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521)

「퀘스트 성공 확률: 21%」

‘4% 오른 건가. ……좋아. 반이 회복되는 동안 최대한 쥐어짜 보자고.’

자신은 단장이었다. 부하들을 믿고 의지하되, 그들의 부재를 감당할 정도의 화력은 보여 주어야 했다.

‘관문을 정리한 다음 라이돈을 찾는다. 셀레브는 분명 마법진으로 이동했을 거야. 폭주하던 제리엘의 마력이 잦아들었다는 건 라이돈이 무사히 일을 해결했다는 얘기니까, 도망칠 여유는 있었겠지. 일이 커지기 전에 도와야 해.’

상당히 많은 레드 맨 군단을 처치했으니, 셀레브는 다시 전력을 보충하려 들 확률이 높았다. 굳이 도망치는 라이돈을 쫓아 전투의 흐름을 망치지는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던 카델이었으나.

“……?”

일순 끼쳐 온 매서운 한기가 전장을 휩쓸며, 그가 서 있던 바닥이 얼어붙었다.

“하! 마음에 드네. 역시 요정은 재밌다니까?”

손등으로 뺨에 난 상처를 훑어 낸 셀레브가 호방한 웃음소리를 냈다. 음습한 역안이 데룩데룩 굴러가면서 빠르게 사위를 살폈다.

살갗을 때리며 몰아치는 매서운 눈보라. 바닥을 뒤덮은 빙판 위로는 뼈가 시릴 정도로 강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투명한 빙판이 비추는 것은 박쥐 같은 날개를 펄럭이며 주위를 경계하는 셀레브뿐. 어디에도 이 살벌하게 흘러넘치는 마력의 주인은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셀레브의 정면을 노린 두꺼운 얼음 창이 쇄도했다. 반사적으로 얼음을 내치려던 셀레브가 멈칫하며 동작을 멈추고. 얼음 창은 그대로 그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아무런 감각도, 통증도 없다. 정확히 복부 한가운데를 꿰뚫은 얼음 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환상인 것이다. 다음, 그다음 얼음 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허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셀레브의 오감은 더욱 날카로워져 갔다.

‘뭘 해도 환혹술이 풀리지 않아. 꽤 수준 높은 요정이잖아, 그놈.’

전신의 마기를 아무리 순환시켜도, 몸에 상처를 입어 통증을 느껴도. 환혹술은 풀리지 않았다. 술식의 완성도가 상당했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가 놀라울 정도로 흐릿해,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우스운 꼴을 당할 터였다.

‘마력이 폭주한 상태로 이렇게 강한 환혹술을 걸다니. 어지간히 미친놈인가 보군.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가.’

둘 중 무엇이든 폭주 상태를 오래 감당하진 못할 것이다. 조금만 더 이 장난질에 어울려 준다면, 요정은 금세 제 손아귀 안에 떨어지겠지. 셀레브가 그리 생각한 찰나였다.

“……흐음.”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방위의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그녀를 포위한 마법. 냉기를 머금은 얼음 창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5개 정도는 진짜이려나? 그 정도 힘은 남았지?”

이 불안정한 마력 상태로는 5개가 한계다. 그렇다면 이쪽은 최소한의 힘으로 가련한 발악에 마침표를 찍어 주리라.

“다 부수면 그다음은 너야!”

호기롭게 외친 셀레브가 ‘실체’를 찾기 위해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아무리 진짜 같은 가짜를 꾸며 내도, 실체에 깃든 기운까지 없앨 수는 없다. 그녀 정도의 강자라면 그 기운이 얼마나 미세하든 단숨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

회전하던 얼음 창이 포탄처럼 발사된 순간. 그녀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모든 마법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 새끼……!”

모든 공격이 실재할 경우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반사 신경을 갖췄더라도,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공격을 전부 방어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급히 끌어낸 최소한의 마기로 급소를 가렸다.

“캬학―!”

