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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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누군가에게 노려질 걱정도, 진행해야 할 퀘스트에 대한 고민도. 전부 내려둔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침대맡에 난 커다란 창으로는 은은한 달빛이 비쳐 들었고, 협탁 위의 촛불은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초에 불을 붙였던 기억은 없는데.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카델이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의 사물이 점차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카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흔들의자에서 익숙한 인형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르엘, 언제 돌아온 거지.’

부탁한 일이 있으니 돌아오면 깨울 줄 알았건만. 그는 흔들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졸지에 방 주인의 침대를 빼앗은 몰염치한 인간이 된 카델이 쭈뼛대며 몸을 일으켰다.

깨워서 편안하게 자도록 하는 게 좋을까,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까. 망설이며 다가가던 중, 테이블 위에 놓인 잡다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응……?”

보이는 것은 많았으나,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당연 꽃다발이었다. 어두운 탓에 무슨 꽃인지까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카델의 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크기의 꽃다발임은 분명했다.

‘또 누구한테 작업을 걸려고 이런 걸 샀대.’

어쩌면 자신 때문에 가르엘의 밤일에 지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성가신 인물과 관련되어 버렸으니,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울 테지.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금세 꽃다발에서 관심을 끈 카델의 심드렁한 얼굴은, 그 반대편에 자리한 물건을 발견하고는 곧장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벌어진 입에서 절로 격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건……! 어디서 구했지? 어떻게 구했지? 이런 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누구한테 주려고?’

덜덜 떨리는 손이 본능적으로 ‘그것’을 향했다. 황갈색의 유리병 안에 담긴 검은색 액체. 이 익숙한 물건은 분명 [순환의 물약]이었다.

속성 포인트 초기화 물약. 구하기도 힘든 데다 값도 비쌌고, 카델에겐 마밀이 선물해 주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것마저 셀레브를 상대하는 데 사용한 탓에, 현재 그는 오로지 ‘불’ 속성만 사용할 줄 아는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했다.

다른 [순환의 물약]을 구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한 속성만 파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발견에 카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꽃다발이랑 같이 있는 걸 보면 어디 마법사라도 꼬시려나 본데. 딴 놈한테 주기 전에 확 마셔 버릴까? 어두워서 물인 줄 알았다고 둘러대면…… 티 많이 나려나. 아니, 이미 마셨는데 어쩔 거야. 뒤집어서 다시 짜내기라도 할 거야?’

양심 없는 충동이 머릿속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카델은 손에 들린 [순환의 물약]을 탐욕스럽게 훑어 내렸다.

하지만 카델의 비양심적인 행동이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 흔들의자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요?”

갑작스런 주인의 등장에 카델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너무 놀라 떨어뜨릴 뻔한 [순환의 물약]을 강하게 움켜쥔 그가 빠르게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깨어난 가르엘이 턱을 괸 채 카델을 관찰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번뜩이는 자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카델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물약을 도로 내려 두었다.

“구, 구경 좀…….”

“구경이라……. 꽃다발은?”

“예?”

“꽃다발은 왜 구경 안 해요.”

왜냐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꽃을 구경해서 뭘 하겠는가. 건조한 대답을 내놓으려던 카델은 생각을 바꿔 최대한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괜히 만졌다가 꽃잎이라도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다른 분한테 줄 선물 아니에요? 시들기 전에 어서 전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르엘은 그런 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여유롭게 다가온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꽃다발을 들고는, 그 위로 고개를 숙였다.

풍성한 꽃잎이 곧게 뻗은 콧대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간질였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어 꽃의 향기를 즐긴 가르엘의 눈매가 고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다행이네요. 아직 꽃도, 향기도 멀쩡하니.”

느긋하게 얼굴을 들어 올린 그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카델의 앞으로 내밀었다. 카델이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친히 품 안으로 밀어주기까지 했다.

“경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지나가다 예쁜 꽃 가게를 발견했거든요. 경과 어울리는 꽃을 종류별로 고르다 보니 크기 조절엔 실패했지만, 시각적으로는 나쁘지 않군요.”

“이, 이게 제 선물이라고요?”

“그럼요. 오스마 제국에서 제게 꽃다발을 선물 받을 만한 인물이 달리 누가 있나요.”

