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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네. 자기들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 제국의 기사들도 안 나섰는데, 감히 멋대로 대피 명령을 내려? 어이, 거기! 사고 안 나게 제대로 안내해!”
드레프는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주민들을 통제하기 바쁜 부하에게 명령했다. 마법인지 뭔지 모를 기묘한 환청 때문에 주민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는 글렀으니, 최소한 다치지 않도록 인도해 주어야 했다.
“……건방진 놈들.”
출신지도 불분명한 용병 주제에. 그들의 등장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소린과 제리엘 역시 용병단의 독단적인 결정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용병단의 전언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관문 바깥에, 예상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고.
그리고 그들이 관문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저 마물은 뭐야?”
그 어떤 전장에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마물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형상을 하긴 했으나, 살가죽이 전부 벗겨져 새빨간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낸 놈들은 마물보단 악마에 가까워 보였다.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마법진에서 소환되고 있었고, 그 소환을 펼치는 여성 또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관문의 너비만큼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마물 군단. 그 압도적인 물량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은 고작 검사 하나와 마법사 하나, 그리고…….
“저건, 저 날개는…….”
상공을 활보하며 얼음 창을 난사하고 있는 한 남자.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두 쌍의 날개를 발견한 제리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기사단의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요정.
햇빛에 투과되어 영롱하게 반짝이는 반투명의 날개. 어마어마한 위력의 마법을 쉴 새 없이 난사하는 비현실적인 능력.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그들은 자신이 들었던 환청의 주인이 저 요정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용병단에 요정이 있단 말인가……?”
평소엔 무슨 일이 벌어져도 평정을 잃지 않던 소린이었으나. 책에서나 보았던 요정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동요하고 말았다. 그가 아는 모든 정보가 눈앞의 존재를 ‘요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음에도,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불러 세우는 외침 하나.
“지원군입니까?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해 드릴 테니, 지금은 레드 맨의 움직임을 저지해 주십쇼! 관문 앞까지 전진하게 둬선 안 됩니다!”
그제야 소린의 시선이 움직였다. 기다란 로브를 걸친 채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 남자.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로 보아 젊은 남성인 듯했다. 소린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곤 곧장 뒤를 돌아 명령했다.
“호계 기사단! 지금부터 눈앞의 마물을 격퇴한다. 단 한 마리도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기사단의 저력을 보여라!”
우렁찬 함성과 함께 전투에 돌입한 기사들의 뒤로, 세 명의 대대장이 모였다. 본래라면 대대장을 선두로 나섰겠으나, 지금은 지휘를 위한 정보 수집이 우선이었다.
소린은 로브를 쓴 남자에게로 말을 몰며 제리엘에게 말했다.
“제리엘, 너는 부하들을 엄호하며 적의 약점을 파악해라. 마물의 정체를 모르니 기습당하지 않도록 주의해.”
“뭐야, 저 남자가 용병단장 아니야? 말도 못 섞게 하다니 너무하네.”
“전황을 살피는 건 마법사인 네가 가장 적합하다.”
“쯧,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을 삼킨 제리엘이 전열의 사이로 파고들고, 소린은 드레프를 대동한 채 남자의 앞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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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마족이 부리는 레드 맨이라. 상상 이상의 거물이로군.”
“셀레브는 아직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드 맨 양산을 멈추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겠죠.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레드 맨은 관문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 전진만 한다는 건가?”
“예. 하지만 도착하는 즉시 공격성을 띱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군단의 접근을 허락하면 관문의 보호가 힘들어질 겁니다.”
카델은 후드의 끝자락을 슬쩍 끌어 내리며 대꾸했다. 소린은 반쯤 가려진 카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저들의 정체를 알아낸 거지?”
“고위 마족이 제 눈앞에서 소환됐거든요.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됐습니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린의 옆에서, 드레프는 코웃음을 쳤다. 적대적인 시선이 카델의 몸을 불만스럽게 훑어 내렸다.
“어째 적린 용병단이 가는 곳마다 마족이 등장하는 것 같군. 화이트 왕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전투를 주도했나 보지?”
“황혼 기사단 분들과 협력했을 뿐입니다. 주도한 기억은 없어요.”
“아하. 그러니 이번에도 호계 기사단과 협력해 마족을 격퇴해 보시겠다? 기사단의 힘을 등에 업고 유명세를 키울 생각이라면, 도울 생각 없으니 이만 물러서는 게 좋겠군. 이쪽은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하거든.”
드레프라고 했던가. 처음 만나자마자 마뜩잖은 태도를 보이기에 왜 그리 심기가 불편한가 했는데, 용병단에 대한 인식 자체가 좋지 못한 듯했다.
‘뭐, 알 바 없지만. 이쪽은 물러설 수가 없거든요.’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카델이 드레프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없었다면 관문은 예전에 무너졌을 겁니다. 뒤늦게 합류한 기사단 분들도 고위 마족, 레드 맨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고전했겠죠.”
“그래서―”
“딱히 호계 기사단을 이용해 이름값을 높일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용병치곤 꽤 유명한 처지여서요. 이쪽은 마물이 죄 없는 일반인을 해치는 비극을 막고 싶은 것뿐이니, 저의를 왜곡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반박할 말은 없어진다. 일일이 말꼬리를 잡으며 투덕거릴 상황도 아니었고. 결국 드레프는 거슬리는 용병단의 존재를 조금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전투가 길어지는 대로 보상 이야기를 꺼내거나 냅다 도망칠 족속들이었다.
“흥, 왜곡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만해라, 드레프. 그리고 용병단장. 지금 관문을 감싸고 있는 장막에 꽤 많은 마력을 주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셀레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힘이 필요할 거다. 관문은 기사단이 지킬 테니, 마력을 아껴 둬.”
좋습니다. 짧게 대답한 카델이 불의 장막을 거뒀다. 마침 마력을 과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카델은 작전을 논하는 소린과 드레프를 뒤로한 채 챙겨 왔던 약초를 씹어 먹으며 마력을 보충했다. 그의 시선이 전장의 최전방, 반과 라이돈이 있는 방면을 향했다.
혈류검을 개방한 반과 라이돈은 그야말로 ‘학살’에 가까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검기와 오라가 레드 맨의 몸뚱이를 양단했고,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얼음 창은 마물을 꿰뚫는 동시에 놈들의 동선을 방해했다. 방금 합류한 호계 기사단의 체력이 훨씬 우세할 텐데도, 전투의 템포는 용병단 쪽이 압도적이었다. 딱히 합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잘 싸워 주고는 있는데…….’
기사단이 합류했으니, 이쪽은 슬슬 힘을 비축해 둘 타이밍이었다.
「퀘스트 성공 확률: 15%」
기여도 상승에는 마물 토벌도 중요하지만, 셀레브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것만큼 비중 있진 않았다. 지원군이 투입되었으니 셀레브가 언제 행동을 재개할지 모른다. 그때야말로 용병단의 저력을 드러낼 순간.
‘슬슬 빼야겠군.’
카델은 멀리 떨어진 부하들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