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드립니다. ‘신뢰의 시련’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시련을 클리어했다. 하지만 무엇이 클리어의 기준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루멘과 라이돈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때까지도 그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결론짓지 못한 상태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단장. 이것 좀 보세요.”
반이 가리킨 곳에는 의식을 잃은 루멘과 라이돈이 쓰러져 있었다. 시련이 끝났음에도 육체가 남아 있다니. 정말 본체였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들의 육체가 풍화되기 시작했다. 발끝과 손끝이 차례차례 분해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가짜…였구나.”
반사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카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
신전의 벽이 붕괴했다. 몸이 떨릴 만큼 강한 진동이 느껴지며 천장에서 후드득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왜 가는 곳마다 무너지는 건데!”
“단장! 조심하세요!”
반은 질겁한 카델을 감싸며 떨어지는 파편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사위가 벽이었던 탓에 몸을 숨길 곳도 없어, 그들이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조각을 내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초나 흘렀을까. 천장과 벽면은 눈 깜짝할 새에 무너져 내렸고, 남은 것이라곤 그들을 떠받친 바닥이 전부였다.
카델은 반의 품 안에서 고개를 빼내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무너졌으니, 마땅히 외부의 모습이 드러나야 했다. 적어도 하늘이나 신전을 집어삼킨 암벽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카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조금 전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신전의 내부였다.
넓어진 공간의 크기를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똑같다. 확 트인 사방을 둘러싼 지긋지긋한 벽돌의 향연에 카델이 혀를 내둘렀다.
“대체 뭐야? 무슨 마트료시카도 아니……. 잠깐. 그런데 여기, 시야가 묘하게 붕 뜨지 않아?”
그들은 분명 바닥에 붙어 있었으나, 정면을 향한 시야의 높낮이가 평소와는 달랐다. 더듬더듬 몸을 일으킨 그가 바닥의 끄트머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어…….”
카델은 곧 자신이 선 바닥이 공중에 떠올라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높이도 상당했다.
그를 따라온 반 역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턱대고 떨어졌다간 팔다리 하나쯤은 가뿐히 부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남자의 황당한 시선이 교차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것도 시련인 걸까요……?”
대체 무슨 시련? 여기서 번지 점프라도 해서 담력을 시험하라는 내용인가? 황당함에 말문을 잇지 못하자,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서부터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거든요.”
“스텔라……!”
“와아, 카델! 저도 반가워요!”
그녀는 카델과 반이 선 바닥 너머, 더 높은 곳에 둥실 떠오른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이밍 좋은 등장에 카델이 바싹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긴 대체 어딥니까? 마지막 시련은 이 바닥 위에서 진행되는 거예요?”
“안 돼요, 안 돼. 몰래 이것저것 알려 줘 버리면 혼난단 말이에요.”
“어차피 시련이 진행되면 다 알게 될 텐데 그냥 미리…….”
본격적인 시련에 돌입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캐내야 했다. 그 일념하에 질문을 서두르던 카델이었으나. 그의 다급한 목소리는, 갑작스레 등장한 묵직한 음성에 가로막혔다.
“시련의 도전자는 말을 아끼라. 이곳에서 그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증명’뿐이니.”
고작 목소리만으로 주변 공기의 무게가 달라졌다. 살갗을 찌르듯 강렬하게 끼쳐 오는 위압감에 카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듯 선 반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헤소니아.’
세븐 나이츠 중 하나인 ‘헤소니아’였다. 그는 스텔라의 왼쪽 방면에서 그녀와 같은 고도에 떠올라 있었고, 여기까지 선명한 목소리가 닿았다는 것이 놀라울 만큼 거리도 멀었다.
그럼에도 그의 압도적인 풍채와 흩날리는 암녹색의 장발, 형형한 눈빛과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강대한 기운 만큼은 똑똑히 전해졌다.
“이 여자도 그렇고 저 남자도 그렇고, 꼭 전설 속의…….”
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 역시 헤소니아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세븐 나이츠와 그들의 수호신.
그중 기사 ‘헤소니아’와 여신 ‘스텔라’의 이름을 사용하며, 그 생김새마저 기록과 비슷한 자들이었다.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데다, 시련을 부여하는 역할까지 맡았으니.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반조차 이제는 진짜 저들이 전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카델은, 여태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헤소니아’의 등장에 좋지 않은 낌새를 감지했다.
‘스텔라가 계속 헤소니아를 언급했으니 같은 공간에 있으리라곤 예상했어. 하지만 만약 헤소니아가 신전에 있다면, 루멘과 라이돈에게 시련을 내리는 역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소니아가 나타났으나, 루멘과 라이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작이 틀린 걸까? 아니면, 그 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피어나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씹자, 헤소니아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카델이 선 바닥의 옆이자 자신의 정면에 난 허공의 한 점이었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스텔라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벌써 시작할 생각인가요, 헤소니아? 저는 저의 도전자들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죠!”
