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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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관문 안쪽.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한 치유사들은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이는 라이돈이었으며, 반과 드레프, 제리엘 역시 빈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각기 무리 지은 치유사들이 부상자에게 달라붙어 치료 방식을 의논했다. 소린은 그들을 차례차례 둘러보며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었다.

“요정의 마력관이 인간과 비슷한 게 다행이네요. 조금만 까다로웠어도 치료가 더뎌서 죽었을 거예요.”

“마력 폭주는? 멈춘 건가?”

“아뇨, 진행 중입니다.”

라이돈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치유술을 전개하던 치유사가 미간을 좁혔다.

“마력이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스스로 붙들어 두고 있어요. 아군이 피해를 보지 않은 건 그 덕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보통은 불가능하죠. 요정이라 특별한 건지, 그 정도로 간절했던 건지. 어쨌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기 앞서 넘친 마력부터 정리할 겁니다. 여기 모인 치유사 전원이 투입될 테니, 다른 부상자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면 추가 지원을 요청해 주세요. 한동안 이동이 힘들 거예요.”

“알겠네.”

요정이 누구도 아닌 인간을 위해 희생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 요정이 특별한 걸까, 그를 이끄는 용병단장이 특별한 걸까. 묘한 감정을 안고서 다음 부상자를 찾아갔다.

커다란 구멍처럼 복부를 뒤덮은 새까만 마기. 들러붙은 치유사들은 그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속도 더 올려! 심장까지 올라가기 전에 잡으란 말이야!”

“오, 오라 사용자예요! 마기와의 감화율이 너무 높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정화하라는 거 아니야! 너희 둘, 여기서 정화 작업해. 내상 치료는 내가 맡는다. 이거 스피드 싸움이야. 마력 아끼지 말고, 섬세하게 작업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쏟아부어.”

자세한 상태를 물어볼 필요도, 여유도 없을 듯했다. 소린은 한참을 더 반의 상태를 살피다, ‘고비는 넘겼다’는 한숨 섞인 소리를 끝으로 자리를 떴다.

“다음은 드레프와 제리엘…인가.”

아무리 고위 마족이래도 그들만 한 인재가 그토록 크게 다치고 쓰러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전투는 길지 않았고, 드레프와 제리엘이 의식을 잃은 것은 전투의 초중반에 불과했다. 더 오래 버텼던 용병단은 그보다 처참한 꼴을 맞이했으니.

‘제리엘의 폭주는 요정이 막아 주었고, 드레프의 상처에는 마기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부상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으나, 동시에 부끄러웠다. 고작 용병이 기사보다 나은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라이토스. 제국이 버린 핏줄이 다시 돌아와 제국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들이 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부끄러웠다.

“드레프와 제리엘의 상태는 어떻지?”

“아, 소린 경. 두 분 모두 좋지 못합니다. 제리엘 경은 마력 폭주의 여파로 인한 내상이 심해요.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드레프는?”

“끔찍한 외상입니다만, 치료 자체는 간단합니다. 몸이 워낙 튼튼하셔서 의식을 찾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

치유사가 두 명의 상태를 전하던 도중, 드레프가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피가 눌어붙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굴려 소린을 찾았다.

“드레프. 정신이 드는가?”

“……소린.”

짧은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메마른 기침을 토해 내던 드레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 숨을 고르던 그는 무리하지 말라는 소린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용병단장은, 어디 있지?”

마족의 구체에 갇혀 고문에 가까운 공격을 당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으며, 마땅히 대적할 수도 없는 고립된 공간. 사방에서 뻗쳐 오는 죽음의 손길을 피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의식을 놓기 직전,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던 마기가 흐려졌다. 그 너머에서 용병단장을 보았다. 멀어지는 의식 끝에서 그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을 구했음을 깨달았다.

“용병단장은 셀레브와 교전 중이다. 지원대대가 도착하는 즉시 합류할 거고.”

“……젠장.”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드레프의 속을 메웠다. 수치심 같기도 한 그 감정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더욱 괴로웠다.

소린은 그런 드레프를 바라보며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짧게 숨을 들이켠 그가 말문을 열었다.

“드레프. 할 말이 있다.”

“뭔데.”

“용병단장에 관한 얘기다. 그는…….”

그러나 소린이 진중하게 운을 떼던 바로 그때.

쿠구구구—

맹렬한 대지의 울림과 함께, 관문 바깥에서부터 짙은 보랏빛 마기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넘쳐흐르는 불길한 기운에 소린과 드레프의 시선이 움직이고. 곧 안개처럼 드리운 마기를 가르며, 거대하게 솟구친 하나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셀레브.

관문을 한참 웃도는 높이에, 그녀의 커다란 머리통이 우뚝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주특기인 [거인화]를 발동한 것이다.

거대해진 얼굴 위에 선명하게 드러난 표정은 살기와 노기로 얼룩져 있었고, 이어지는 호통은 사방의 대기를 날카롭게 진동시켰다.

“감히, 감히 에밀리아의 작품을! 네놈이……!”

마법진 해제가 완료됐다. 손상된 마법진은 더 이상 셀레브의 마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기능을 잃은 채 평범한 낙서로 전락한 것이다.

마계로 복귀할 수단이 사라졌다, 는 사실은 끔찍할 정도로 절망적인 현실이었으나. 그녀는 얌전히 패닉에 빠지는 대신, [거인화]를 통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겠노라 결심했다. 카델이 애쓴 보람도 없이 인간의 터전을 박살 내 주겠다고. 복수심에 가까운 분노였다.

그리고 그녀의 거인화가 시작된 동시에, [불사의 심장]이 소멸했다. 카델은 고탑에 가까운 그녀의 다리에 치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발아래에 깔리지 않기 위해서는 빠르게 도망가야 했다.

머리 위로 닿아 오는 시선이 소름 끼칠 만큼 선명했으나, 마냥 두려워하기에는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거인화를 막지 못하면 승산은 없어. 관문은 무조건 무너질 거다.’

퀘스트의 최종 목표는 관문의 수호. 그러니 관문을 지키지 못한다면 지켜볼 것도 없이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간다.

거인이 된 셀레브의 파괴력은 평범한 내려찍기만으로 단숨에 성벽을 허물만큼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최선은 셀레브가 관문에 접근하기 전, 그녀의 움직임을 결박하는 것.

‘그게 가능하려면 셀레브의 힘을 상회하는 마법이 필요해.’

불가능이었다. 카델의 마법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셀레브를 웃돈 적이 없었다. 그녀를 위협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것은 전투하는 내내 느꼈던 한계. ‘다속성 마법사’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걸 넘기 위해서는…….’

고민은 짧았다. 카델은 인벤토리를 열어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한 아이템을 선택했다.

아이템은 카델의 손바닥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시약병의 생김새와 흡사한 갈색의 유리병. 단단히 닫힌 마개를 열자,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액체가 보였다.

[순환의 물약]

‘처음 받았을 땐 아주 먼 훗날에나 쓸 줄 알았는데 말이지.’

도른을 떠나기 전, 마밀에게 선물받은 것이었다.

‘받거라. 평범한 마법사보단 다속성 마법사의 마력관이 훨씬 빨리 닳는다지. 마력관을 청소해 주는 물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다지 예쁜 구석도 없는 녀석이지만, 덕분에 요정을 마음껏 탐구했으니 주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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