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521)

무언가 이상하다, 고 느꼈을 때. 카델의 뺨에는 기다란 생채기가 그어져 있었다.

“단장!”

카델은 반사적으로 시린 냉기가 감도는 뺨을 더듬었다. 한 박자 늦게 흘러내린 핏물이 손끝에 묻어 나오며, 당황한 반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괜찮으세요? 저 미친놈이 갑자기 왜……!”

카델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간 것은, 라이돈의 얼음 창이었다. 만약 앞에 있던 반이 급작스레 날아드는 공격을 비껴 치지 않았다면. 카델은 얼굴에 구멍이 뚫린 채 영문 모를 죽음을 맞이했을 테다.

‘우릴 적이라고 착각했나……?’

이쪽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아지랑이 때문에 형체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카델은 자신의 상처를 살피는 반의 어깨를 토닥이며 너머를 보았다. 처음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는 상대방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라이돈.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공격을 날리다니, 제대로 버릇을 고쳐 둬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으나. 일순, 카델은 라이돈의 옆에 있어야 할 루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치밀었다. 카델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반과 자신의 몸 위로 바람의 장막을 둘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악—

둘의 뒤편으로, 기다란 섬광의 잔상이 새겨졌다.

“뭣…!”

기척을 감지한 반이 빠르게 뒤를 돌았으나, 기다렸다는 듯 장막을 짓이기는 묵직한 기운이 몰아쳤다.

까드드득.

섬광을 집어삼키며 등장한 푸른 검기가 공간을 통째로 베어 내고는 매서운 기세로 파고들었다. 카델은 장막 위로 마력을 쏟아부으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분명 루멘의 검기다. 하지만 왜……? 왜 우릴 공격하는 거지?’

대화를 나눠 볼 새도 없이 공격을 퍼부으니, 진행을 따라가기만도 벅찼다.

“저놈들…….”

겨우 검기를 떨쳐 낸 장막이 안정을 되찾자, 대검을 치켜든 반이 사라진 루멘의 신형을 찾아 눈을 굴리며 말했다.

“쌍으로 돌았나 본데요, 단장.”

동감이었다. 쌍으로 더위를 먹어 미쳐 버린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카델은 장막을 한층 더 두텁게 보강한 후, 라이돈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새 또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듯, 영창하는 입술이 부지런히 달싹이고 있었다.

“라이돈!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누군지 못 알아보겠어?”

카델의 외침에 라이돈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붉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카델을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표정이 전혀 라이돈 같지 않았다.

“너희를 죽여야 시련이 완성돼, 카델.”

“……뭐?”

“받아들여.”

자신과 반이 죽어야 시련이 완성된다니? 카델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반이 있던 방향에서부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감히 단장에게 손을 대? 죽고 싶으면 말로 해라, 루멘.”

“싸울 땐 입을 다물도록 해.”

푸른색과 붉은색의 검기가 교차하며 폭음에 가까운 마찰음이 반복됐다. 검기의 속도는 당연하게도 루멘 쪽이 압승이었다. 칼을 뽑기도 전에 목표를 베어 내는 발도술은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반은 오로지 동물적인 직감에 의지해 그의 공격을 예측해야만 했다. 살기를 느끼는 즉시 몸을 틀었고, 그 방향을 노려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카델이 둘러 준 장막은 깨진 지 오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 갔다.

짜증스레 혀를 찬 반이 대검을 바로 쥐고는, 혈류검을 개방했다. 첫 번째 시련에서 다수의 마물을 해치웠기에 축적된 피의 양은 충분했다.

한층 짙어진 오라가 전신을 휘감고. 함께 붉어진 눈동자가 보다 정확하게 루멘의 움직임을 좇아 움직였다. 그리고 루멘의 신형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딱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네놈이 이런 짓거리를 할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눈깔에 문제라도 생긴 거냐?”

