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521)

기대도 하지 않았다. 떠난다고 말하면, 카델은 잡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유를 알려도 마음대로 하라며 등을 돌릴 것 같았다.

그가 의리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카델에게 그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 여겼다. 카델은 대단한 남자였으니까.

‘난 거물이 될 거다, 루멘. 내 목표는 고작 가문 하나를 아래에 두는 게 아니거든.’

처음 들었을 땐 조금 충격적이면서도 아주 거만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저 자신감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런 불온한 호기심으로 접근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며, 변화하는 풍경을 차근차근 담아낼수록. 그때의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카델은 분명 거물이 된다. 그의 능력은 세상을 밝힐 것이고, 모두가 그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뻗게 될 것이다. 그 미래를 확신하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옅어졌다.

과연 자신이 카델 라이토스라는 남자의 옆에 어울릴 만한 존재인가.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은 카델에게 있어 별 가치가 없었다. 가문과 용병단의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위치를 잡지 못했고, 전투 중 몇 차례나 카델에게 목숨을 빚졌다.

이렇게나 한심한 놈이니 카델은 떠나는 자신을 미련 없이 보내 주리라 생각했다. 조금 아쉬워할지라도, 진심으로 붙잡아 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카델을 피했다. 만약 그의 입에서 ‘잘 가.’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면, 배웅하는 표정에서 조금의 섭섭함도 없는 개운함이 엿보인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기다릴게. 네가 돌아올 때까지.’

카델은 자신을 원했고, 그의 옆으로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노라 약속했다.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불어오는 미풍의 결, 카델의 온기, 마주한 시선의 단단한 믿음까지도.

그 순간만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루멘은 선박의 난간을 움켜쥔 채, 거세게 갈라지는 물살을 응시했다. 파도의 거품 위로 카델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렇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루멘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루멘 도련님. 조셉 도련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답장을 작성하시면 대륙을 넘어가는 즉시 전서조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따뜻한 기억에 물들어 있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루멘은 냉랭한 낯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화이트 왕국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가문의 기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멘의 형인 조셉 도미닉의 수하.

루멘은 남자가 내민 편지 봉투를 받아 드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영지에 계신가?”

“도미닉 후작님께선 왕실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도련님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니, 업무가 끝나면 곧장 복귀하시리라 예상됩니다.”

“형님은…… 아니, 안 들어도 뻔하군. 저택에 틀어박혀 있겠지.”

남자는 루멘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일 뿐이었다. 루멘은 그런 남자를 향해 성가신 날파리를 쫓듯 무성의한 손짓을 했다.

“편지는 버려. 돌아가자마자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멀리서 연락할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안의 내용만이라도―”

“버려.”

단호한 대답에 남자도 더 이상 편지를 들이밀지 못했다. 루멘은 남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뒤,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꺾었다.

“대장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은데.”

가문에서 벗어나는 일이 녹록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카델은 전투적으로 식사했다. 무슨 음식인지도 모르는 것을 마구잡이로 주문하고는, 맛이 있든 없든 일단 입 안에 쑤셔 넣고 봤다. 라이돈이 있었다면 재밌는 광경이라며 즐거워했겠으나, 현재 그는 마밀에게 붙들려 갖은 질문 공세를 받는 중이었다. 그를 거스르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은 그런 카델의 불룩한 양 뺨을 살피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급하게 드시는 거 아니에요?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걱정 어린 시선에 카델이 테이블 한가득 들어찬 음식과 반을 번갈아 가리켰다. 보지만 말고 같이 먹자는 의미였다

반은 성화에 못 이겨 포크를 들면서도 카델의 앞으로 물컵을 밀어주었다. 정체불명의 풀 더미를 찍어 내는 손길엔 영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깨작거리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루멘이 떠난 것 때문에 그래요?”

