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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이 탈옥 사실을 숨기는 데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카델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그가 갇힌 지하 감옥에 드나드는 이라고는 음식을 전달해 주는 병사 한 명뿐이었으니. 다행히 카델은 일개 병사쯤은 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을 알고 있었다.
「“미쳤어? 아직도 성을 안 빠져나가고 뭣 하는 거야? 황혼 기사단장한테 도움을 받은 것 같길래 어련히 탈출했겠거니 했는데……. 난 또 왜 찾아왔고?”」
「“이자를 받으러 왔죠, 드레프 경.”」
「“이, 이자라고?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 이어야지, 누가 용병 아니랄까 봐!”」
「“예, 이 몰염치한 용병 놈은 마지막까지 꼭 도움을 받아야겠으니, 이미 한배 탄 처지에 팍팍하게 굴지 말고 협조 좀 해 주시죠.”」
죄인의 버릇을 들여야겠으니 폐하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식사도 물도 전하지 말라.
그 거짓 지시를 전달해준 드레프 덕에 카델은 성안에 묵는 내내 탈옥 사실을 숨길 수 있었다.
황제는 드레프의 얘기대로 원탁회의를 준비하느라 카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지금 자신의 앞에 등장한 카델 라이토스의 존재에 어지간히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왜 황혼 기사단장의 옆에……. 제국을 도운 영웅이 아니었는가?”
“있어도 제국 측에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그리고 카델의 예상대로, 황제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대사들과 그들의 보좌관만이 숙덕거리며 이 은밀한 소식을 모국에 전달할 계획을 세울 뿐.
‘여기서 내가 정체를 밝히거나, 지하 감옥에 구금돼 있었단 사실만 꺼내도 회의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겠지.’
둘 중 한 가지만 터뜨려도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황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카델을 주시하는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당장 카델을 잡아들이기에도, 그대로 놔둬 카델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걸 두고 보기에도. 여기엔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대사들의 입단속에는 한계가 분명했고, 무엇을 택하든 제국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황제는 자신을 함부로 제압하지 못한다. 적어도 제국에 흠이 갈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카델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전투의 후유증이 커 폐하의 초청에도 즉각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몸을 회복했을 때 친우인 가르엘 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들었고, 제가 도움이 될까 하여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불쑥 찾아오게 되었으니,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단순한 사죄로 들릴 수도 있으나, 적어도 대사들에겐 ‘왜 제국의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던 용병단장이 화이트 왕국 측에서 발언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폭탄을 안고는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이곳에서 터뜨릴 생각은 없다. 그 의지가 분명한 태도에 황제는 당혹감을 완전히 걷어 내고 인자함을 꾸며 냈다.
“괜찮네. 오히려 그토록 찾던 용병단장을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기쁘군.”
그럼 어디, 그대의 이야기도 들어 볼까.
흥미가 깃든 황제의 발언에, 원탁의 모든 관심이 카델에게로 기울었다.
“……허어. 마계 내부와 통하는 소환진이라니. 마계의 힘이 새어 나올 만큼 봉인이 약해졌단 말인가.”
“봉인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마법진 또한 상당히 복잡한 고도의 기술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법진 안에 함정을 심어 자체적인 방어 기제를 구축해 두었을 정도니까요.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한 모양입니다.”
카델은 셀레브의 첫 소환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였으며, 마법진을 파괴한 장본인이었고, 알려진 것으로만 두 마리의 마족을 격퇴한 전적이 있는 실력자였다.
의심할 여지 없는 명확하고도 명쾌한 분석에 회의장 안으로 침음성이 흘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마계 봉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확실했다. 증거와 명분이 있는 한, 대국들은 전력을 동원하여 제국을 둘러싼 봉인을 조사야 했다. 그 후엔 머나먼 대륙 곳곳에 자리한 봉인까지 확인해야 했으니.
고된 작업이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 작업은 현재 원탁에 모인 기사단장과 부하들의 몫일 것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델은 그런 대사들의 어두운 낯을 살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힘냅시다. 어쨌든 끝은 인간의 승리일 테니.’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을 테고 말이다.
