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을 풀고, 자유를 선물해 주겠다고 카델은 약속했다. 그 약속에 끌려 동행을 결정했다. 동족의 운명을 뒤로한 채 숲을 나왔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그 욕심을 이뤄 줄 카델을 믿고서.
그들은 운명을 맡긴 자와 그 운명을 짊어진 자의 관계였고, 그것은 둘의 감정적 교류가 어디까지 이루어졌든 모든 것을 뭉개 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카델은 죽어선 안 됐다. 그에겐 카델보다 힘과 자유의 가치가 우위에 있었으나, 그것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카델이 필요했다. 카델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카델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온 근육이 덜그럭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라이돈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를 보는 헤소니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결정을 마쳤군.”
“아하하!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그럼 내 속마음을 읽어서 결정을 맞혀 보자.”
“선택을 말하라.”
“재미없어.”
지루하다는 듯 혀를 빼물던 그가 천천히 낯빛을 바꿨다. 상처와 핏물로 엉망인 얼굴이었으나, 표정만큼은 어딘지 산뜻했다. 내린 결론이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애교스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루멘이나 반은 몰라도, 카델이 죽는 건 싫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인간이거든.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할래. 그러니까, 나는 시련을…….”
포기하겠다. 그리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들이 선 바닥이 크게 기울며 흔들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라이돈이 놀란 얼굴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위쪽 바닥과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가만히 그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데, 시야를 가린 연기를 흩뜨리며, 선명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라이돈!”
시원한 바람이 공간을 헤집고, 빠르게 흩어지는 연기 사이에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델이었다. 그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서 있는 것이 기적 같은 몸뚱어리에 바싹 힘을 주었다. 장막 하나 없이 고스란히 폭발을 버텨 낸 전신에는 지저분한 타박상이 엉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지독할 만큼 처참한 몰골.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엉겨 붙은 핏자국 사이로 드러난 짙은 고동색 눈동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카델은 꼿꼿하게 힘을 준 손가락으로 라이돈을 가리켰다. 그 외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누구도 필요치 않다는 듯. 몰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음성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안 어울리는 생각 하지 마. 난 절대 안 죽어. 네 봉인을 풀 때까지, 네 종족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네가 이 세계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때까지!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날 믿고 버텨.
끝이 갈라져 그리 폼 나지도 않는 목소리였고, 말하는 모양새가 멋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찰나. 라이돈은 누군가 심장을 후려치기라도 한 듯, 욱신거릴 정도로 쓰라린 설렘을 느꼈다.
카델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멍하게 흐려졌다. 카델이 다시 시선을 거둬 싸움을 계속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넓다고 느껴 본 적 없는 그의 등을, 그저 막연히 올려다보았다.
카델은 온몸으로 자신이 짊어진 운명을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본인의 운명도 아닌데. 그리 각별한 사이도 아니면서.
머리가 비상한 인간이었다. 지금 당장 힘을 되찾지 못해도,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나는…….”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라이돈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움켜쥐고는,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좋아해…….”
속삭임에 가까운 고백에 헤소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카델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는, 상기된 라이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련을 포기할 건가?”
“시끄러워. 입 닥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설레는 표정을 해 놓고는, 튀어 나오는 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라이돈은 가슴께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끌어 내리고서, 깊게 숨을 골랐다.
결정했다.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여과 없이 퍼뜨린 그가 양 손바닥을 마주 댔다. 일순 피어난 날카로운 냉기가 전신을 휘감고. 간신히 멈추었던 핏물이 코와 입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지금 당장 안아 주러 가야겠어.”
끼기기긱—
시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저울이 크게 기울었다. 카델은 비틀거리는 몸에 힘을 주며 눈을 부릅떴다.
‘바닥이 다시 올라가고 있어. 대체 왜?’
저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버텨 낸 고통인데.
카델은 턱 밑으로 흘러내린 핏물을 거칠게 훔쳐 내며 눈을 굴렸다.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매서운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라이돈?”
저울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울은 여전히 섬세하고도 명확하게 고통을 셈하고 있었다. 문제인 것은, 아래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라이돈의 돌발 행동이었다.
“저 미친놈이!”
라이돈은 마력 고갈 상태에 진입했다. 입가에 흥건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이나 위태로운 겉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마력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라이돈은 보란 듯이 마력을 쥐어짜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의 사용량을 훨씬 웃도는 방대한 마력을.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동이었고, 그 반증으로 저울은 라이돈이 선 아래쪽 바닥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카델이 정면으로 폭발을 막아 낸 보람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라이돈! 멈춰!”
라이돈의 주위로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거센 눈발이 바닥을 둘러싼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멀리서 본 그의 모습은 스노우볼 속에 갇힌 작은 인형 같기도 했다.
카델은 까끌거리는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연신 라이돈을 불렀지만, 그는 끝까지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을 가둔 저울의 중심이 조금씩, 그리고 분명하게 기울어질 뿐이었다.
카델은 조급한 표정으로 젤리 봄을 돌아보았다. 처음과 비교해 그 숫자가 전혀 줄지 않은 젤리 봄은 여전히 그를 노리며 튀어 오르고 있었다.
라이돈이 이런 식으로 몸을 축내는 한, 이쪽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크기는 점점 늘어난다. 무리였다. 이만한 격차는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는 좁힐 수 없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시련을 포기하고 싶다면 헤소니아에게 말하면 될 테고, 지속하고 싶다면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면 된다. 어느 쪽 선택지에도 자살 시도에 가까운 마력 운용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이유는 없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젤리 봄은 경쾌하게 몸을 튕기며 날아들었다.
“큭…….”
멀찍이서 [바람 칼날]을 날려 놈들을 터뜨린 카델이 일순 신음을 내며 허리를 접었다. 배를 감싼 팔이 덜덜 떨리며 꽉 다문 잇새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몸이, 한계다…….’
마력 고갈은 라이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델 역시 시련을 돌파하는 내내 상당한 마력을 사용했고, 챙겨 왔던 물약 한 번 마시지 못했다. 게다가 변변찮은 장막도 없이 젤리 봄의 연쇄 폭발을 고스란히 견뎌 냈으니.
들숨마다 진한 피 맛이 느껴졌다. 전신의 근육이 살려 달라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고통을 버티듯 질끈 눈을 감은 그가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원하는 거야, 라이돈.”
그리고 그 순간.
유리가 깨지듯, 사나운 파열음이 귓가를 울렸다. 소리에 반응한 카델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고. 따끔거리는 시야 가득, 서늘한 눈발을 헤치며 날아드는 라이돈이 들어찼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칼과 투명하게 반짝이는 두 쌍의 날개. 피와 열기로 얼룩진 불그스름한 뺨, 활짝 올라간 입꼬리와 해사하게 휘어진 눈매. 오롯이 한 사람만을 담아 낸 붉은 눈동자가 맑은 빛을 품은 채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달려들었다.
“라이―”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몸 위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동시에 이런 삭막한 공간에서 날 리 없는 산뜻한 꽃향기가 훅 끼쳐 왔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라이돈의 커다란 품속에 안겨 있었다.
전신의 뼈가 덜컹거리듯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으나, 라이돈은 그런 그를 더욱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좋아해.”
“……뭐?”
“좋아해, 카델. 좋아해.”
푹 숙인 고개가 카델의 목덜미 사이를 파고들었다. 뭉개지는 발음 사이로 엷은 웃음기가 넘실거렸다. 카델은 난데없이 등장한 요정의 열렬한 고백에 황망히 눈을 깜빡였고, 그의 눈앞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