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521)

― 그렇군. 참으로, 눈부신 등불이다.

머릿속을 울리는 나직한 음성에 라이돈이 짜증스레 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건너편에서, 카델은 만세를 외치며 폴짝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끝! 났! 다!”

잔뜩 신이 난 모습에 라이돈 또한 양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뭐 때문에 저리 신났는지는 몰라도, 그가 기쁘면 자신도 기뻤으니까.

마지막 시련이 종료된 뒤. 그들은 처음 신전에 도착했을 때 진입했던 복도로 돌아왔다. 처음과는 달리, 복도의 끝에서부터 번지는 빛줄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카델은 라이돈과 함께 여전히 의식을 잃은 반, 루멘을 운반하며 복도의 끝을 향했다.

“많이 힘들었죠? 스텔라가 전부 치유해 줄 테니, 저의 헤소니아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그곳엔 거대한 석재 문을 등진 스텔라가 있었다. 카델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등지고 있는 문이 ‘해방의 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스텔라의 전신을 타고 따뜻한 온기를 품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평화로운 무형의 기운은 선명하게 새겨진 고통의 흔적을 어루만졌고, 찢어진 상처에 스며들었다.

카델은 서서히 편안해지는 육체를 느끼며 슬쩍 입을 열었다.

“……헤소니아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준비요?”

“여러분은 처음으로 시련을 통과한 도전자예요. 헤소니아의 마음에 쏙 든 도전자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모든 것을 넘길 것이라 했으니……. 그래요. 사라지고 있다, 고 하는 게 옳겠군요?”

사라지고 있다니. 예상치도 못한 발언에 굳어 있는 동안, 스텔라의 기운은 바닥에 쓰러진 반과 루멘에게까지 닿았다. 산뜻한 미풍이 그들을 어루만지자 창백한 낯빛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먼저 들어가 볼래요, 카델?”

“그래도 되는 겁니까?”

“헤소니아의 후계자는 이쪽이니까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시선이 벽면에 우두커니 선 라이돈을 향했다. 라이돈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속 모를 얼굴로 해방의 문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헤소니아의 후계자와 가장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건 카델이잖아요? 그러니 다녀와도 좋아요. 스텔라가 허락할게요. 그동안 스텔라는 카델의 소중한 동료를 말끔하게 회복시켜 놓을 테니, 맡겨만 줘요!”

용병단 전원이 모이지 않아도 괜찮다면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스텔라의 기운 덕에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됐고, 굳이 다 함께 모여 라이돈의 봉인 해제 순간을 지켜볼 필요도 없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라이돈을 불렀다. 짧은 부름에 곧장 입꼬리를 끌어 올린 라이돈이 성큼성큼 다가와 카델의 옆에 섰다.

“봉인 풀 준비 됐어?”

“준비가 필요해?”

“마음의 준비라든가……. 아니, 됐다. 가자.”

카델이 문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해방의 문’이 개방됩니다.」

「기사 ‘라이돈’과 세븐 나이츠 ‘헤소니아’의 영혼이 공명합니다.」

*

해방의 문 너머의 풍경은 신전의 내부와 전혀 달랐다. 어두컴컴한 석재 대신 새하얀 크리스털이 외벽을 메웠고, 투과되는 빛이 사방팔방 반사되며 시야를 밝혔다.

카델은 울퉁불퉁한 크리스털 바닥 위를 힘주어 나아갔다. 헤소니아는 방 중앙에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는 또 나타났다며 투덜대는 라이돈의 야유를 듣고서야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본 헤소니아의 얼굴은 선이 굵고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곳에서 고고히 군림하는 영웅의 향취가 물씬 풍겼으나, 왜인지 모를 고독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헤소니아는 라이돈을 짧게 일별한 후, 카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얼굴이 뚫릴 듯 빤한 시선에 멀뚱히 서 있으려니, 음정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주변을 볼 줄 모르고, 자신의 흥미만이 유일한 관심거리인 요정이다. 용케 여기까지 끌고 왔군.”

“벌써 라이돈을 완벽하게 파악하셨네요.”

“……그의 삶을 구원하고 싶은가?”

카델은 헤소니아의 정체가 요정이란 것도, 요정의 자유를 구속한 봉인이 그의 뜻이었단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리 질문하는 헤소니아의 눈빛 속에서, 아득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삶을 살아가며, 그럼에도 놓지 못한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위해. 죽은 뒤에도 시련이라는 껍데기 안에 영혼을 남겨 둔, 진득한 미련.

‘꼭 하이론을 보는 것 같네.’

그것은 하이론에게서 느꼈던 간절한 바람의 흔적과 닮았다. 그랬기에 카델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 고독한 삶의 종적에 섣부른 언행으로 상처를 더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약속했습니다. 라이돈과 그의 종족에게, 빼앗겼던 자유를 되찾아 주겠다고. ……지킬 겁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하이론과의 약속 역시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카델은 단 한 번도, 그와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자신감이군요, 카델.’

