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3/100」
연속적으로 시스템 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델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 운명을 사랑해 줘. 함께해 줘. 계속 옆에 있겠다고 약속해.”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4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7/100」
“카델이 없으면 안 돼. 난 아무것도 못 해. 카델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려 줘야 해. 전부 보여 줘야 해. 빨리 약속해. 약속해 줘, 카델.”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70/100」
“……응? 어서.”
턱 끝을 간질이던 머리칼이 천천히 올라갔다. 지긋한 시선이 굳은 얼굴을 연신 살폈다. 카델의 대답을 기다리며 피어나는 조급함에 어깨를 끌어안은 손끝에는 바싹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카델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진 의식을 서서히 건져 내고 있었다.
“갑자기 너…….”
라이돈이 올라탐으로써 저울의 무게가 변화했다. 한껏 치솟아 있던 바닥이 덜커덩거리며 낙하했고, 종국엔 루멘과 헤소니아가 있는 자리의 아랫면이 보일 정도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몰려들던 젤리 봄은, 전부 라이돈의 냉기에 얼어붙어 동작을 멈췄다. 모든 시간이 정지하고, 그들이 선 아주 좁은 공간만이 박동하고 있는 듯했다.
황당했고, 얼떨떨했고, 그리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카델은 강한 팔심에 꽉 붙들려 있던 어깨를 비틀고는, 간신히 한 손을 빼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흔들리는 라이돈의 눈을 마주했다. 한결같던 미소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엉망인 얼굴에서는 흔치 않은 감정의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었다. 카델은 그런 라이돈의 입가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주변에 들러붙은 핏자국을 벅벅 문지르자, 라이돈의 고개가 조금씩 밀려 났다. 불만스러운 항변의 말 또한 격하게 움직이는 카델의 손바닥에 가로막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데, 멍청아. 전부 널 옆에 두기 위해서잖아. 네가 그렇게 졸라 대던 아침 바다도 보여 주고, 다리 아프면 걷지 말고 마음껏 날아다니게 해 주려고. 그러려고 이러는 거잖아.”
거칠게 비벼 대던 손을 떼어 내자 바보처럼 헤벌어진 입술이 드러났다. 조금씩 떨리던 눈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라이돈은 지금껏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미소를 지었다.
피어나는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기쁨이 느껴지는 미소.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75/100」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대체 어떤 부분이 이 제멋대로인 요정을 자극한 것인지. 활짝 만개한 얼굴을 보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라이돈뿐일 거다.
*
비행 가능한 라이돈이 자유를 얻었으니,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수월했다. 한 명씩 운반하며 무게를 셈해 본 결과, 놀랍게도 카델, 반, 루멘이 같은 바닥에 모이게 되었다. 카델은 의식을 잃은 두 부하의 앞을 지킨 채 맞은편을 보았다.
건너편 저울에서 자신과 똑같은 고도에 선 라이돈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3명분의 고통을 혼자 버티고 있다는 건가.’
어디서 혼자 엔돌핀이라도 뿜어내고 있는 건지,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행동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균형은 맞췄다. 마지막 시련의 조건을 채웠으니, 시스템 창이 처음 알려 준 대로. ‘해방의 문’이라는 것이 나타날 차례였다.
카델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스텔라와, 여전히 라이돈 근처에 우뚝 선 헤소니아를 살폈다. 저울의 균형이 완벽해졌음에도 둘은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
헤소니아가 말없이 라이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라이돈은 그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카델을 보기 바빴으나,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마치 그린 듯하군.’
아주 오랜 세월을 꿈꿔 왔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 악을 무찌르고, 목숨 바쳐 세계의 평화를 지켜 왔음에도. 끝끝내 거머쥐지 못한 한 가지.
“너라면 나의 정체를 알고 있겠지, 핀하이의 요정이여.”
나직한 목소리에 라이돈의 무성의한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헤소니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답했다.
“같은 요정이잖아. 핀하이의 힘은 느껴지지 않지만.”
날개도 없고 말이지. 명쾌한 대답에 헤소니아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의 종족은 멸족했다. 대정령 토펨의 가호를 받던 숲은 불탔고, 남은 요정은 나뿐이었지.”
“안 궁금해.”
“인간의 짓이었다.”
“…….”
“인간을 증오했다. 원망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했기에, 그들과 힘을 합쳐 마계를 봉인했지. 인간들에게 평화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은 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헤소니아가 손을 올렸다. 라이돈을 향한 그의 손끝은, 조금씩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각지의 요정들과 한 가지 계약을 했다. 스텔라 님의 능력을 빌어 종족을 수호할 대정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대신, 그 우두머리들에겐 봉인이라는 제약을 걸도록. 그 제약을 풀고 싶다면, 나의 영혼을 가둔 이 신전에서 시련을 받도록.”
그의 손과 팔목, 팔꿈치가 차례차례 사라져 갔다. 라이돈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인간에게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 그들은 언제고 흉포하게 남의 것을 탐할 것이고, 그 피해를 감당하기에 우린 이미 많은 것을 잃었으니. ……하지만 만약 우리의 존재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인간이 있다면. 그에게 사라진 터전을 위해 함께 싸워 줄 의지가 있다면. 세상을, 잊힌 종족을 사랑해 줄 따스함이 있다면.”
감정 하나 드러내지 않던 무뚝뚝한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들끓는 듯 격렬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번 우리의 힘을 빌려주어도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차근차근 지워진 그의 육체는, 어느덧 어깨 위까지 사라졌다. 라이돈은 허공에 붕 뜬 헤소니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러고는, 여느 때처럼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난 이미 카델에게 내 운명을 줬어. 네 과거사나 혼자만의 판단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무겁지 않은 말투임에도 사이사이에 단단한 믿음이 얽혀 있다. 느껴지는 진한 신뢰에, 얼핏 헤소니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미세한 움직임을 확인해 볼 새도 없이. 그는 완전히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