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521)

마밀은 마력관을 청소해 주는 물약이라고 설명했으나, 카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게임 속 ‘속성 포인트 초기화’ 물약이라는 것을.

값도 값인 데다 구하기도 힘들어, [순환의 물약]을 하나 더 모으기 전까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한번 초기화하면 같은 약을 마실 때까지 변경이 불가능하니까. 실수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마법사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하지만 부족한 ‘한 끗’을 채우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었다. 세 가지 속성에 분배되었던 마력을, ‘불’에 쏟아붓는 것.

주저 없이 물약을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셀레브는 멈추지 않아, 그녀의 발바닥은 카델을 짓누를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며 전진했다.

이제 그녀에게 카델을 죽이는 것은 1순위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은 오로지 제국의 붕괴. 관문을 부수고, 그 너머의 인간들을 몰살하는 것.

“어디 한번 막아 보시지.”

셀레브가 생각하기에, 이 땅엔 더 이상 그녀를 제압할 만한 적수가 없었다.

*

“공격을 멈추지 마라! 절대 관문을 내어 주어선 안 된다!”

지원 대대를 포함한 호계 기사단의 총병력이 동원됐다. 마법사는 장막을 펼쳤고, 검사는 셀레브의 발목을 노린 검기를 날리거나 남은 레드 맨 잔당을 저지했다.

그럼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 어떤 공격도 셀레브의 질주를 막을 수 없었다. 태산처럼 거대한 몸뚱이는 어떤 방해에도 막힘없이 전진했다. 심지어 그녀의 육체에서부터 흘러나온 마기로 인해 시야는 점점 어두워지기만 했다.

“젠장, 저 몸뚱이로 어떻게 이런 속도를 내는 거냐고……!”

쌍검을 그러쥔 드레프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똑바로 서는 것조차 힘든 몸임에도 그는 어떻게든 힘을 보태려 했다. 그러나 연신 검기를 날려 봤자 두꺼운 마기에 흡수되거나 튕겨 나오기 일쑤였다.

“이 쓸모없는 다리는 왜 자꾸 비틀거리는 거야! 똑바로 서!”

금방이라도 관문을 깨부술 기세로 가까워지는 셀레브의 모습에 안달이 났다. 소린은 신경질적으로 제 허벅지를 후려치는 드레프의 앞을 막아섰다.

“무리하지 마라, 드레프.”

“무슨 개소리야! 지금 무리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하는데?”

“내가 막아 보겠다. 그동안 대대의 지휘권은 네게 넘기지.”

소린이 손목을 걷자, 드레프의 것과 똑같은 팔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기운과 공명한 팔찌에서부터 황금색 빛가루가 흩날렸다. 쫙 펼쳐진 손바닥 위로 은하수처럼 흘러들던 그것은, 곧 하나의 거대한 망치로 변모했다.

소린의 손에 들린 거대 해머를 일별한 드레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막아. 겸사겸사 어디 널브러져 있을 용병단장도 주워 오고.”

“그러도록 하지.”

한번 관문이 무너지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이다. 관문의 사수야말로 승전의 최소 조건. 절대 무너뜨리게 둘 순 없다.

소린이 관문을 넘어가자, 밤하늘보다 짙고 어두운 마기가 드리웠다. 그는 극악한 시야 속에서 오로지 셀레브의 기척만을 감지하며 내달렸다.

그렇게 마기를 가르며 전진하는 셀레브의 오른 다리를 발견했을 때. 해머의 위로 황금빛 기운이 응축되었다. 횡으로 치켜든 해머가 한껏 젖혀지고, 온 힘을 담은 스윙이 셀레브의 발목을 직격했다.

쿵—

생물의 뼈를 내리친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타격음이었다. 크나큰 반동이 느껴졌으나, 소린은 해머를 떼어 내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힘을 불어 넣었다. 온몸의 근육이 부풀며 손등 위로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아, 정말 재밌는 종이라니까.”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음산한 음성이 내리꽂혔다. 셀레브는 휘휘 손을 저어 마기를 흩뜨리더니, 땅바닥에서 자신의 발목을 가격한 소린을 내려보았다.

“멍청한데 용감하기까지. 주제를 모르는 종족은 멸종이 답이지.”

반대쪽 다리를 치켜든 셀레브가 소린이 선 자리를 내리찍었다. 거대한 몸집과는 다른 재빠른 공격이었으나. 소린은 그대로 몸을 굴려 공격을 회피한 뒤, 상체를 일으켠 동시에 셀레브의 뒤꿈치를 노렸다.

쿵—

둔탁한 타격음이 연속으로 울리며 셀레브의 발목으로 묵직한 통증이 번졌다. 생각보다 날쌘 움직임에 셀레브의 입가가 비틀렸다. 거슬리는 날파리가 생각처럼 쉽게 잡히지 않아 짜증이 나는 듯했다.

“기어코 죽이고 가게 만드네.”

적당히 무시하고 관문을 부수려 했더니. 이렇게 되면 오기가 생긴다.

양손을 그러쥔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퍼져 있던 마기의 일부가 주먹을 감싸듯 모여들고, 순식간에 검게 물든 손이 지면을 노렸다.

[흑권난타(黑拳亂打)]

마치 수십 개로 늘어난 주먹이 동시에 지면을 난타하듯, 빠르게 하강하는 주먹의 사방으로 여러 개의 잔상이 새겨졌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공격의 범위가 너무 넓다. 모든 잔상이 진짜 같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것은 하나하나가 실재하는 공격이었다.

전부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사적으로 해머를 치켜든 소린이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바싹 힘을 주었다.

그러나 셀레브의 주먹이 지면을 강타하기 전.

챠르르릉!

돌연, 날카로운 쇳소리를 동반한 시뻘건 불꽃이 마기를 가로지르며 날아들었다.

“뭐, 뭐야?”

그것은 불꽃으로 엮은 사슬이었다. 용암 같은 열기와 강철 같은 단단함을 품은 불꽃. 셀레브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휘감기 시작하는 사슬에 저항하려 했으나, 그녀의 저항보다 사슬의 구속이 더욱 빨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혼란스러운 눈빛이 퍼뜩 뒤편을 향했다.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흔들리는 시야 속으로, 사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 죽여 버리겠어!”

카델이었다. 그의 주위로는 가느다란 불의 사슬이 주인을 보호하듯 뒤엉켜 있었다. 불꽃 사이로 드러난 평온한 얼굴이 광분한 셀레브를 똑바로 응시했다.

“말했잖아. 죽는 건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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