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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앞에 누운 제리엘은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고, 범람하던 마력 역시 잠잠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라이돈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끌어 내렸다.
“……우와.”
짧은 감탄사를 뱉었을 뿐임에도 울컥 핏물이 차올랐다. 피식피식 웃을 때마다 턱 아래로 굵직한 핏줄기가 흘렀으며,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핏방울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리엘의 폭주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역풍을 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아하하! 진짜 아파. 엄청나잖아.”
머리가 어질어질해 당장이라도 의식이 끊어질 듯한데, 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활발해진 마력의 흐름이 전신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 흐름은 제어가 불가능했으니, 라이돈의 주위로는 지독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본인이 쳐 두었던 장막에 금이 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라이돈의 팔다리, 가슴, 등허리 곳곳에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돋아나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마력관이 터져 나가는 끔찍한 감각이 동반됐다. 과도한 고통에 그의 미소에도 균열이 번졌다. 올라간 입꼬리가 짧게 경련하며 미간이 구겨졌다.
“곤란해라…….”
카델을 위해 제리엘의 마력 폭주를 멈춘 것인데, 이대로 가다간 그보다 더한 마력이 폭발할 기세였다. 라이돈은 줄줄 흐르는 핏물을 무성의하게 닦아 내며 숨을 골랐다. 어떻게든 마력을 갈무리해 폭주를 멈춰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실행도 전에 저지당했다. 얼음 장막에 난데없는 충격이 가해진 것이다.
장막을 강화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짜증이 담긴 시선이 충격의 근원지를 향했다. 그리고 속절없이 무너진 장막 너머에서,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네 차례야.”
셀레브. 라이돈을 찾아낸 흉흉한 눈빛에 선명한 이채가 스쳤다.
“정신, 정신 차려 봐, 반…….”
떨리는 부름에도 얌전히 감긴 두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카델은 반에게 깔린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왼팔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반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바싹 힘을 주었던 손가락도 욱신거렸다.
셀레브가 의식 잃은 반을 앞세워 달려들었을 때. 카델은 불의 장막을 해제했다. 그 기세로 불의 장막에 부딪힌다면 반은 영영 깨어나지 못할 테니까.
카델은 자신의 안전 대신 반을 택했고, 살인적인 충격파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갔다. 말도 안 되는 고도였다. 귓가에 스치는 칼바람이 매서울 정도로 살벌한 속도이기도 했다. 만약 카델이 추락하는 타이밍에 맞춰 바람 장막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대로 터져 죽었을 것이다.
최전방에 자리했던 둘은 후방까지 밀려 났다. 카델은 진군하는 마물 군단과 기사들 사이에서 반을 보호하려 애썼다.
“반, 눈 좀 떠 봐. 응?”
셀레브의 [검은 손아귀]는 피통이 큰 탱커를 제외하곤 즉사에 가까운 데미지를 받는 스킬이었다. 반 헤르도스는 탱커 포지션의 광전사였으니,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쉽게 죽지는 않을 테다. 만약 그녀의 공격이 라이돈이나 카델을 향했다면 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이 공격당한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었다.
카델은 검은 구멍이 난 것처럼 새까맣게 물든 반의 복부를 더듬거렸다. 손끝으로 닿아 오는 축축하고 진득한 액체는 분명 피였다.
속이 어지러웠다. 카델은 구역질을 삼키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몸이 떨렸다.
카델은 멀쩡한 오른팔을 들어 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숙인 고개 아래로 떨어진 땀방울이 반의 뺨을 적셨다.
“……너도, 나도. 절대 여기서 안 끝나.”
단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고 스토리의 끝을 보는 것. 그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피어난 그의 결심이었다.
카델은 웅크렸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 반의 등허리 밑에 오른팔을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그를 관문 바깥으로 빼내 치료를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고작 한쪽 팔밖에 쓸 수 없는 나약한 몸으론 의식 잃은 반을 안아 들 수 없었다. 바득바득 이를 갈며 어떻게든 반을 일으키려 했지만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는 결과가 반복될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실패에 카델의 분노가 한계치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용병단장!”
소린이 등장했다. 카델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었으나 입에서는 절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소린 경, 당장 치유사를 불러 주십쇼. 제 부하가 마족에게 당했습니다. 관문 밖으로 빼내려는데 팔을 다쳐 버려서……. 혼자서는 무리예요. 도와주세요.”
“치유사는 이미 불러 뒀네. 늦어도 30분 내에는 도착할 거야. 드레프 대대장은……. 아니, 일단 운반을 돕지.”
검은 구체에 접근하던 중 갑작스런 마기의 범람에 시야가 차단됐다.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마기가 걷혔을 때. 더 이상 구체는 보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공격에 당해 전장의 한가운데로 튕겨 나가는 용병단장과 그의 부하만이 시야를 채울 뿐.
소린은 쓰러진 반을 단숨에 둘러업고는, 빠르게 전장을 가로질렀다. 카델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온몸이 덜그럭거려 땅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들었으나,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속도를 붙였다.
급박한 전황에 부하의 부상까지 이어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라도 정체를 들킬까 우려해 고집스레 사수했던 후드가 벗겨졌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소린은 달리는 와중에도 훤히 드러난 카델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베이지색의 머리칼. 말간 얼굴 위에 드리운 어두운 투쟁심과 무언가를 감내하듯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맑은 안광이 감도는 그의 고동색 눈동자였다.
용병단장은 진한 전투의 흔적에도 바래지 않는 고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외모이기도 했다. 그러니 적어도 소린은 그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왜일까. 저 얼굴을 보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용병단장은 그가 알던 누군가와 매우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린은 그 ‘누군가’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었으나, 전장은 그 짧은 여유조차 허용치 않았다.
“관문이…….”