“미안합니다, 스텔라. 이번 ‘후예’가 유별난 탓에, 시련을 서두르지 않으면 차질이 생길 것 같거든요. 절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용서할게요!”
말투의 온도부터 다른 대화를 끝으로, 헤소니아가 전방을 향해 뻗었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던 허공에, 흐릿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면적을 불려 가며 점점 짙어지던 연기는 차츰 또렷한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허? 저거!”
“저놈들이 여기 왜…….”
그들이 선 곳과 똑같은 바닥이 생성되며, 루멘과 라이돈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두커니 선 두 남자가 혼란한 낯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루멘! 라이돈! 너희 괜찮아?”
카델의 부름에 두 개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빠르게 둘의 상태를 살핀 카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겉모습만 봐도 상당히 지쳐 보였다. 입고 있는 방어구와 옷은 여기저기 뜯겨 제구실을 하기 힘들어 보였고, 어디서 구른 건지 머리칼도 잔뜩 헝클어져 있다. 피부 곳곳에 남은 생채기들도 눈에 띄는 데다, 특히 라이돈은 코와 입 주변에 피를 문질러 닦은 흔적이 선명했다.
‘설마 마력이 고갈된 건가.’
체내의 마력을 바닥까지 쥐어짜 내는 고통은 같은 마법사인 카델이 가장 잘 알았다. 그 증상 중 하나가 코피와 각혈이었으니. 만약 라이돈이 마력 고갈 상태라면 당장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했다.
“라이돈의 상태가 별로긴 하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야. 대장 쪽은? 괜찮은 거야?”
“카델! 방금 싸움 엄청났어! 아, 가짜였으니까 기억 못 하려나?”
루멘과 라이돈은 카델을 발견하자마자 그쪽을 향해 이동했다. 두 팀이 선 바닥은 같은 고도에 있었으나, 틈 사이의 거리가 상당했기에 평범한 방식으로는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하지만 날개가 있는 라이돈은 예외였다. 그는 주저 없이 외곽의 끝을 넘어 허공으로 발을 뻗었다.
촤르르륵!
그러나 날개에 힘을 주기도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물러난 라이돈의 미간이 구겨지고, 함께 외곽에 서 있던 루멘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정확히 바닥의 중심부를 가리키며 떠오른 검은색의 자그마한 구체. 그 안쪽에서 쉴 새 없이 뻗쳐 나온 쇠사슬들이 바닥의 좌우를 채우며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카델 쪽도 마찬가지였다. 카델은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는 쇠사슬과 시작 지점인 구체를 올려다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이거, 모양이 꼭…….’
양 팀의 구체를 가로지르며 등장한 기다란 막대를 발견한 카델은 확신했다. 양팔 저울. 지금 그들은, 스텔라와 헤소니아가 만들어 낸 거대한 저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균등히 고정되자, 구체는 더 이상 쇠사슬을 뽑아내지 않았다. 시끄러운 마찰음이 사라진 공간에 짧은 침묵이 스치고. 곧 헤소니아의 딱딱한 음성이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마지막 시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두 번째 시련의 결과를 보여 주겠다.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라.”
두 번째 시련의 결과라니.
“두 번째 시련은 이미 끝난 게 아니었—”
헤소니아의 발언에 의문을 제기하려던 카델은, 급작스레 전신을 파고드는 지독한 냉기를 느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피부가 뜨겁게 달궈지고 차갑게 식기를 반복하며 간헐적인 격통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기묘한 통증에 카델이 비틀거리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마치 투명 인간에게 쉴 틈 없이 얻어맞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문 모를 고통에 아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카델이 고통과 의문 속에서 경악하는 동안.
그의 옆에 있던 반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통을 감당하는 중이었다.
“커헉……! 큽…….”
상체를 떠받친 양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경련했다.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역류한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줄줄 흐르는 식은땀과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의 강도를 증명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의 상태를 발견한 카델이 흔들리는 걸음을 옮겼다.
“바, 반…… 너 왜…….”
누구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서 있었을 뿐인데.
카델은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바닥의 머리를 댄 반은 꺽꺽 막힌 숨과 핏물을 번갈아 토해 내고 있었다. 자신보다 배는 심각해 보이는 상태였다. 카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축축하게 젖어 든 등 위로 손을 올렸다. 가볍게 얹은 것만으로도 격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스텔라는, 유감이라는 듯 입꼬리와 눈썹을 끌어내렸다.
“말했잖아요, 카델. 그곳엔 가짜가 없다고. 여러분이 싸웠던 동료도, 서로에게 새겼던 상처도. 전부 실재하는 환상.”
카델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스텔라를 보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양팔을 펼쳐 보였다. 마치 가련한 카델을 안아 주고 싶다는 듯, 천천히 허공을 끌어안아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기도 했다.
그렇게 선명히 드러났던 안타까움은, 뒤이어 나타난 부드러운 미소 속에 삼켜졌다. 얇은 호선을 그린 스텔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버텨 주세요. 이 ‘신뢰’의 결과를, 끝까지 지켜봐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