마지막 순간, 하이론이 보여 주었던 어렴풋한 진심을 카델은 똑똑히 마주했으니까.

헤소니아는 카델의 단단한 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음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와 오래도록 잊고 있던 희미한 감정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때의 내게도 너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어쩌면…….”

먼 과거를 회상하듯, 헤소니아가 깊게 숨을 골랐다. 진득한 아쉬움과 갈망이 굳은 얼굴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남자의 대면을 얌전히 지켜보던 라이돈은, 그 이상을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내 인간한테 눈독 들이지 마.”

웃음기 섞인 말투였으나, 헤소니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카델은 자신을 끌어안으려 다가오는 라이돈을 가볍게 밀쳤고, 라이돈은 과장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극명한 온도 차에 그제야 헤소니아의 주의가 라이돈에게로 옮겨 갔다.

“지금부터 네게 걸린 봉인을 풀겠다.”

“빨리해 줄래? 전부 끝내고 디저트를 먹고 싶거든.”

“그 전에, 네게 주어질 의무를 알아 두어라.”

이어지는 헤소니아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카델은 놀라움과 우려를 숨기지 못했고, 라이돈은 거부감과 귀찮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싫어. 내가 왜 다른 요정들의 해방까지 도와야 하는데? 난 카델이랑 싸움이나 하면서 살 거야.”

“그것이 조건이다.”

“그럼 조건을 바꿔.”

“그럴 수 없다.”

심통맞게 변한 라이돈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헤소니아가 요정족의 봉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됐다는 것도 놀라운데, 봉인에 대한 모든 권능을 라이돈에게 넘기겠다니…….’

그의 말대로라면, 라이돈이 물려받을 헤소니아의 힘으로 능력이 봉인된 요정은 신전의 시련 없이도 봉인 해제가 가능해진다. 바깥으로 나올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대단하긴 한데, 그런 엄청난 권능을 라이돈한테 줘도 되는 거야? 헤소니아, 너무 오랫동안 신전에 갇혀서 지쳤나? 다 내려놓고 싶어졌어?’

라이돈에게 요정족을 관리할 의욕이 없다는 것은 저 뾰로통하고 짜증스러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헤소니아는 대체 그의 무엇을 보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자신의 일도 아닌데 도리어 불안해졌다. 이 고생을 해 놓고 라이돈의 봉인 해제가 망설여질 지경이니, 말 다 했다.

그리고 헤소니아는, 찜찜한 낯으로 자신과 라이돈을 번갈아 보는 카델을 향해 말했다.

“해방의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든다면, 망설이지 말고 나의 힘을 퍼뜨려라. 그때까지 그 힘은 성심성의껏 네 곁을 보좌할 것이다.”

“……그 말씀은.”

“해방의 힘을 얻는 것은 네가 아니지만, 그 힘을 사용할 자는 너다. 카델 라이토스. 그러니 앞으로도, 후계자의 운명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기를.”

카델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헤소니아는 그의 망설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결정을 마친 것이다.

“드디어, 생과의 안녕을 고할 시간이구나.”

기나긴 후회를 끝마친 자의 마지막 숨결처럼 희미하게 흩어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헤소니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헤소니아……?”

카델의 망연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눈 깜짝할 새에 전부 사라졌다. 헤소니아가 서 있었던 바닥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물체를 제외하고는.

얼핏 진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작은 순백색의 보석이었다. 카델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헤소니아가 남긴 ‘해방의 힘’임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라이돈을 향하고. 라이돈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보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 힘을 가졌으면 좋겠어?”

“선택은 네 몫이야. 나한테 네가 원하지 않는 걸 강요할 힘은 없으니까. ……하지만.”

보석을 올린 손을 천천히 주먹 쥐자, 손바닥 위로 얕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카델은 그 연약한 감각을 기억해 두려 애썼다.

“하이론 님도, 헤소니아도, 전부. 자유를 원했어. 난 왜 그 당연한 권리를 죽음까지 바쳐 가며 바라야 하는지 모르겠거든.”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던 손을 펼쳤다. 다시 드러난 보석 위로 지긋한 온기가 맴돌았다.

“그러니까…… 응. 네가 이 힘을 가졌으면 좋겠어.”

반질거리는 보석을 바라보는 라이돈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뻗어진 손이 카델의 손바닥을 덮듯이 훑어 내리곤, 부드럽게 보석을 쥐었다.

“그럼 그럴까?”

손끝으로 장난스럽게 보석을 굴리던 라이돈이 불쑥 입을 열어 그 안으로 보석을 던져 넣었다. 잠시 맛을 보듯 혀를 굴리던 그의 목울대가 가볍게 움직이고.

“카델이 함께해 준다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

길었던 기다림의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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