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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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연기를 뚫고 나온 라이돈의 몸체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비행의 궤적을 따라 부서진 얼음 장막의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흩날렸다.

“아아, 다시 카델이랑 싸울 때는 서로 전력을 다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이 폭발과 오라, 검기로 엉망이 된 사막을 내려다보았다. 뿌연 연기가 흩어지기를 기다리며 부서진 장막을 보강하자, 곧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카델이었다. 그는 태양 빛이 눈부시지도 않은지, 라이돈이 있는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이돈이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 매서운 삭풍이 날아들었다.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깊은 상처를 피할 수 없는 살벌한 공격이었다.

피하지 않고 삭풍을 마주하자 장막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갈라졌다. 기어코 장막을 통째로 베어 낸 삭풍이 뺨을 스쳤으나, 라이돈은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적으로 싸우게 되니까…….”

카델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 위로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엄지로 뺨의 상처를 훑어낸 라이돈이 샐쭉 눈을 휘었다.

“조금 흥분되는 것 같네.”

마력은 이미 대부분 동났다. 카델의 가방에서 빼 온 약초를 먹기는 했으나, 신전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띄게 약해졌던 몸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태에서 카델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자신은 분명히 죽는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라이돈은 전투의 기대감에 흠뻑 젖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만 놀아 볼까?”

당연히 카델을 죽일 마음은 없다. 시도라도 했다간 잔소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루멘이 시끄럽게 굴 것이 뻔했고, 그 역시 카델이 되도록 오래 사는 것을 바랐으니.

하지만 카델과의 싸움을 즐기는 정도라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제멋대로 판단한 라이돈이 바닥을 드러낸 마력을 꾸역꾸역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곧 그의 앞으로 수많은 얼음 결정이 떠올랐다. 넘실거리는 냉기에 라이돈의 입새로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떠오른 얼음 결정은 저들끼리 엉겨 붙으며 몸집을 불려 나갔고, 빠르게 형태를 갖췄다.

아치형의 곡선과 두 개의 꼭짓점을 잇는 가느다란 실. 단단한 얼음은 거대한 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그립을 쥔 라이돈이 탄력적인 시위에 손을 올리자, 아무것도 없던 현 위로 활만큼이나 기다랗고 두툼한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싹 당겨진 시위가 조금씩 각도를 맞춰 가고,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한 라이돈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사랑의 화살이야, 카델!”

도저히 화살이 날아가며 만들어 낸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울림이었다. 반의 공격을 피해 뒤편으로 보법을 밟던 루멘이 갑작스레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냉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라이돈을 상대하는 거였다면 망설임 없이 죽였을 텐데.”

한결같이 빌어먹을 요정 놈이었다. 온 얼굴을 따끔하게 후려치는 모래바람 속에서 가늘게 시야를 좁히자, 기다렸다는 듯 오라가 뻗쳐 왔다.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루멘이 곧장 오라를 베어 내고는, 빠른 속도로 반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는 오라의 공격 속에서 기어코 접근에 성공한 그가 발도술을 시전했다.

[쾌검난무]

검붉은 오라에 감싸인 반의 몸 위로 푸른빛의 섬광이 어지럽게 새겨지고. 가슴을 노리며 휘둘러진 대검을 미끄러지듯 회피한 그가 살짝 들춰진 검을 납검했다.

푸슈슉!

한 박자 늦게 등장한 검기가 섬광의 자리를 가로지르고, 뒤이어 살갗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끼쳐오는 진한 피 냄새에 루멘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진짜 피 냄새군.’

[쾌검난무]는 살육이 아닌 ‘고통’에 중점을 둔 기술이었다. 검기는 목표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전신을 빼곡히 채우는 얕은 상처로 상대의 집중력을 흩뜨린다.

그러니 처음부터 반을 죽이기 위한 기술은 아닌 셈이었지만.

‘상대하기가 점점 찝찝해지는데.’

눈앞의 반이 가짜든 아니든. 과할 정도의 현실감이었다.

만약 이들이 가짜라면, 시련은 어째서 진짜 같은 가짜를 상대하게 하는 것인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분은 더러워지기만 했다.