이렇게 큰 꽃다발을 선물 받다니.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싱그럽게 퍼지는 꽃향기에 코가 아릴 지경인 이 화려한 꽃다발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니.

각종 졸업식이나 입학식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선물이었다. 그래서 기쁘냐고 묻는다면, 상당히 애매했다.

첫째로는 꽃을 선물해준 상대가 장성한 남자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선물의 의도가 빤했기 때문이다.

카델은 꽃다발에 시선을 박아 넣은 채 마른 침을 삼켰다.

‘꼬시려는 마법사가, 설마 나야……?’

도움을 받는 처지이긴 했으나 그리 오래된 사이도 아니었고, 그와의 관계가 진전된다면 그것은 기사단 영입 후의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성정이 가벼운 사내이니 종종 던지는 징그러운 소리도 시답잖은 농담이리라 확신했는데.

‘이걸 어떡하냐. 장단 맞춰?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굴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딴 간지러운 짓은 관두라며 그대로 꽃다발을 내려둘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영입이나 코앞의 계획을 염두에 둔다면,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건넨 호감을 요리조리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는 카델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가르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 번 시작된 웃음은 점차 크기를 불려 갔고, 카델의 어리둥절한 시선에도 멈추지 않았다.

“뭐, 뭡니까. 갑자기 왜 웃어요?”

당황한 카델의 물음에도 가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양껏 웃어댄 뒤, 눈물 맺힌 눈가를 훔쳐 낸 그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가르엘이 쥔 것은 [순환의 물약]이었다.

작은 약병을 카델의 눈앞으로 내밀자, 홀린 듯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역시 경은 이걸 더 좋아할 것 같았어요.”

“……예? 아뇨, 전혀. 꽃향기가 이렇게 좋은데 그런 정체도 모를 물약이 무슨…….”

꽃다발 위로 고개를 내리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물약을 힐끔거린다.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카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그것도 제 선물입니까?”

속이 빤히 드러나는 표정임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자꾸만 움찔거리는 입가에 바짝 힘을 준 가르엘이 보기 좋게 피어난 꽃송이 위로 약병을 올려 두었다.

“이걸로 점수 좀 땄으려나요?”

그로부터 닷새 뒤. 6대국의 대사들이 참석한 원탁회의가 시작됐다.

6개국은 각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의 단장을 대사 자격으로 파견했으며, 제국에서는 황제 데릭 오스마가 대표로 나와 직접 회의를 주관했다.

널찍한 회의장의 중심을 차지한 원탁 앞. 데번 왕국의 대사, 몰레프는 그의 보좌관이 건네주는 자료를 통해 왕국을 침범했던 마족에 대한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고, 가르엘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내용을 경청하고 있었다.

“조사한 결과, 데번 왕국을 공격한 마족은 과거 마계 전쟁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고위 마족 ‘제니프’였습니다. 시체를 발견하진 못했지만 남은 흔적으로 사망했으리라 추정된 마족이었죠. 데번 왕국은 제니프 생포에 성공했으나, 심문 이틀 차에 자결한 탓에 특별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몰레프의 발표가 끝나자 원탁 위로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6개국 중 5개국의 대사들이 들고 온 정보가 전부 이 같은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마족이 침략했고, 격퇴에는 성공했으나, 그들이 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다.

황제 데릭 역시 제국에 흉터처럼 남은 마법진의 확실한 쓰임새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데릭이 침음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비슷한 시기에 각국을 공격한 마족. 대부분이 마계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하거나 사망으로 추정된 마족이었으니, 그들의 등장이 우연일 리는 없다.

그는 마계의 봉인에 이상이 생겼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타당한 근거 없이 대국들의 뜻을 한데 모으기는 힘들다.

날카롭게 가라앉은 시선이 맞은편을 향했다. 화이트 왕국의 대사, 가르엘 몬자시. 아직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별다른 기대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들어 보아야 했다.

황제의 시선이 움직이자 가르엘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로 보좌관이라 추정되는 한 사내가 다가와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후드를 눌러쓴 보좌관의 칙칙한 차림새가 거슬리긴 했으나, 데릭은 말을 얹는 대신 가르엘이 가져온 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음, 이런 식으로 초를 치긴 싫었습니다만.”

