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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프가 챙겨온 새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눌러 썼다.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며 이동하는 내내 카델은 드레프의 발밑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발각된다면 드레프는 자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당연했다. 솔직히 역적의 반쪽짜리 후손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외였다. 그 이상의 호의를 바라기는 힘들었고, 드레프에겐 그렇게까지 해서 카델을 지켜야 할 의리도 없었다.
‘일단 성을 빠져나가서 반을 찾아가야겠어. 황제와 얘기하는 것보단 차라리 제국인들을 선동하는 쪽이 빠르게 먹힐 것 같으니까.’
적린 용병단이 관문 수호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 입소문을 탔을 것이다. 그걸 위한 라이돈의 [환언]이었으니까. 조국을 지킨 이방의 세력에 대한 호기심은 극에 달했을 테니, 때맞춰 등장해 준다면 제국의 관심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아직 내가 라이토스라는 걸 밝히는 건 리스크가 커. 라이돈의 존재로 유명세에 불을 붙이고, 황제가 직접 찾아오게끔 유도하자고.’
뭐가 됐든 기사단 임명의 최종 결정권자는 황제였다. 그와 당당히 대면할 수 없다면, 퀘스트는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좁은 시야 가득 드레프의 신발을 담아내며 계획 세우기에 열중하던 때. 드레프의 걸음이 멈췄다. 덩달아 몸을 세운 카델이 멈칫하자,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앞길로 쭉 이동하면 후문과 인접한 작은 정원이 나올 거야.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끝까지 긴장 풀지 말고, 정원의 가장 큰 나무 뒤에 개구멍이 있으니 거기로 나가.”
“이왕이면 거기까지 바래다…….”
“신호 주면 뛰어.”
단호한 음성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좌측 너머에서부터 다가오는 세 명의 기사가 보였다. 내내 드레프의 발만 보느라 사람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드레프와 카델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카델이 가야 할 지름길을 가로지르려는 듯 방향을 꺾고 있었다.
금세 긴장한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으나, 안정을 취할 새는 없었다.
“지금!”
카델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여기서 들키면 끝이다. 아직도 마력 분출을 방해하는 팔찌를 풀지 못했고, 아군은 없다. 탈출 기회는 단 한 번뿐.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는 카델의 뒤편으로, 드레프의 외침이 들렸다.
“어이, 너희! 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훈련 안 해?”
보통 이 시간엔 점심 식사 뒤의 짧은 휴식을 즐긴다. 그 쉬는 시간을 틈타 카델을 탈출시킨 것임에도, 드레프는 짐짓 엄하게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난데없는 봉변에 희희낙락 산책하던 세 명의 기사가 쭈뼛거리며 경례했다.
“드, 드레프 대대장님.”
“아주 화목하네. 행복한가 봐. 일개 용병한테도 밀릴 실력의 보유자라는 사실이 그다지 분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일부러 평소보다 신랄한 말투로 몰아붙이자 기사들은 금세 숙연해졌다. 드레프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그들에게 눈을 부라리면서도, 지름길의 입구를 힐끔거렸다. 오래 붙들어 둘 수는 없으니 서둘러 안쪽으로 사라져 줘야 했다.
그러나 드레프가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
‘……뭐야? 왜 아직도 저것밖에 못 갔어?’
카델의 체력은 평범한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뒤떨어지는 편이었으며, 사흘간의 빈약한 식사와 풀지 못한 피로로 인해 그 수준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것.
카델은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으나, 드레프의 눈에 그것은 달팽이보다도 못한 속도였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잠시 말문을 잃자, 기사 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곧바로 훈련장으로 이동…….”
자연스럽게 드레프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고개 너머로, 천천히 멀어지는 카델의 뒷모습이 걸렸다. 그의 간절한 달음박질에 기사는 숙연했던 분위기도 잊은 채 경계 어린 목소리를 냈다.
“누구길래 저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걸까요?”
“……로브를 입었잖아. 마법사겠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드레프는 서둘러 표정을 꾸며내며 변명했으나, 나머지 두 기사가 합류하며 상황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황실 마법사의 로브는 아닌데요? 게다가 지금 성내의 마법사들은 전부 마법진 분석에 투입되어서, 제2 마탑에 모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외국에서 온 마법사인가 보지. 지금 그런 데 신경 쓸 때야?”
“하, 하지만 대대장님, 외국인이라 해도 후문 쪽의 정원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막아야 하지 않나요?”
당연히 막아야 했다. 타지의 손님이라면 뒤쫓아 사정을 설명해야 했고, 아니라면 마땅히 제압해야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나 드레프는 차마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카델을 붙잡으라 명할 수 없었고, 기사들은 드레프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저희가 살펴보겠습니다, 대대장님!”
