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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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은 관문과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부하들이 넘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관문을 넘었다는 건 경비병이 환혹술에 걸렸다는 뜻. 자신도 서둘러 뒤따라야 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두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 초조한 시선이 움직인 것은, 카델과 관문의 사이, 수많은 방문객의 출입으로 다져진 널찍한 흙길에서 기묘한 기운이 포착되었을 때였다.

“……저게 뭐야?”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낙서를 하듯, 흙바닥 위에 난데없는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으로 시작해 내부를 기하학적 패턴으로 채워 가는데, 그 속도는 눈으로 따라잡는 것이 겨우일 정도였다.

심령 현상에 가까운 기묘한 장면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자신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곳에 다가가는 동안, 문양은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다른 카델이 문양의 정체가 ‘마법진’임을 파악했을 때.

“윽, 무슨……!”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음울한 기운을 띠는 짙은 보라색의 빛이었다.

끼쳐 오는 빛줄기에 카델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겨우 실눈을 뜬 시야 너머로 빛기둥 속 마법진을 빼곡히 채운 다수의 실루엣이 비쳤다.

조금 전만 해도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이런 요란한 등장의 주인공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카델이 곧장 장막을 둘렀다.

그리고 서서히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부터,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성공이다, 성공! 진짜 소환됐잖아. 대박이잖아! 어? 천재냐고, 에밀리아!”

그녀는 카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 없었으나, 판판한 견갑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갈하게 솟아난 한 쌍의 날개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라이돈의 날개와는 전혀 달랐다. 길이가 짧고, 끄트머리가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불투명한 암적색의 날개. 박쥐의 날개에 가까운 그것은 분명.

‘고위 마족……?’

마계의 핵심 전력이자 특별한 혈통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징표였다.

카델은 그들의 특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징은 물론 그들의 전투 방식, 스킬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그야, 고위 마족이야말로 카델이 오스마 제국에서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적이었으니까. 그들이 바로 기사단 승격 퀘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이 신호탄이 왜.

「메인 퀘스트 ‘시작되는 침공’ 수락 완료!」

「퀘스트를 클리어하여 스토리를 진행하십시오. 보상이 주어집니다.」

「실패 시, 스토리 진행이 불가합니다.」

왜 지금 여기서 쏘아지고 있는 것인가.

“아아아! 이게 얼마 만의 인간 냄새야! 난 자유야. 자유라고!”

포효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는 고위 마족. 공중에 떠오른 그녀의 발아래 깔린 마물 군단. 두 종류의 적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카델이, 절망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준비할 시간을 좀 줘야 할 거 아니야……!’

마족은 갑작스러운 등장 이후에도 한참을 여운에 잠겨 떠들어 대기 바빴다.

“소환이 성공했으니까, 여기 있는 인간들을 전부 죽이고, 마계로 돌아가서 에밀리아에게 성공 소식을 알리고, 그리고…….”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착실하게 계획을 세우던 그녀가 일순 홱 고개를 돌렸다. 움직인 시야 속으로 코앞까지 날아든 불덩이가 비치고.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올려 그 뜨거운 불덩이를 쳐 냈다. 불꽃에 닿은 오른손이 짙은 보랏빛 마기에 물들어 있었다.

“오. 인간이다, 인간.”

손을 내리자 불꽃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뱀처럼 수축한 동공 위로 이채가 스쳤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인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반가운데, 방대한 양의 마력까지 품고 있다.

마법사……. 마법사라면 좋지 못한 기억이 한가득이다.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얼굴 위로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인간들은 빨리 죽으니까, 지금쯤 이 몸들의 존재를 잊은 세대도 나타났을 것 같은데.”

“벌써 잊었을 리가. 고위 마족이잖아?”

“뭐야, 알고 있네? 생각보다 명이 긴 걸까, 아니면 공포를 학습한 걸까.”

“고위 마족 셀레브. 맞지?”

“오오, 이름까지? 어떻게 단번에 알아맞혔지?”

어떻게 알아맞혔냐니. 못 맞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더럽게 많이 깨져 봤으니까. 카델은 타들어 가는 속내를 숨긴 채 싱긋 미소 지었다.

셀레브는 눈앞의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인 채 턱 끝을 매만졌다. 속이 빤히 드러나는 낯이었다.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카델은 셀레브의 발아래를 일별했다. 거대한 마법진 위를 빼곡히 채운 대량의 레드 맨(Red Man). 겉가죽이 벗겨진 인간의 모습을 한 흉측한 마물이었다. ‘베이비 데빌’처럼 주로 마족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부려지는 일종의 기사단이었다. 마계 봉인 이후 모습을 볼 수 없던 놈들이기도 했고.

레드 맨 군단은 말 잘 듣는 개처럼 얌전히 정렬한 상태였다. 시선은 전부 정면의 관문을 향하고 있다. 셀레브의 명령 한 번이면 거침없이 진격할 것이고, 고작 네 명의 경비병만으론 관문을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사태를 파악한 경비병이 지원군을 요청하고, 반과 라이돈이 무사히 합류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마계가 봉인되었어도 마족의 악명은 아직 건재하거든.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어떤 약점을 노려야 하는지. 속속들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어.”

“……그래?”

