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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이 좋군. 담도 크고. 대담함과 무모함은 한 끗 차이일진대, 그대는 용케 대담했어.”
데릭의 어조에 힐난의 기색은 없다. 하지만 카델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미래가 눈앞의 남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용도 모를 지하실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일까.
황제의 근위 대장은 카델을 지하실로 이끄는 동안 천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덕분에 카델은 이동하는 내내 공포에 질려 있어야 했다. 천을 내렸을 때 앞에 보이는 것이 교수대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고민하기도 했다.
다행히 교수대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언제 목숨을 거둬 가도 이상할 게 없는 공간임은 여전했다.
「기록된 성과를 분석 중입니다. 퀘스트 결과가 나올 때까지 10분이 소요됩니다.」
카델은 시야 모퉁이로 떠오른 시스템 창을 일별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되도록 퀘스트의 결과를 확인한 뒤에 황제와 대면하고 싶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피할 곳은 없다.
“얌전히 감옥에 갇혀 말라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대로 도망쳐 제국을 빠져나갔다면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제 발로 돌아온 거지?”
“연명을 바랐다면 처음부터 제국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데릭을 향한 눈빛에선 불온하게까지 보이는 단호한 결의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횃불에 비쳐 일렁이는 카델의 고동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왜 돌아왔느냐? 어째서 제국을 지켰지? 이곳엔 더 이상 널 지켜줄 사람이 없건만.”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변덕이 이유라는 말인가?”
“제국으로 돌아와 기회를 얻고 싶었습니다.”
“……기회라.”
카델에게 이 모든 행동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존재도, 가문의 업보도. 그에게는 전부 흘러가는 이야기 속 배경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 안에 진심은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카델 라이토스’를 이해하고자 했다.
게임 속 카델 라이토스는 왜 제국을 찾았을까. 자신은 스토리의 끝을 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왔다지만 카델 라이토스는 아니었다.
겪어 보지도 못한 그의 속내를 가늠하며, 그처럼 행동하고자 애썼다. 카델은 예를 표하듯 차가운 돌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결연한 얼굴로 데릭을 바라보았다.
“라이토스가 다시 한번 제국을 수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폐하.”
카델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 뜻밖이어서일까. 내리 굳어 있던 데릭의 눈가가 짧게 떨렸다. 그는 꿇어앉은 카델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불쑥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의 일가를 몰살한 나라를 지키고자 돌아왔다니. 영 엉성하군. 정녕 짐이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 조부모와 부모, 형제를 죽인 이는 폐하십니다.”
“그렇다. 짐이 명하였다. 짐의 뒤를 지키는 자가 감히 황족 암살을 시도하다니. 그 배신은 어떤 죗값으로도 치를 수 없었거든.”
“예. 그러니 제국은 아닙니다.”
“……뭐라?”
“제국은 제 혈육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을 통치하실 뿐, 그곳의 무수한 의지까지 마음대로 조종할 순 없으시죠. 제국은 폐하의 것이나, 제국이 폐하인 것은 아닙니다.”
퍽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으나 그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다. 하지만 카델은 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제국이 폐하가 아니듯, 젠가 라이토스 한 사람 역시 라이토스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의지와 뜻이 라이토스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피를 이었지.”
“폐하께서는 같은 핏줄이니 같은 뜻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말한다면 어찌 답할 셈이냐.”
“반쪽짜리 핏줄이니 괜찮지 않겠냐고 답하겠습니다.”
당돌했다. 건방지면서도 당찼고, 언뜻 겁 없이 달려드는 듯 보여도 그 안에 깊은 신념이 느껴졌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함부로 일을 그르칠 만큼 우매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데릭은 한숨과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지하실의 벽면을 매만졌다.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
“……황실의 지하실이 아닙니까.”
“젠가 라이토스가 죽은 곳이다. 내 손으로 직접 죽였지. 그가 죽은 뒤, 아무도 이 지하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짐조차도.”