가르엘은 건네받은 서류 더미를 가볍게 흔들다, 그대로 원탁 위에 내려 두었다. 훤칠한 얼굴에 번진 느긋한 미소는 꽤 눈요기가 되었으나, 중대한 사안을 논하는 자리에서 환영받을 만한 종류의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웃음기 하나 없는 원탁을 두고도 가르엘은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화이트 왕국 측의 정보를 꺼내 봤자 여섯 번째 돌림노래만 될 듯싶군요. 황제 폐하께서도 듣기 지겨우실 테니, 저는 조금 다른 얘기를 꺼내 볼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폐하?”

데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통찰력 깃든 눈빛이 가르엘의 심중을 파악하려는 듯 차갑게 번뜩였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가르엘은 짧게 감사를 표하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한날한시, 각기 다른 국가에서 사라졌던 옛 마족이 튀어나왔다는 건, 당연히 마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얘기겠죠. 다들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등장한 마족들은 실종이나 사망으로 추정된 상태였을 뿐, 봉인되었다는 기록이 남지 않았죠. 덕분에 이번 침공의 원인이 마계 봉인의 균열에 있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어졌습니다.”

깊은 자색의 눈동자가 원탁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대부분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한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황제는 어느 정도 이야기의 맥락을 짚은 듯 가르엘을 향한 시선에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원인이 봉인에 있지 않다면 저희로서는 오스마 제국을 도와 제국 내의 봉인을 확인할 명분이 없어집니다. 귀한 전력을 정확하지도 않은 문제 확인을 위해 밖으로 돌리는 것보단,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마족의 대비를 위해 자국에 주둔시키는 편이 나으니까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폐하. 제국이 마계 봉인의 중심이라고 한들, 확실치도 않은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타국의 세력이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 어려운 일을 진행해 보고자 경들을 불러모은 게 아니겠나.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았으니, 본론을 꺼내 보게. 앞선 과제의 해결책이 있기를 바라지.”

가르엘과 데릭의 시선이 교차하며 원탁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매서워졌다. 원탁의 인물들은 날 선 공기에도 경직되지 않은 채 평정을 유지했으나, 그들을 따라온 보좌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무거운 공기의 흐름을 끊어낸 것은 가르엘이었다.

“딱 한 곳. 봉인되었음이 확실한 고위 마족이 출현한 국가가 있죠.”

제국에 등장한 고위 마족, 셀레브. 그녀는 봉인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마족 중 하나였다. 데릭이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가르엘도 거리낄 것 없이 질문했다.

“마족이 처음 출현한 마법진의 분석을 아직 끝마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마법진의 출처가 어디냐에 따라 각국의 행보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분석에 큰 진전은 없네. 이미 파괴된 상태인 데다, 도주한 고위 마족 역시 추격에 한창이니.”

미세한 짜증이 섞인 대꾸에 가르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마법진의 출처를 밝혀낼 수 있는 능력…… 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갖춘 인물을 데려올 만한 인망은 있죠.”

“……짐의 마법사들 역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네. 그들이 능력이 없어 마법진 분석에 애를 먹고 있다는 소리인가?”

“아뇨, 폐하. 그 어떤 천재적인 마법사라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지어는 이미 파괴된 마법진을 쉽게 분석해 낼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인물은, 파괴되기 이전의 마법진을 파악하고 있으며, 마족에 대해 박식하고, 능력까지 출중하다는 뜻입니다.”

“파괴되기 이전의 마법진……?”

데릭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가 스쳤다. 가르엘은 부드럽게 시선을 돌려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내내 물러서 있던 가르엘의 보좌관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보좌관은 고집스레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어 내렸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얼굴일 겁니다. 고위 마족과의 전투에서 큰 공헌을 한 적린 용병단의 단장이죠. 마법진을 파괴한 당사자이기도 하고요.”

훤히 드러난 카델의 얼굴에 회의실이 한 차례 술렁였다. 대사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적린 용병단장의 실물을 확인했음에, 황제 데릭과 그의 보좌관 격으로 동행한 근위 대장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카델 라이토스의 등장에. 전부 충격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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