왠지 모르게 장엄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황제의 발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돌연 손끝으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슬쩍 눈을 굴리자 원탁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간질이듯 건드리는 가르엘의 모습이 보였다. 카델과 눈이 마주친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 없는 입 모양이 그려 내는 짧은 단어에, 카델의 입가가 움찔 떨렸다.
‘……멋있기는 뭐가. 하여간, 숨 쉬는 것보다 작업 거는 게 더 쉽지.’
그게 또 마냥 거북하지는 않으니, 이제는 자신도 가르엘이라는 사내가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받은 게 있으니 그런 걸지도.’
헛소리만 제외한다면 가르엘은 꾸준히 예쁜 짓만 해 왔다. 그러니 미워하는 게 더 이상하지. 역시 한 번 최애는 영원한 최애란 걸까.
카델은 자꾸만 제 손끝을 간질이는 가르엘의 손을 낚아채 꽉 움켜잡았다.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눈을 흘기자, 답지 않게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카델은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타이밍 좋게 입을 연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손에 힘을 풀자 스르륵 빠져나가는 온기가 느껴졌다.
“이로써 마계 봉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확실해졌군. 각국의 대사들은 그대들의 주군에게 ‘봉호封護 협약’에 따른 수호의 의무를 지킬 것을 속히 전달하시오. 다음 회의는 답신이 돌아오는 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각국의 대신들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예를 지키며 황제가 먼저 회의장을 떠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황제는 가만히 서서 카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리깐 카델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는, 근위 대장에게 무언가를 명령하곤 그대로 회의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황제가 사라진 회의장 안에서. 카델은 기다리던 시스템 창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기록된 성과를 분석 중입니다. 퀘스트 결과가 나올 때까지 2시간이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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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던데요, 카델 경. 황제 앞에서 떨지도 않고, 또박또박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제가 또 연기엔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 모습이 사람 마음 심란하게 만든다는 걸 아십니까?”
“……경이야말로 지금 절 심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하는데요.”
회의장을 빠져나온 뒤, 카델은 곧장 가르엘의 방으로 향했다. 근위 대장을 포함한 황제의 어떤 신하도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황제를 직접 찾아가기에는 퀘스트 결과가 나오기까지 고작 2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되도록 안전하게 진행하고 싶었으니,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르엘과 함께 있기로 했다.
‘가르엘이 옆에 있으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강압적인 방법을 쓰진 않을 테니까.’
믿는 구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카델은 창가에 걸터앉은 가르엘을 바라보았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면서도 내내 술병을 끼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의 방탕한 노름꾼을 연상케 했으나, 뛰어난 외모 때문인지 그 자유분방한 태도가 위험스러운 매력처럼 비치기도 했다.
정말이지 불공평한 세상이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카델이 가르엘에게 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고맙습니다. 휘말리면 번거로워질 일인데도 거리낌 없이 도와주시고.”
“공짜로 해준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요. 보통은 모르는 척하거나 황제에게 넘겨 버렸을걸요.”
그런가. 작게 중얼거린 가르엘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창가에 기대었던 몸을 움직인 그가 카델이 앉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술병을 내려 두었다.
“슬슬 겁나지 않습니까?”
“뭐가요?”
“내가 뭘 요구할지.”
가르엘이 허리를 굽히자 치켜든 카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카델은 가까워진 거리감이 부담스러운 듯 몸을 빼려 했으나, 단단한 등받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후퇴를 차단했다.
가르엘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카델의 턱 끝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살짝 벌어진 입술을 은근히 스쳐 지났다.
거칠고 단단해야 할 기사의 손은 부드럽고 매끈하기만 했다. 그의 수련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저주받은 힘은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듯, 지나온 세월의 흔적마저 지워 버렸으니.
카델은 자꾸만 입술 아래로 닿아오는 온기에도 마땅한 대응법을 찾지 못했다. 떨리는 눈 안으로 가르엘을 담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가르엘의 시선은 카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공들여 감상하듯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뭘 하든 도움의 대가일 뿐이라고 둘러대면 됩니다.”
다소 뻔뻔한 말투에 카델이 인상을 쓰자, 가르엘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닌 듯싶군요.”
아쉬움이 묻은 음성과 함께 가르엘의 얼굴이 멀어지고.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