황제가 젠가 라이토스를 죽인 곳.
그 사실을 듣자 안 그래도 음울했던 공기가 더욱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카델은 떨지 않았다. 황제가 그를 젠가 라이토스처럼 죽이기 위해 데려왔다 말하더라도, 더 이상 떨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과 분석 완료! 성공 확률 87%를 바탕으로 퀘스트 결과를 도출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메인 퀘스트 ‘시작되는 침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새로운 칭호 [관문의 수호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속성 포인트가 10 증가하였습니다.」
「고급 아이템 [마족의 뼛가루(소)]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요 퀘스트 ‘제국의 기사’ 진행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황제의 명을 따라 기사단 임명식을 치르십시오.」
황제는 카델 라이토스를 죽이지 않을 테니.
데릭은 과거의 여운에 잠긴 듯 늘어진 손을 주먹 쥐었다. 시선은 카델을 향하고 있으나, 그 안에 비친 이는 카델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지킨 뒤엔 무얼 얻고 싶으냐.”
탁하게 흐려졌던 눈빛에 다시금 안광이 맺혔다. 처음의 엄숙함이 사라진 목소리에선 묘한 기대감마저 어려 있었다.
카델이 곧장 대답하지 못하자, 데릭이 재차 물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 테지. 목숨 바쳐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돌아오진 않았을 테니. 그러니 네 속내를 샅샅이 긁어 짐의 앞에 내보이거라.”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긁어내 봤자 ‘생존의 욕구’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앞으로 펼쳐질 마족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세계의 영웅이 되고자 찾아왔노라,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상대가 하이론 같은 특별한 존재가 아닌 이상, 미래에 관한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는 것은 위험이 컸다.
결국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카델 라이토스’의 정보를 총합해 그럴싸한 대답을 유추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가문을, 부서진 명예를. 되돌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이토스의 재기를 원하는가.”
“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신다면 일평생 전장을 떠돌며 싸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반쪽짜리 핏줄치곤 꽤 실력 있는 마법사이니, 분명 쓰임이 있을 겁니다. 사용해 주십시오.”
게임 속 카델의 첫 번째 목표는 영웅이 되는 것. 두 번째는 멸문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제국을 찾은 데에는 가문에 대한 애정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리라.
맞는 답을 고른 것인지, 데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들었다. 분명 쓰임은 있을 게야. ……하지만.”
라이토스는 제국의 역적이었고, 그 살아남은 핏줄의 존재가 제국의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순간. 카델은 물론 그를 기용한 황제 역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터였다.
뿐만 아니라 황족을 위협했던 가문에 다시 손을 뻗었다는 사실 때문에 황실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떨어진 권위는 다시 세우기 힘들다.
그만큼 예민한 사항이었다. 카델이 살길은 하나뿐이었으나, 데릭에게는 카델을 처리할 수십 가지의 방법과 이유가 있었다. 조금 시끄러워지더라도 미리 없애는 편이 후환은 적었다.
그러나 카델이 알고 있듯, 데릭은 그의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라이토스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그대의 충성을 증명한 이후의 일이다. 카델이라는 이름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으나, 딱 거기까지. 그대의 배경에 라이토스라는 가문을 그려 넣느냐, 마느냐는 짐이 결정하겠다. 제국을 수호하고 싶어 돌아왔다고 했으니 이견은 없겠지.”
“그렇다면…….”
“짐의 기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라. 지독한 임무를 내릴 것이고, 몇 번이고 사지에 내몰 것이나.”
어둠에 잠긴 새까만 눈동자 위로 어렴풋한 그리움이 맴돌았다. 데릭은 카델의 어긋남 없는 곧은 눈빛을 마주하며, 비밀스런 약속을 내뱉었다.
“만약 이겨 낸다면, 돌려 주마. 너의 무너진 가문과, 부서진 명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