반은 자신이 본인의 과거를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앞으로도 평생 모를 것이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미안한 점은 산더미 같은데, 정작 그것이 왜 미안해졌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
충동적인 방문이었던 만큼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카델은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반의 반듯한 다리만 하릴없이 쳐다보아야 했다.
“……제가 문제인 거죠?”
짧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반이었다. 보통은 카델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던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이유가 짐작이 간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카델의 시선이 닿아 오자 반은 멋쩍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바깥으로 나돌아 다녔잖아요. 조금 전에 왔던 재단사도 시간이 빠듯하다면서 투덜거리던데. 저 때문에 일정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그런 거 아냐.”
“괜찮아요, 단장. 그냥 심심해서 그랬던 거니까. 돌아다니는 게 문제가 된다면 얌전히…….”
“넌 내가 밉지 않아?”
괜찮아요. 반은 항상 그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아파도 괜찮아요, 배고파도 괜찮아요, 곧 죽어도 괜찮아요.
그 빌어먹을 단어가 어린 시절 내내 그를 얽매어 온 족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카델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한 마디에 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완전히 가셨다.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가 처음 날 따라왔을 땐,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 아니야. 네가 귀족을 싫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런데도 내 욕심 때문에 제국에 돌아왔어. 나 때문에 넌 황제의 밑에서 일해야 하고, 귀족들과도 계속 부딪히게 됐어. ……원망해도 이해해.”
그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대도 이해했다. 그렇게라도 속이 풀린다면 기꺼이 그 어두운 감정을 받아 낼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힘들면 날 떠나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욕심이래도 붙들어 두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놀라울 만큼 완고한 감정이 느껴졌다.
“제가 어떻게 단장을 원망해요.”
바싹 메마른 목소리.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반의 지친 음성에, 꾹꾹 애꿎은 손끝만 눌러 대던 카델의 눈빛이 작게 떨렸다.
“전 못 해요.”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카델의 앞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식은땀이 고인 카델의 손을 끌어당겼다. 투박하고도 남성적인 손이 카델의 손등을 덮듯이 감싸고는, 살살 문질러 어루만졌다.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죠? 그날 단장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삶에 그다지 미련도 없었으니, 분명 시체 꼴을 면치 못했겠죠.”
쉽게 깨지는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카델은 자신을 달래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반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반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훌쩍 자라 있었으나, 왜인지 그에게서 자꾸만 과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단장은 절 살렸고, 죽은 자에겐 영영 허락되지 않을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줬어요. 단장은 절대 모를 거예요. 단장이 제게 얼마나 많은 걸 알려 주고, 안겨 줬는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겠죠.”
“나는…….”
“조금 힘든 건 사실이에요. 싫은 건 싫은 거니까. 하지만 익숙해지지 못할 것도 없죠. 이곳엔 다른 누구도 아닌, 단장이 함께 있는걸요.”
반은 고개를 들어 카델을 똑바로 응시했다. 따스함이 감도는 황금색 눈동자는, 오두막을 나서던 어린 소년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앞만 보고 걸어요. 뒤엔 항상 제가 있을 테니, 단장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걸어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 하나 살고자 그의 상처를 헤집고, 다시금 진창으로 끌어들인 것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 믿어 달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카델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그런데도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왜 뒤야? 옆에서 걸어. 옆에서 나란히 걸어.”
울음을 참느라 절로 불퉁해진 말투에도, 반은 속없이 다정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말하는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카델은 어두운 속죄를 씹어 삼킨 채 그의 단단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겠노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