빈틈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급소를 노린 얼음 창이 마기의 방어벽을 거세게 두드리며 틈을 헤집었다. 셀레브는 타고난 육체 능력으로 다수의 얼음 창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예상을 웃도는 피해로 인한 당혹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설마 모든 공격이 진짜일 줄이야. 아직 폭주 초기인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얼음 창 하나하나에 대량의 마력이 고여 있었다. 평균 수준의 마법이었다면 몇 대 맞는다고 피를 보진 않았을 터. 도저히 폭주 상태의 마법사가 사용한 마법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셀레브의 예상은 틀렸다.

“아하하! 머저리 마족이네! 왜 이번에는 무식하게 일일이 쳐 내지 않은 거야? 혹시 눈치채지 못했어? 아하, 그 시꺼먼 눈깔은 장식이구나!”

온몸을 난도질당한 셀레브가 살벌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태 환혹술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요정이 높은 고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죽어 가는 놈이 말이 많네.”

“죽어 가면 말도 못 해? 쩨쩨하구나, 마족은. 하긴. 원래 그런 족속이었지?”

여태까지 고위 마족을 유린하는 전투를 벌여 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칠공에서 쏟아지는 핏물은 턱과 목을 흥건히 적시며 흘러내렸고, 이마와 뺨, 손등처럼 드러난 피부에는 두꺼운 얼음 결정이 돋아 있었다.

전신을 타고 끝없이 피어나는 냉기는 그의 주변은 물론 스스로까지 얼어붙여 갔다. 명백한 마력 폭주의 증상이었고, 일반인이었다면 똑바로 서는 것조차 고역일 고통을 겪고 있을 테다. 그런데도 라이돈은 생명을 뱉어 내듯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위험한 마족을 카델에게 보낼 순 없으니까.

“원래 체술을 쓰는 마족은 전부 너처럼 멍청해? 이렇게 쉽게 환혹술에 걸려 주니까, 기대 이하라 지루하잖아.”

“이젠 입 놀릴 힘밖에 없나 보지?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것 같은데. 요정이면 몸 사리는 시늉 정돈 해 봐. 멸족 위기잖아.”

“하하! 누가 누굴 걱정해? 주제를 알아야지, 쓰레기 같은 마족아. 이대로 죽여 줄까?”

“오오, 해 봐. 대신 잡히면 제일 먼저 네 주둥이를 찢어 줄 거니까. 조심하라고.”

라이돈이 설핏 눈을 휘며 미소 짓자, 눈꼬리에 고여 있던 핏물이 흐르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퀘스트 성공 확률: 34%」

조금씩 상승하는 기여도와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 가는 빙판. 그것이 라이돈의 생존을 증명하는 전부였다.

‘대체 왜 라이돈이 마력 폭주를……. 설마 제리엘 때문인가?’

카델도 마력 폭주를 멈출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들은 으레 시전자에게 위험 부담을 지게 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라이돈이라면, 제리엘의 폭주를 수습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즉시 작업을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본인이 희생하면서까지 제리엘의 폭주를 잠재워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라이돈은 폭주했고, 그 상태로 셀레브를 상대하고 있었다.

‘어서 돕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으로도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지금 당장 라이돈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적어도 소린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관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단지 관문을 지키겠노라 약속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문 너머에 반이 있다. 만약 관문을 방치한 채 라이돈에게 달려간다면, 기사들이 막지 못한 레드 맨이 너머를 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당하는 건 부상자인 반이다.

‘미치겠네, 진짜!’

두 부하가 전부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한 명을 우선시하는 선택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라이돈이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까. 버티지 못하는 순간, 그는 셀레브의 손에 죽게 된다. 히스테릭한 불안감은 레드 맨 토벌에도 영향을 끼쳤다.

카델은 말 그대로 마물을 쓸어 담았다. 기사들이 상대하던 레드 맨이든, 몰래 관문을 넘어가던 레드 맨이든. 가리지 않고 보이는 족족 잡아 [바람 감옥] 안에 구속했다. 섬세한 마력의 배분이나 강도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바람 감옥]의 압축력을 버티지 못한 마물은 그대로 터져 죽었고, 나머지는 뒤이어 내리꽂힌 벼락에 통째로 구워졌다.

이제 관문의 앞에는 카델이 처리한 마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의 공격에는 짧은 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마물을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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