조심스럽게 물으며 눈치를 살피자, 곧장 카델과 눈이 마주쳤다. 카델은 미트볼이 꽂힌 포크를 움켜쥔 채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입 안 가득 찬 음식을 모조리 씹어 넘길 때까지 빤히 반을 응시하던 그는, 꽤나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열심히 에너지를 충전하는 이유를 묻는 거라면, 루멘 때문인 게 맞기는 해. 물론 루멘이 주는 아니고, 겸사겸사.”

하룻밤 새 루멘은 용병단을 떠났고, 아침에 본 카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직도 벌겋게 짓무른 눈가가 쓰라려 보였다. 분명 루멘과 작별하는 동안 대차게 울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감히 단장을 울리다니.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루멘의 눈에 피눈물을 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반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울할 것이 분명한 카델을 위해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애써 이별을 극복하고 있는 그를 자극할까 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음…….”

카델은 아까부터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하며 자신의 기분 살피기에 급급한 반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드러나는 얼굴이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루멘은 떠난 게 아니야, 반. 집안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돌아간 거지.”

“……예?”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황망해진 얼굴이 카델을 향했다. 멋쩍어진 카델이 포크를 내려놓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긴 어려운데, 그렇게 됐어. 돌아올 거야, 루멘은.”

“돌아온…다고요?”

“뭐, 너랑 루멘이 앙숙처럼 굴긴 했어도 나름 괜찮게 합을 맞춰 왔으니까. 돌아오는 편이 더 좋지 않아?”

“그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라이돈을 떠올리면 절로 말문이 막혔다. 그 막무가내 요정을 상대하며 고군분투하는 것보단 차라리 사고방식만은 정상적인 루멘이 끼어드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져, 반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놈은 남자가 아니에요, 단장. 돌아와도 그놈은 단장을 지키는 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삭막하기는. 돌아오면 정식으로 입단시킬 거야. 그땐 좀 더 사이좋게 지내 주라.”

“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올 거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라이돈 놈, 힘이 돌아온 이후로 더 감당이 안 되거든요.”

“걔가 그렇지 뭐.”

그나마 카델이 있으면 듣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그렇다고 라이돈을 카델의 옆에 두기는 싫었다. 예정된 고생길에 숨기지 못한 한숨을 내쉬는 반의 앞에서, 카델은 잠시 내려 두었던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스마 제국에 갈 거야.”

“오스마 제국이요? 거긴…….”

“슬슬 돌아가 봐야지. 내 고향.”

정확히는 게임 속 카델 라이토스의 고향. 그의 가문을 멸문시킨 황제의 땅이었다.

카델의 과거를 아는 반으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행선지였다. 오스마 제국에선 아직도 라이토스 가문을 역적으로 여기고 있기에, 누군가 카델을 알아본다면 좋지 못한 일을 당할 게 뻔했다.

그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카델이 신중한 낯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어. 절대 잡히지 않을 테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가장 큰 문제였던 라이돈의 봉인 건이 무사히 해결됐다. 루멘에게서 다시 돌아오겠단 약속도 받아 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기사단 승격뿐.

‘기사단 승격만 해내면 드디어 마계 봉인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어.’

마계의 봉인이 풀리고, 온 세상에 마족의 마수가 뻗치는 시기. 기사단이 된 용병단은 지금껏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며 마계의 재봉인을 진행할 것이고, 종국에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게임의 스토리는 마무리된다. 비록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어렴풋한 끝이 보이고 있었다.

‘스토리가 끝나면…….’

시스템은 약속했던 특전을 보여 줄 것이다.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당연히 돌아가야지.’

그리 확신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에도. 눈앞에 자신만을 바라보는 반이 있기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회피한 카델이 그릇 위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반 입장에선 원래 카델이 돌아오는 편이 나을걸.’

고의는 아니었으나 자신은 반의 충성이 잘못된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러니 먼 훗날에라도, 어긋난 화살표를 똑바로 돌려주어야 했다.

크게 숨을 고른 카델이 내려간 입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끝이 보인다고는 해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상념은 잠시 제쳐 두어도 좋았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 밥 먹어. 많이 먹어야 힘이 나지.”

그 말을 스스로에게도 타이르듯, 카델이 입 안 가득 음식을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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