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옆에 대대장들이 있어 소리 높여 부르기엔 눈치가 보인다. 카델은 멀리 떨어진 반과 라이돈의 주변으로 바람을 일으켜 의도적으로 방향을 비틀었다. 다행히 부하들은 그의 뜻을 감지했고, 즉시 복귀했다.
“단장,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마법진 해제부터 시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레드 맨을 아무리 죽여도 수가 줄지를 않으니, 무의미한 소모전만 이어지고 있어요.”
“맞아. 반응 없는 놈들이라 죽이는 게 하나도 재미없어, 카데―!”
평소처럼 불평을 쏟아 내려는 라이돈에, 카델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이돈에게 소리 낮춰 속삭였다.
“여기선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천천히 손을 떼어 내며 주의를 주자 라이돈의 눈매가 게슴츠레해졌다.
“……흐응, 수배자니까?”
“그래.”
라이돈은 잠시 고민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으나, 카델의 단호한 표정을 보곤 얌전히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자기라고 불러야겠다.”
“뭐? 미쳤냐?”
“왜, 자기?”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단장님이라고 불러.”
라이돈은 질겁하는 카델의 반응을 즐기며 깔깔거리기 바빴다. 용병단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외부인이 보았을 때, 요정이 인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소린과 드레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라이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짙은 흥미와 약간의 경계심, 전설 속 생물을 목도했을 때나 보일 법한 경외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 열렬한 눈빛을 당사자가 느끼지 못할 리 만무했다. 라이돈은 홱 고개를 돌려 두 남자를 훑어보고는, 예쁘장한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말했다.
“뭘 봐?”
화사한 표정과 대조되는 무례한 언사. 그러나 소린과 드레프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정이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운 듯했다.
“진짜 요정이군. 요정이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것도 용병단원으로?”
그들은 한순간도 라이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들에게 라이돈이란 요정의 존재는 같은 인격체라기보단 다른 차원의 신비한 동물이나 정령에 가까웠으니.
라이돈은 그런 두 남자의 관심을 잠자코 받아 내다, 금세 싫증을 내며 몸을 틀었다.
“자기, 저 인간들이 지원군이야? 딱 봐도 지루하게 생겼는데.”
“지금 누구더러 자기라고 지껄인 거냐, 요정.”
“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반.”
부른 것은 카델인데 반응하는 건 반이다. 라이돈은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반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바로 타깃을 변경했다.
카델은 맹렬한 기세로 다투기 시작하는 두 부하를 뒤로한 채, 소린과 드레프에게로 다가갔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정체를 숨기기 쉽다. 그는 의식적으로 셀레브를 응시하는 척,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열었다.
“레드 맨 군단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셀레브의 공격을 대비하는 게 우선입니다. 괴력이 엄청난 마족이에요. 엉성하게 방어했다간 눈 깜짝할 새에 관문이 무너지게 될 겁니다.”
카델의 의견은 타당했다. 소린이 보기에도 관문 근처까지 오지 않는 한 뚜벅뚜벅 전진만 하는 레드 맨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카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드레프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건 기사단이 알아서 할 테니 용병단은 뒤에서 보조나 하지 그래. 선두를 지휘하는 건 이쪽의 역할이니까.”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물론 전투의 보조는 하겠지만, 상황에 따라선 기사단이 용병단을 보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죠.”
“허, 기사단이 용병단을? 무슨 이유로? 실력으로도 내공으로도 기사단이 몇 수는 위일 텐데. 그런 상황은 아예 발생하지도 않을 거다.”
한참 어려 보이는 놈이 배배 꼬여서는. 카델은 드레프를 향한 비호감을 숨기려 애쓰며 최대한 담담히 대꾸했다.
“싸우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기사단의 실력이 몇 수는 위일 거란 발언이야말로 무슨 근거인지 궁금하군요.”
“뭐라고?”
“바로 눈앞의 전투만 봐도…….”
후드 그림자에 가려진 카델의 시선이 레드 맨 군단을 막아 내는 기사단의 싸움을 좇았다. 잠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카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제 부하들의 능력이 월등한 것 같습니다만.”
“너, 너 이 자식……!”
“둘 다 그만하지.”
격양되려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소린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둘의 사이를 갈라놓고는, 드레프에게 눈짓했다. 그에 바득바득 이를 갈던 드레프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병단장. 우리는 그대들이 파악한 마족과 마물의 정보를 얻기 위해 합동을 결정한 것뿐이다. 호계 기사단의 세 대대가 출정한 만큼, 전투력에 부족함은 없어.”
“물론 기사단의 강함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전장에서만큼은 격을 따지지 않길 바라며 꺼낸 말이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죠.”
“괜찮네. 제국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용병단이 관문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은 마땅히 감사를 전해야 할 일. 전투가 끝나는 대로 보답할 것이니, 그 전까진 최대한의 협력을 부탁하지.”
능숙하게 서로의 입장을 정리한 소린이 마물 군단 너머의 셀레브를 응시했다. 요정의 것과는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다르다. 불그죽죽한 한 쌍의 날개는 가벼운 날갯짓만으로도 흥건한 살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마물과 고위 마족을 상대해야 하는 전투. 이곳에서 확실히 끝을 맺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제국을 수호하는 호계 기사단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 순위는 마법진 해제, 이 순위를 마족 토벌로 하지. 마법진 해제를 위해 접근한다면 마족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최대한 방어하는 쪽으로 진행하는 수밖에.”
“기사단에 마법사가 있습니까?”
“제4대대의 대대장, 제리엘. 그라면 할 수 있을 거다. 그가 무사히 마법진을 해제할 수 있도록 드레프와 용병단이 호위를 맡도록. 나머지 마물은 나와 기사들이 처리하겠다.”
소린의 명령에 간신히 화를 삭이고 있던 드레프가 눈을 홉떴다.
“지금 나 보고 용병단이랑 손잡고 제리엘을 호위하라는 거야?”
“걱정 마라.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 지원할 테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
“이 이상의 투정은 기사단의 위엄을 떨어뜨릴 뿐이다, 드레프.”
소린의 엄격한 명령에 드레프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용병단장 쪽을 흘겨봐도 빌어먹을 후드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해나 하지 말라고.”
기사도 정신도, 명예도 없이 오로지 돈만 보는 미친 싸움꾼들이다. 언제 뒤통수를 치고 튈지 모르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인세에 나타난 요정이 이런 족속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건 놀랍지만, 말만 번지르르한 용병단장에게 속아 넘어간 게 틀림없겠지.
그렇게 잔뜩 꼬인 속내를 가릴 것 없이 드러내는 드레프를 무시하며, 카델은 여전히 말싸움 중인 부하들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