순식간에 휘몰아친 [가시]가 루멘의 검집을 옭아맸다. 행동이 제약되자 그제야 루멘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는 한결같이 무감한 표정으로, [가시]의 힘을 버티며 검집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조금의 물러남도 없는 힘의 충돌에 전투는 자연스레 교착 상태로 흘러갔다. 서로의 힘을 버티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루멘은 자신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죽어야만 이 시련이 끝난다.”

“뭐라고?”

“시련을 끝내지 못하면 모두 이 사막 위에서 죽게 되겠지. 말라비틀어진 시체로 유명을 달리하고 싶지 않다면, 너도 분발하는 게 좋을 거다.”

예상 못 한 발언에 반이 주춤하던 바로 그때. 검 손잡이를 쥔 루멘의 손이 위아래로 짧게 움직였다.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발도술을 사용한 것이다.

푸른 검기가 검집을 붙든 [가시]를 가로지르고. 단숨에 오라를 베어 낸 루멘이 날렵하게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반은 곧장 공격을 재개하려는 그의 잔상을 좇으며 빠득, 이를 갈았다.

“이 미친 새끼가…….”

자신과 단장을 죽여서 이 사막을 살아 나가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만약 이곳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바로 카델이었다.

붉은 눈동자 위로 전에 없던 살기가 감돌았다. 오라를 임계치까지 끌어 올린 그가 당장이라도 루멘을 찢어 죽일 기세로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된 공격을 퍼붓기도 전.

까가가가각.

일대를 휩쓰는 냉기와 함께 함께, 카델의 외침이 들려왔다.

“라이돈! 멈춰!”

*

짧은 시간 동안, 카델의 머릿속에선 수십 개의 가정이 번뜩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무언가를 확신하기엔 근거가 부족했고, 근거를 뒷받침하기엔 증거가 부족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좀, 해 보자, 니까……!”

적어도 눈앞의 부하가 제정신은 아니라는 것. 카델은 널따란 빙판 위에서 우후죽순 솟아나는 얼음 가시들을 막아 내며 방어에 열을 올렸다.

한번 자라난 얼음 가시는 부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서, 그의 주위로는 이미 날카로운 가시들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그는 화염구를 이용해 차근차근 가시들을 파괴해 가며 어떻게든 라이돈에게 접근해 보고자 했다.

라이돈은 ‘너희를 죽여야 시련이 완성된다’고 했으나, 그 시련이 어떤 내용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정확한 내용을 안다면 이보다는 원만하게 상황을 해결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누구 마력이 더 많은가 시험해 보자는 거야? 안됐지만 너보단 다속성 마법사인 내 쪽이 더 승률 높거든? 고집 그만 부리고 나 좀 봐!”

라이돈과 루멘에겐 이쪽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카델에겐 없었다. 그러니 되도록 상처 입히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물론, 라이돈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포기해, 카델. 차라리 전력을 다해 줄래? 네가 빨리 힘을 소진하는 편이 더 수월할 것 같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대체 시련의 내용이 뭐였길래 그래? 어디서 보고 들은 건데?”

“모르는 편이 죽이기 쉬우니까 말 안 할래.”

정말 자신과 반을 죽이려는 걸까.

입술을 앙다문 카델이 차분히 숨을 골랐다. 평정을 찾아보려 해도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시끄럽게 박동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빠듯하게 옥죄고 있었다.

끝없는 사막 횡단 속에서 부하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반가움에 없던 기운까지 샘솟았던 그였다. 이런 식의 반응은 타격이 컸다.

‘……생각을 하자. 언제까지고 이놈들의 장단에 맞춰 줄 수는 없어. 대체 시련이라는 게 뭐길래 이러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야 해.’

일단 라이돈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루멘. 그는 반과 대치 중이니, 만약 반이 시련에 대해 질문했다면 대답해 주었을 확률도 있었다.

‘라이돈은 버리고, 반에게 합류한다.’

그러기 위해선 잠시라도 라이돈의 움직임을 묶어 둘 수단이 필요했다. 마력을 과도하게 운용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발을 묶을 수 있는 마법.

선택을 마친 카델이 바닥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허공에서 화르륵 불씨가 번져 오르며,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부터 기다란 뱀의 형상을 한 불줄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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