“소린 경! 뒤로 물러서십쇼!”
드레프를 찾아갔던 그 짧은 사이. 관문은 그새 진군한 레드 맨 군단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소린을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야!’
기사단이 최선을 다해 마물을 토벌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관문을 포위한 마물의 수는, 그들의 수고를 무위로 돌릴 만큼 상당했다. 이것은 호계 기사단의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단, 마법사의 부재로 인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기사단은 공간 이동 마법을 위해 다수의 마법사를 전투에서 제외했다. 마법사가 있었다면 멀뚱히 진군하는 마물 군단을 쓸어버릴 대형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마법사들이 맡은 역할이 그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형 마법을 난사하기에 남은 마법사의 수는 현저히 적었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반의 ‘오라’ 같은 특수한 기운을 사용하지 않는 한, 검기만으로 대량 학살을 이뤄 낼 순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급해 죽겠는데!’
관문을 부수라는 셀레브의 명령이 발동됐다. 여태껏 얌전히 관문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던 레드 맨은, 관문의 벽을 마주함과 동시에 닥치는 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새빨간 근육이 흉측하게 부풀며 민첩성과 근력이 단숨에 상승했다. 그들은 바퀴벌레 같은 속도로 벽 위를 내달리거나, 날붙이처럼 단단한 팔다리를 휘둘러 기사들의 진형을 뚫었다.
치명상을 입어도 꿈쩍 안 했다. 사지가 뜯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팔이 없으면 다리로 싸웠고, 다리가 없으면 기었으며, 사지를 잃어도 이빨을 세워 상대를 물어뜯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였다. 그렇게 기사들을 해치운 레드 맨은 벽을 타고 올라 관문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카델은 전투에 합류하려는 소린을 가로막은 채 마력을 끌어 올렸다.
“관문은 제가 맡을 테니, 소린 경은 제 부하를 바깥으로 빼 주십쇼. 길을 터 드리겠습니다.”
“그 몸으로는 힘들 텐데.”
“제 걱정은 마시죠. 돌아오시면 드레프 경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드레프 대대장의 위치를 아는 건가? 상태는?”
“장막을 쳐 뒀으니 거기서 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소린 경. 틈을 봐서 달려 주세요.”
단호하게 일갈한 카델이 난장판이 된 관문을 바라보았다. 관문과 기사들을 피하며 오로지 마물만을 타격하려면 섬세한 마법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안 돼.’
관문이 부서진다면 전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 것이고, 혹시라도 기사를 해친다면 안 그래도 혹독한 전장 속에서 아군의 불신까지 얻게 된다.
‘……해내는 수밖에.’
바람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크게 숨을 고른 카델이 관문 입구 근처에 선 레드 맨을 주시하며 쫙 펼쳤던 오른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그가 전개한 마법은 [바람 감옥]. 익숙한 마법이었으나, 이번에는 사용법이 조금 달랐다.
동시 시전을 통해 수십 개의 [바람 감옥]을 생성했다. 이 무형의 감옥은 눈앞에 포진한 마물 군단을 한 마리 한 마리씩 집어삼킬 것이다.
감옥에 들어간 레드 맨은 자신을 가둔 장막을 후려치며 난동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장막의 위로 마력을 부어 강도를 조절했다. 가둔 마물은 공중으로 띄워 아군으로부터 떨어뜨렸다. 호계 기사단의 단원들은 갑작스러운 마물의 격리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지휘관인 소린과 용병단장을 발견하곤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카델은 물처럼 빠져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레드 맨을 차근차근 구속해 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마력의 균형이 요구되었다. 한쪽에 마력이 편중된다면, 감옥은 마물의 난동을 버티지 못하고 깨질 것이다.
바싹 힘을 준 오른팔이 벌벌 떨렸다. 긴장한 등줄기로 차가운 땀방울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카델은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마물을 전부 떼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가시죠.”
간신히 입을 연 카델이 소린을 일별했다. 소린은 하늘에 둥실 뜬 마물 군단을 확인하곤 곧장 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등에 업힌 반은 여전히 의식이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카델은 그들이 관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반의 널찍한 등을 못 박힌 듯 응시하다, [바람 감옥]을 공중에서 한 점으로 모았다.
각각의 감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일반 마법의 3배는 될 법한 마력이 소모됐다. 전부 레드 맨의 파괴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감옥을 내리쳤고,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게 감옥을 진동시켰다.
‘오래 버틸수록 손해다.’
굳이 오래 묶어 둘 필요는 없었다. 카델은 [바람 감옥]을 유지한 상태로 번개의 마력을 끌어냈다. 그러자 감옥의 옆으로 대량의 전류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불규칙적으로 번쩍이며 일그러지던 전류는, 이내 거대한 창의 형태를 띠었다. 눈부신 창끝은 한곳에 모인 레드 맨을 조준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카델은 신중하게 마력을 조절하며, 완벽한 타이밍을 잡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지금!’
[바람 감옥]을 해제하는 동시에, 장전해 두었던 번개 창을 움직였다.
말 그대로 벼락같이 쏘아진 마력이 추락하는 레드 맨의 몸뚱이를 단번에 꿰뚫었다. 정확히 열다섯 마리를 꼬치처럼 가로지른 전류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눈 깜짝할 사이 번개의 창은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카델이 모든 마력을 거두자, 새까맣게 감전된 레드 맨의 시체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영창, 무시전, 2속성 동시 발현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 마법이었다.
그것을 이루어 낸 당사자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헐떡이기 바빴으나, 그 초능력에 가까운 마법을 지켜본 기사들은 전부 넋을 빼놓고 있었다. 적린 용병단의 단장이 괴물 같은 실력의 마법사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화살처럼 날아드는 시선을 전부 무시한 채, 카델은 숨을 고르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