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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균형……?”
“그렇다. 네 동료가 강한 고통을 받을수록 저울은 수평과 가까워지지.”
헤소니아는 아래쪽 바닥에 서 있었다. 가볍게 손끝을 까딱인 그가 축 늘어진 라이돈을 공중으로 떠올려 제 앞에 두었다.
반쯤 의식이 날아간 듯 몽롱하게 눈을 끔뻑이던 라이돈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새어 나오는 쇳소리와 함께 턱 아래로 얇은 핏줄기가 흘렀다.
“바보 아냐? 고통의 무게를 재는 거라면, 내가 날아서 카델이 있는 곳까지 가면 되는 거잖아.”
“가능하다면.”
헤소니아의 손끝이 천장을 가리켰다. 작은 손짓에 라이돈의 몸이 하늘 위로 훅 솟구쳤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상승한 몸뚱이는 얼마 못 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등허리를 강타한 충격에 라이돈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한 움큼 핏물이 쏟아졌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바닥이 끼긱, 소리를 내며 하강했다. 새로운 고통이 축적된 것이다.
헤소니아는 다시 라이돈의 몸을 당겨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연신 콜록거리던 라이돈이 간신히 기침을 멈추더니,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정면에 있는 헤소니아의 얼굴에 대고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거칠게 굴지 마.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헤소니아는 헤실거리는 라이돈을 마주하며,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무심히 닦아냈다. 그리고 그의 도발은 조금도 심기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소름 끼치도록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선택권은 네게 있다, 핀하이의 요정이여. 시련을 포기한다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지속한다면 무한한 힘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라이돈의 몸을 떠받치던 힘이 사라졌다. 그는 기절한 루멘의 옆자리로 추락했다. 뼈가 시큰거리는 둔중한 고통이 느껴졌다.
라이돈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을 향한 헤소니아의 섬뜩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엄격한 잣대와 비틀린 기대감. 여러 감정이 담겼기에 오히려 그 무엇도 드러나지 않는, 인간보단 원념에 가까운 기운.
“그러니 선택하라. 동료와 힘을 저울질하라. 그것이 네게 주어진 시련이니.”
그 기운을 감지한 순간. 라이돈은 어렴풋이, 헤소니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젤리 봄은 금세 바닥을 가득 채웠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양이건만. 그들의 무게는 저울의 균형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로지 고통. 그것만이 저울을 움직일 수 있는 무게의 척도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얌전히 폭발을 맞고 있으라는 소리야? 죽지 않게 조절 잘하면서, 변태처럼 고통을 즐기라고?’
이 무슨 해괴망측한 시련이란 말인가. 몸에 두른 장막으로 폭발의 충격을 방어하며, 카델이 웅크리고 앉은 반의 등을 두드렸다.
“반! 정신 차려 봐, 쓰러질 거면 적어도 구석에 가서 쓰러지라고!”
우수수 터져 나가는 젤리 봄의 폭발을 견디며 반까지 보호하는 것은 힘에 겨웠다. 두 가지 시련을 클리어하며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고, 심지어 부하들에게 입은 데미지까지 축적된 상태였다. 무턱대고 마물을 해치울 수도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반을 구석으로 밀어 두고, 그의 근처로 마물이 몰려들지 못하도록 자신이 전부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끄윽…컥…….”
하지만 반은 몸을 일으킬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오로지 정신력 덕택이었다.
결국 카델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열풍을 뚫고서 반을 끌어내기로 결정했다.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힘없이 늘어진 몸을 질질 끌어 외곽으로 향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몰려든 젤리 봄이 폭발하자 강한 충격이 장막을 두드리며 후퇴를 방해했다. 전장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카델은 악에 받친 채 꾸역꾸역 반을 끌어당겼다.
인간이 아니라 잘 달궈진 쇳덩이를 운반하는 기분이었다. 매번 먹을 것은 자신에게 넘겨주면서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씨발…… 진짜, 좆, 같네!”
