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521)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하, 하지 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아악!”

카델은 난데없이 뒤바뀐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반의 몸집이 조금 커져 있었다. 적어도 1, 2년은 흐른 듯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반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연신 로빈의 얼굴을 내리쳤다. 로빈은 어떻게든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힘으론 턱도 없었다.

마구잡이로 로빈을 가격하던 반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바둥거리며 자신의 손등을 긁어내리는 로빈을 향한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어. 네 말대로 난 천한 놈이라 네필리아와는 평생 엮일 일도 없는데. 그 집엔 발도 들이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이, 이거… 놓지 못해…!”

“괴롭히고 싶으면 차라리 나를 때리지. 내가 싫으면 나를 죽이지. 왜 내 가족을 건드렸냐고.”

“난 그냥, 네가 먹는 약인 줄 알고… 컥…!”

“네 장난질에 할아버지가 죽었어. 너 때문에 난… 나는…….”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어.

꽉 틀어 막힌 목소리가 카델의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이해됐다. 로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반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사, 살려 줘…. 살려 줘, 반…!”

“로빈 도련님! 네 이놈! 당장 떨어지지 못해!”

멀리서부터 로빈의 하인인 듯한 사내가 달려왔다. 그제야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졌다.

반은 켁켁거리며 나뒹구는 로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치아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로빈이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반은 사내에게 덜미를 잡히기 전에 재빨리 도망쳤다. 이를 악문 채 뛰어가는 그의 얼굴에선 서러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간의 흐름이 가속되며 짧은 장면들이 연달아 펼쳐졌다.

첫 번째 장면에서, 반의 오두막이 불탔다.

그는 어둠 속에 파묻힌 채 환하게 불타오르는 오두막을 멍하니 응시했다. 공허한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짝 다가온 열기가 뜨거울 텐데도, 반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카델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 타들어 가는 오두막을 지켜보았다. 그런다고 반이 알아줄 리도, 과거의 그가 덜 쓸쓸해질 리도 없었지만.

반은 불길을 알아챈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한순간에 집을 잃은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장면에서 반은 훌쩍 자라 있었다. 지금보다는 앳된 느낌이 있었으나, 거친 분위기나 날 선 표정은 배로 심했다.

그의 앞에는 우아한 차림새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계단참에 서서 위층을 향하던 반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데. 함께 걸으실래요?”

“……저를 아십니까?”

“이 여관의 손님이시잖아요. 오고 가며 스치듯 본 기억이 있답니다.”

“그렇군요.”

“밤이 어두워 혼자는 무섭네요. 같이 걸어요.”

사근사근한 말투와 고혹적인 눈웃음. 다른 남자들이었다면 한 번쯤 혹할 만한 유혹이었으나,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은데요.”

“……네?”

“제 취향이 아니십니다.”

“그, 그게 무슨…! 무례하군요. 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겠죠.”

“전 베프렌 남작가의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당신 같은 남자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접근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아닙니까?”

“불쾌하군요!”

반은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모욕적인 언사를 얌전히 받아들이다, 그녀가 계단참을 비워 준 뒤에야 묵묵히 객실로 향했다.

세 번째 장면에서, 반은 얼굴에 술을 뒤집어썼다. 착 가라앉은 섬뜩한 시선이 자신에게 술을 끼얹은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반의 살벌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삿대질을 해 댔다.

“같잖은 용병 놈이 감히 내 여동생을 모욕해? 마물 피 냄새나 풍기는 몸으로 어딜 감히!”

남자는 이전 장면에서 반에게 작업을 걸던 여인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카델은 직감적으로 그가 여인의 오빠임을 눈치챘다.

반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한 듯, 축축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비릿했다.

“어떻게 반응이 이렇게나 한결같은지.”

“지금 웃는 게냐? 내 너 같은 족속은 아주 잘 알지. 반반한 낯짝으로 귀족 여자 하나 꼬드겨서 신분 상승해 볼 심산인 것 같은데, 꿈 깨라. 오늘 이곳이 네 무덤이 될 테니.”

남자의 부름에 술집 안으로 싸움꾼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반은 그들의 숫자를 셈하듯 눈을 굴리다, 카델의 귀에나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야 끝나려나.”

네 번째 장면에서, 반은 머리에 돌을 맞았다.

“내 하녀를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네놈이 어딜 끼어드는 것이냐! 네놈은 주제에 맞게 내 옆에서 돈 받은 만큼 마차를 호위하면 돼! 어딜 시건방지게…….”

다섯 번째 장면에서, 반의 옆에는 한쪽 다리가 잘린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다리는 어쩌다 다친 거냐?”

“아, 이건……. 마을에 놀러 나오신 아가씨와 놀다가 실수로 상처를 입혔거든요. 그때 맞은 다리가 썩어서, 자를 수밖에 없었어요.”

“…….”

“한쪽만 잃은 게 다행이죠.”

여섯 번째 장면에서, 반은 음식보단 돌덩이에 가까워 보이는 빵 한 덩이를 들고 있었다.

“아니, 힘내서 마물 죽여야 하는 건 우린데. 우리한텐 빵 쪼가리 하나 주고, 늘어지게 잠이나 잘 본인들은 진수성찬이야? 가축도 이렇게는 안 다루겠어.”

동료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반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막사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고, 온기가 느껴지는 불빛이 충만했다. 여럿이서 작은 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둘러앉은 용병들과는 사는 세계가 달라 보였다.

그 앞을 기웃대던 어린 하인이 엄한 호통과 함께 내쫓기자, 반은 시선을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뜯었다.

빵인지 돌인지 분간도 안 가는 것을 꾸역꾸역 씹어 넘기는 동안, 막사에서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문과도 가까운 비루한 식사를 끝낸 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옆에 앉아 고용주의 부당한 대우를 비난하던 사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어디 가냐?”

“돌아간다.”

“뭐? 어딜 돌아가?”

“여기서 이탈한다고. 의뢰비는 필요 없어.”

“어어, 반! 야! 네가 빠지면 우린 어떡해!”

사내가 다급히 외치며 반을 붙들었으나, 반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 간단하게 손길을 물린 그가 본인의 대검과 짐 가방을 챙기곤 빠른 걸음으로 어두운 숲을 가로질렀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감에 의지하며 나아갔다. 그림자 짙은 한밤중의 숲에서, 반의 눈동자만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저놈들 지켜 밥 벌어먹느니 죽는 게 낫지.”

스산하게 중얼거린 그가 실소를 내뱉었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게 뭐 대단한 목숨이라고.”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저주와도 같았다. 귀족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살고자 하는 의지보다도 강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반이 가진 모든 기억이, 그가 겪어 왔던 모든 수모가. 그 저주에 힘을 싣고 있었다.

카델은 멀어지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자유롭던 시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과거였다. 그가 귀족을 혐오하는 이유였다. 카델은 그의 옆에서 그 짙은 혐오가 피어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고, 그랬기에.

‘……어떡하지.’

「반 헤르도스의 기억 – 과거 스토리(호감도 70 돌파)의 시청을 완료하였습니다.」

「피로 회복도가 50% 감소합니다. 육체 피로도에 유의하십시오.」

그를 다시 귀족의 소굴로 몰아넣은 자신이. 그의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어 놓은 자신이,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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