“바로 훈련장으로 이동할 테니 걱정 마십쇼!”
그들은 황망해진 드레프가 무어라 만류의 말을 꺼내 보기도 전, 곧장 카델을 뒤쫓았다. 열성적으로 카델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부하들의 모습에 드레프의 얼굴이 점차 희게 질려 갔다.
“아무리 마법사래도 저 속도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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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 버렸다. 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부름도 무시한 도주에 추격자들의 태도도 거칠어졌다.
“감히 신성한 황제 폐하의 땅에 발을 들이다니,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금방이라도 잡힐 듯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카델은 지름길을 똑바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외곽의 정원수와 꽃밭을 파고들며 어떻게든 추격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다.
‘바람 마력만 있었어도!’
이 비루한 속도를 뒷받침해 줄 마법이 간절했다. 후드가 벗겨지고, 발목을 접질리면서도 끈질기게 도망가던 카델이었으나. 그는 슬슬 분명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기사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카델은 가시 돋친 장미 덤불을 파헤치며 마구잡이로 발을 놀렸다. 그리고 그 너머의 땅을 디딘 순간.
“……?”
마침 길을 걷고 있던 한 남자와, 뒤에서부터 뻗친 손길을 피해 몸을 날린 카델의 시선이 마주쳤다.
느리게 교차한 두 시선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카델이었다. 그는 치솟는 놀라움이나 반가움은 저만치로 밀어둔 채, 다짜고짜 남자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가르엘 경! 저 좀 도와주십쇼!”
“카델 경……? 경이 여긴 왜…….”
흐트러진 백발 아래 자리한 자색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그는 자신에게 안기다시피 달려든 카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진짜 카델이 맞는지 의심하는 듯 시선이 제법 날카로웠다.
그러는 동안, 카델을 바싹 추격하던 기사들 역시 장미 덤불 너머의 길가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맹렬한 기세로 좌우를 둘러보더니, 카델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앞장서 카델을 낚아채려던 기사가 뒤늦게 가르엘을 발견하곤 몸을 멈춰 세웠다.
햇빛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백발과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 뚜렷한 이목구비 아래 덧씌워진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는, 수려한 미모에 독특한 매력을 더했다.
단편적인 특징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황혼 기사단의 단장, 가르엘 몬자시. 뒤따라오던 기사들 역시 바로 그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화이트 왕국의 대사님이시군요. 휴식을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대사님 앞의 그 남자를 넘겨주시겠습니까?”
“으음, 이 남성분이 뭔가를 잘못했나요?”
가벼운 미소를 지은 그가 자연스럽게 카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카델은 가르엘의 가슴팍에 코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살길은 가르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르엘의 행동에 기사들은 곤란한 듯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에 몰래 들어온 침입자로 추정됩니다. 이름과 신분을 밝히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도망을 가서…….”
“아, 그렇군요. 확실히 수상할 만하네요.”
나른한 눈빛이 자신에게 안긴 카델의 정수리를 향했다. 그는 별말 없이 카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몇 차례 쓰다듬다, 별안간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시선은 카델이 아닌 맞은편의 기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 난데없는 입맞춤에 경악한 기사들의 앞에서, 가르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웃음을 쳤다.
“제가 데려온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제 신분이 신분인지라. 아무에게도 이름과 정체를 알리지 말라고 했더니, 이런 귀여운 실수를 저질러 버렸군요.”
화이트 왕국 내에서라면 몰라도, 외국에서 본 가르엘 몬자시는 고귀한 신성 기사단을 이끄는 유능한 단장이자 순결한 성기사, 그 자체였다.
방금 보여준 가르엘의 행동은 품 안의 남자를 최소 ‘밤놀이 상대’로 인식시키기엔 충분했으니.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강제로 눈치채 버린 기사들이 쭈뼛대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기사도 있었다.
가르엘은 그런 기사들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더니, 허리춤에 달고 있던 가죽 통을 던져 주었다. 한 기사가 그것을 반사적으로 낚아채자 살가우면서도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좋은 술입니다. 저 때문에 괜한 힘을 뺀 것 같으니, 선물로 드리죠.”
“아, 아닙니다. 침입자가 아니셨다니, 저희야말로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가르엘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기사들을 응시했고, 그들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급히 되돌아갔다. 가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충격이 어지간히 큰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살며시 몸을 물린 가르엘이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생글거리는 낯에는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했고, 카델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수그릴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는 제쳐두고, 설명부터 들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