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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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듣기 좋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인데 음의 조합이 그럴싸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오늘은 운이 따랐다.

가르엘은 검지를 까딱이며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어 있던 검지에는 카델에게 받은 [운명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이어진 붉은 실은 가파르게 떨리고 있었다.

“음, 멀리도 숨어 있네.”

제국의 수도, 라니아.

라니아는 제국의 중심부인 만큼 호화로운 삶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화려한 도시였으나, 밝은 곳일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은 법이었다.

비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차던 대낮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거리에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흘렀고, 습한 비린내도 풍겼다.

나다니는 사람들 역시 핼쑥한 몰골로 지친 몸을 짐짝처럼 끌고 있을 뿐, 기운이나 의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우울한 뒷골목에서 가르엘의 외모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비루한 햇빛 속에서도 찬란하게 도드라지는 백발과 멀리서도 눈에 띄는 또렷한 자색의 눈동자. 한쪽 눈을 가렸음에도 문제없이 발광하는 미모와 훤칠한 풍채는 그저 한 번 옆을 스치기만 해도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가르엘은 유유자적 남들의 시선을 헤쳐 가며 붉은 실을 일별했다.

“……여기인가?”

확연히 짧아진 붉은 실은 어느 낡은 여관의 위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국은 영웅 대접이 박한 편인가 보네.”

이런 허름한 여관이라니. 카델은 그의 부하가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니, 이곳을 직접 보았다면 억장이 무너졌을 테다.

설렁설렁 여관으로 들어선 그는 카운터에서 졸고 있는 여관 주인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막힘없이 쭉쭉 나아가자 곧 붉은 실과 이어진 방 하나가 나왔다.

카델의 부하는 이곳에 있었다. 그는 카델에게 부탁받았던 전언을 떠올리며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올렸으나, 그의 손마디가 문에 닿기도 전.

“단장!”

벌컥 문이 열리며,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르엘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빠르게 굳어가는 남자의 싸늘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눈을 휘었다.

“이런, 딱 봐도 제 부하는 아닌 듯한데. 다른 단장을 기대했나 보죠?”

“당신은…….”

“황혼 기사단의 단장, 가르엘 몬자시라고 합니다. 그쪽은 아마…… 반 헤르도스. 맞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광전사였죠.”

가르엘의 능청스러운 인사에도 반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가르엘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하고는 더더욱.

가르엘은 반의 박대를 무시하며 문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반길 만한 소식을 들고 왔으니 좀 들여보내 주시죠.”

카델이 끼고 있어야 할 반지를 착용한 남자라면, 마땅히 카델의 소식을 알려줄 것이다. 결국 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물려 가르엘을 들여보내 주었다.

“술은 없나요? 오래 걸었더니 목이 좀 마른데.”

“없습니다. 이곳엔 물 한 잔도 없으니 단장 얘기부터 해 주시죠. 단장은 괜찮습니까? 치유술은 제대로 받았나요? 혹시 황제와 만난 건……. 아니, 애초에 단장은 왜 당신을 보낸 거죠?”

가르엘은 속사포에 가까운 반의 질문에도 태연자약하게 방 안을 거닐었다. 술병을 찾는 듯 두리번대던 시선이 낡은 침대 모퉁이에 닿았다. 그곳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요정, 라이돈이 죽은 듯 잠자고 있었다. 가르엘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음, 그렇게 한 번에 물어 보면 대답하기가 곤란한데요. 하나씩 하죠, 하나씩.”

자연스럽게 라이돈의 옆에 걸터앉은 가르엘이 아직도 문 앞에 멈춰 서 있는 반을 돌아보며 말했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어 달라, 가 카델 경의 첫 번째 부탁이었으니까요.”

낡은 나무 의자 위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은 반이 느리게 마른세수를 했다. 축 처진 어깨와 웅크린 등에서 그간 쌓여 온 고된 피로가 느껴졌다.

“정말 단장이 그럴 계획이라면…….”

한껏 쉬어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느껴지는 시선에 가르엘 역시 라이돈을 장난감처럼 건드리던 손장난을 멈췄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군요.”

그리 말하는 반의 눈빛에선 짙은 회의감과 무력감, 허탈함이 뒤섞여 있었다. 내내 기다리던 단장이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제는 어떤 일을 벌일 것인지. 전부 전해 들었음에도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반발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카델 경의 뜻이 그러니까요. 제가 옆에 있으니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예정대로라면 회의는 사흘이나 나흘 뒤에 시작될 테니, 그동안 푹 쉬어 두는 게 좋겠군요.”

“…….”

“당장 카델 경을 만나고 싶다면 성에 들여보내 줄 수도 있습니다. 꽤 번거로운 작업이 될 테지만, 저는 오스마 제국의 귀빈이니.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여차하면 한 방에 들여 같이 생활할 수도 있었다. 이미 한 번 카델을 잠자리 상대로 꾸며 낸 전적이 있으니, 두 번이라고 못할 것은 없었다.

뻔뻔한 생각을 하며 반을 바라보자, 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장이 절 찾지 않았다면 그 계획에 제 존재가 불필요하다는 얘기겠죠.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니. 시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계획이란 것쯤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건 원치 않으니, 단장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낫겠군요.”

참으로 듬직한 부하였다. 자신이 후계로 점찍어둔 모들렌 또한 제법 듬직한 사내였으나, 그와는 결이 달랐다. 단순한 위계를 한참 벗어난 듯한 반의 감정은,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르엘에게까지 전해질 만큼 묵직했다.

그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가르엘은 그의 심정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야기는 전부 전했으니,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아, 여기 요정에게는 이 약을 먹이도록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가르엘이 품에서 꺼낸 작은 약병을 라이돈의 옆자리에 올려 두었다.

“요정에게 제 치유술은 큰 효과가 없을 겁니다. 대신 이 약을 하루에 한 방울씩 복용시키세요. 의식을 되찾는 속도를 높여 줄 겁니다. 제가 직접 만든 물약이니, 효능은 보장하죠.”

가르엘은 전언 외에도 부하들의 치료를 부탁받은 몸이었다. 때문에 가장 먼저 반을 치료하려 했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라이돈의 내상 역시 마기를 꺼내지 않고는 치유가 어려운 상태였고, 심지어 마기가 간섭할 경우 악화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혹시 몰라 챙겨온 약을 건네주는 것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반은 따로 감사의 말을 하는 대신 고개만 가볍게 까닥였다. 고마움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가르엘은 그저 가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카델 경이 두 분의 상태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적어도 숙소 정도는 좋은 곳을 찾는 게 좋겠군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가르엘은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복도를 가로지르자,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를 내던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가르엘은 굳이 소음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여관을 벗어났다.

“할 일도 다 했으니, 어디 점수 좀 따러 가 볼까.”

앞으로 며칠 동안 카델과 한 방에서 생활해야 할 텐데. 그 딱딱한 태도를 지우고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뇌물이 필요할 듯했다.

오랜만에 공을 들일 사람이 생기자 무료하던 일상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경쟁자가 많은 상대일수록 호승심이 끓어오른단 말이지.”

가르엘은 우중충한 뒷골목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즐거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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