가쁜 숨과 함께 무너진 둑처럼 욕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렇게 겨우겨우 반을 외곽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을 때. 그들을 감싼 장막은 넝마나 다름없는 상태로 찢겨 있었다.
카델은 눈꺼풀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거칠게 닦아 내며 크게 호흡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며 증식하는 젤리 봄의 노도를 직시했다.
‘시련의 주제는 희생이다.’
라이돈이 함께 할 동료 없이 홀로 신전을 찾았다면, 시련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련의 전제 자체가 ‘동료’의 존재였다.
그러니 이 마지막 시련은, ‘동료의 희생’을 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희생을 원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 속에서 치를 수 있는 희생의 방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라이돈을 위해 목숨 버릴 각오로 시련에 임할 수 있느냐……인가.’
어쩌면 지금쯤 아래쪽 바닥에선 헤소니아가 ‘시련을 포기할 권리’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동료의 희생과 동료를 위한 희생. 어느 쪽이든 누군가는 무언가를 잃게 될 테니.
시련의 주인공은 라이돈이다. 동료의 선택만으로 그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보단, 그의 선택으로 동료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쪽이 설득력이 높기는 했다.
“……한번 끝까지 가 보자는 거지.”
마력을 끌어 올린 카델이 반에게 두른 장막을 보강했다. 반쯤 허물어진 본인의 장막은 그대로 두었다. 깨질 때까지 방치할 생각이었다.
‘이 시련의 주인공은 라이돈이지만, 이 세계의 주인공은 나라고. 남의 선택에 빌빌거리면서 순순히 죽어줄 줄 알아?’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어느 한쪽의 파멸뿐이라 해도. 라이돈이 결국 동료가 아닌 힘의 개방을 택한다 해도. 카델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근방의 폭발에 장막이 한 움큼 뜯겨 나가고. 카델의 뒤편으로는 여섯 개의 화염구가 반원을 그리며 장전되었다.
“균형 까짓거, 맞춰 주면 될 거 아니야.”
자신은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었고, 힘겹게 해치운 시련의 마지막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보란 듯이 시련을 클리어하리라.
매섭게 발사된 화염구가 살벌한 기세로 젤리 봄을 노렸다.
*
폭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매캐한 연기가 천장을 가득 메웠고, 대기가 진동했다. 그리고 카델이 선 바닥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제법 잘 버티는군. 하지만 오래가진 못할 거다. 인간의 목숨은 생각보다 질기나, 기대보단 나약하지. 곧 죽음의 경계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라이돈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루멘의 옆에 앉아 있었고, 헤소니아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계속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해 왔다.
“자꾸 앞에서 쫑알거리지 마. 심심하면 저기 가서 죽어 버려.”
“네가 선택을 미룰수록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올 뿐이다.”
카델의 고군분투가 이어지는 동안, 라이돈은 속 모를 얼굴로 카델이 선 저울 바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헤소니아 역시 그런 라이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라이돈이 어떤 얄미운 말을 해도, 끄떡하지 않고 몰아붙였다.
무감정한 얼굴로 끊임없이 대답을 독촉하는 모습이 섬뜩할 법도 하건만. 라이돈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안중에 헤소니아는 없었다.
‘카델이 죽어?’
헤소니아에게 시련의 정체를 들은 순간부터. 라이돈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물음만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카델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싫은가? 당연하다. 자신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재미있었고, 흥미로웠고, 가끔은 귀여웠다. 그러니 카델이 죽는 것은 싫다.
하지만 본래의 힘을 되찾고 세계를 마음껏 활보하는 것보다 카델의 존재 가치가 훨씬 높은가를 묻는다면, 글쎄.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딱 거기까지의 관계였다. 일방적인 호감.
더할 것이 있다면.
‘난 할 수 있어. 널 제한하는 그 갑갑한 봉인을 풀고, 네가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거. 그거, 나만 할 수 있는 미친 짓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