루멘은 온몸이 피로 흠뻑 젖은 채 부들거리는 반을 돌아보았다. 광전사인 그는 스스로의 피까지 힘의 원동력으로 삼으니, 고통을 갈무리하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루, 멘…….”

그는 자신을 찾아 삐그덕 고개를 돌리는 반의 뒷목을 검집으로 힘껏 후려쳤다. 의식을 잃은 몸뚱이가 맥없이 쓰러지고. 반이 일어날 기미가 없음을 확인한 루멘이 그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이렇게 쉽게 쓰러지는 걸 보면 가짜 같기도 하고.”

건조한 입 안을 훑어 낸 그가 곧장 라이돈의 동향을 살폈다. 고전 중이라면 합세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

그가 발견한 것은, 멀쩡히 날고 있어야 할 라이돈이 사막의 한가운데로 추락하는 모습이었다.

“저 자식이……!”

카델의 공격이 닿기 전에 낚아채야 했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간 루멘이 다급히 낙하지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라이돈이 땅 위에 처박하기 직전. 가까스로 그를 잡아챘다. 묵직한 무게감에 이대로 패대기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차올랐으나, 초인적인 의지로 버텨 냈다.

루멘은 여기저기 구덩이가 파인 모래 바닥 위로 라이돈을 내팽개쳤다. 거칠게 숨을 고르며 날아들 공격을 대비했으나, 다행히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하…… 진짜 재밌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루멘의 싸늘한 얼굴이 움찔했다. 멀쩡한 날개를 두고 추락한 만큼,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흘러내린 코피와 각혈의 흔적, 원인 모를 상처들로 엉망이 된 얼굴과 여기저기 타들어 가 구멍 난 옷, 그을린 살갗까지.

동정심이 일지는 않았다. 라이돈이 직접 말했지 않은가. 재밌었다고. 단순한 업보였다.

라이돈은 차갑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한 루멘의 눈빛을 마주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카델이 너무 좋아, 루멘.”

“그대로 떨어지게 둘 걸 그랬군.”

차오른 불쾌감을 만면에 드러낸 그가 휙 시선을 돌렸다. 모래 먼지로 뿌옇게 흐려진 전장을 살폈으나, 너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장은 어디 있지? 네놈의 놀이가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었다면 대장도 힘이 깨나 빠졌을 텐데.”

“카델은 저기.”

라이돈이 늘어진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루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조금씩 가라앉는 모래 먼지 속, 햇빛에 반사된 무언가가 간헐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밀집된 얼음 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자세히 보면 각각 형태가 분명한 하나의 화살이었다. 라이돈은 모래에 반쯤 처박힌 채 촘촘한 원을 그리고 있는 얼음 화살을 응시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내가 가뒀어. 녹이려면 적어도 10분은 걸릴걸? 물론 그동안 얼어 죽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당연히 카델은 멀쩡히 빠져나오겠지만!

해맑게 단언하는 라이돈의 옆에서, 루멘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압박할 뿐이었다. 저런 식의 과한 구속을 바랐던 게 아니었는데.

“……기대를 말아야겠군.”

예상대로 행동할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해서는 안 됐다. 차라리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그래도 일단은 두 명 모두 제압에 성공했다. 대장이 빠져나오는 시간을 최소 10분이라고 셈한다면, 그 안에 대책을 강구해야…….’

그러나 루멘이 그럴싸한 계획을 세워 보기도 전. 사막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울림은 지면뿐만이 아니라 대기와 하늘을 포함한 공간 자체를 뒤흔드는 듯했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하늘이……!”

루멘과 라이돈. 두 남자의 시선이 균열이 번지는 사막의 하늘을 향했다. 마치 알의 껍데기가 깨지듯, 조각난 하늘의 파편이 추락하며 그 너머의 짙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졌던 사막의 풍경은 사라졌다. 환상처럼 조각난 천지의 너머, 드러난 것은 어둑한 신전의 내부.

카델은 자신을 둘러싼 익숙한 벽면에 기뻐하지도, 안도하지도 못한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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