셀레브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불시에 몸을 날려 카델에게 달려들었다. 탄탄한 몸체를 한 바퀴 회전시키며 날아든 그녀가 그대로 카델의 얼굴을 노리며 주먹을 꽂아 넣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기습 공격은 바람 장막에 가로막혔다. 그럼에도 주먹을 거두지 않은 셀레브가 단단히 움켜쥔 주먹에 계속해서 힘을 불어 넣었다. 셀레브의 뼈에서 나는 것인지, 장막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파열음이 시끄럽게 이어졌다.

카델은 코앞까지 다가온 셀레브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보라색 머리카락, 푸른 홍채의 역안, 대칭을 이룬 눈물점에, 날개는 작은 편.”

“지금 이 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 거야?”

“기록된 정보를 읊고 있어. 이러한 외모를 가진 고위 마족 셀레브는, 괴력을 활용한 체술이 특기이며 거인화를 통한 섬멸전에 능하다. ……직접 겪어 보니, 확실히 괴력은 괴력이네.”

카델은 태연한 표정으로 장막을 파고드는 주먹을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대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장막 위로 무지막지한 마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물처럼 새어 나가는 마력에 침착함을 가장하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미쳤어? 괴력도 정도껏이어야지. 장막 깨지면 난 그대로 머리통 터져서 죽는 거야. 제발 그만해라. 그만해 주세요, 셀레브 님.’

관문과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지만, 이쪽의 상황은 반과 라이돈에게도 잘 보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셀레브의 시선을 끄는 동안. 그 둘은 소환된 레드 맨을 처리해 주어야 했다. 놈들이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며 얌전히 대기하는 지금보다 적절한 때는 없었다.

두 남자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챘기를 바라며, 카델은 밑 빠진 독에 열심히 물을 부었다.

“아아, 곤란해.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으면 마음대로 쳐부수기가 힘들어지잖아.”

“그럼 이대로 돌아가서 재정비나 하면 되겠네.”

“좋은 농담을 하네, 인간.”

정말 농담인 줄 알았는지, 샐쭉 눈을 휜 셀레브가 가벼운 타격을 가하며 주먹을 거둬 갔다. 카델은 기어코 깨져 버린 장막을 들킬세라 서둘러 보강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웃어 주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어. 오늘 내 임무는 신나게 날뛰어 주는 거니까.”

천천히 뒤편으로 날아가면서도, 셀레브는 카델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내 쓰레기들에게 맡기고. 이 몸은 준비 운동으로, 오랜만에 만난 마법사를 찢어 죽여 볼까 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꺾인 셀레브의 손 위로 불씨처럼 사나운 마기가 튀어 올랐다.

“보기만 해도 흥분되는 마법사를 죽인 뒤엔, 인간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이 몸의 거인화로―”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까가가각!

마법진 가득히 얼음 송곳이 솟아올랐다. 간발의 차로 빼곡한 얼음 기둥을 통째로 베어 내며 등장한 검기가 매섭게 질주하며 셀레브의 등을 노렸다.

보통의 적이었다면 꼼짝없이 치명상을 입었을 기습이었으나, 셀레브는 빠르게 뒤를 돌아 날아드는 검기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넘실대는 마기의 잔상이 보일 만큼 재빠른 동작이었다.

셀레브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난데없는 마법과 검기에 기껏 대기시켜 두었던 레드 맨 군단이 절반 이상 죽어 버린 탓이었다. 그녀의 언짢은 시선이 반 잘린 얼음 기둥 너머를 향했다.

“단장! 다친 덴 없어요?”

“카델, 뛰기 싫어. 변신 풀어 줘.”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오라를 두른 인간과…….

“……요정?”

의욕 없이 달려오는 소년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빠르게 달려온 인간은 곧장 마법사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소년의 모습을 한 요정은 그 뒤를 설렁설렁 따르고 있었다.

셀레브의 안광이 빛났다. 짧게 입맛을 다신 그녀가 요정을 향해 날아들며 우악스럽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주먹이 닿기 직전, 둘의 사이로 차가운 얼음 장막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얄팍한 장막은 마기를 두른 주먹에 닿자마자 산산이 조각났다. 그대로 셀레브의 거침없는 공격이 장막 너머 소년의 뺨을 휘갈긴 순간.

“이 멍청한 마족은 뭐야?”

다섯 개의 얼음 창이 그녀의 등을 노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돈 셀레브가 맨손으로 얼음 창을 파괴했으나, 미처 부수지 못한 얼음 하나가 허리께를 스쳤다.

“……아아, 이 몸을 처음 건드린 주인공이 요정이라니. 찝찝해라.”

냉기를 품은 미약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자, 얼음 창이 날아온 방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내 마법을 맨손으로 부순 거야? 멍청한 데다 무식하기까지!”

셀레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서진 장막 너머에 있어야 할 소년이, 당당하게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공격은 분명히 소년의 뺨을 노렸으니 그 짧은 찰나에 반대편까지 이동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느 틈에 환혹술을 쓴 거래.’

의욕 없이 달려오던 그때부터였을까? 환혹술에 걸렸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요정을 상대한 지는 꽤 오래되었으니, 감이 무뎌졌을지도.

요정의 눈에 남은 마법진의 흔적을 발견한 셀레브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든 라이돈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카델의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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