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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원스럽게 외친 카델이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에는 빼앗겼던 짐 가방과, [환상의 날개]가 들려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어. 제한 시간 내에 죽이지 못한 마물은 다른 팀이 있는 공간으로 이동되는 거야.’
만약 양 팀 전부 마물을 죽이지 못해 그것이 누적된다면, 제한 시간은 줄어들고 처리해야 할 마물은 점점 늘어나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시간 안에 마물을 잡지 못하면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대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마물을 전부 잡지 않아도 시련이 진행된다는 사실만 파악하고 있다면,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적당히 싸움을 피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양 팀 전부 시련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가방을 되돌려 주며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을 넣어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반! 내가 말했던 가정, 확실해. 틀림없어.”
전방에서 몰려드는 마물을 상대하던 반이 설핏 고개를 돌렸다.
“잘됐네요! 마침 루멘 놈한테 적당한 마물이 나왔으니, 선물해 주자고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델이 선물 받은 화이트 스파이더의 위로 불덩이를 떨어뜨렸다.
쓰러뜨리지 못한 마물이 다른 팀의 방으로 이동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카델은 상대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마물을 전부 때려잡을 생각은 없었다.
가장 효율적인 것은, 붉은 모래가 소멸해 시련이 종료될 때까지. 각 팀의 상성에 맞는 마물을 주고받으며 전투하는 것.
‘서로의 힘은 서로가 제일 잘 알아. 체력을 아끼며 끝까지 버티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그러니 이젠, 선물 교환의 시간이었다.
각 팀은 자신에겐 까다롭지만 상대방에겐 수월한 마물을 선별했고, 선별한 놈들을 넘겨주기 위해 공격 대신 방어에 주력하며 체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했다.
그렇게 제한 시간이 끝나면, 이젠 상대 팀이 선물해 준 마물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카델과 반 팀은 무리 지은 원거리 마물을. 루멘과 라이돈 팀은 속공이나 구속이 필요한 마물을 담당하게 되었다.
총 여섯 차례의 릴레이 마물 토벌이 진행되고. 숨 가쁘게 이어졌던 전투는, 모래시계의 붉은 모래가 완전히 소멸함과 함께 종료되었다.
「축하드립니다. ‘협동의 시련’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아오, 더럽게 힘드네.”
카델은 허리를 짚은 채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사방에서 웬만한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남지 않던 돌벽이 묽은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련의 종료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은 카델의 옆에 바싹 붙은 채 사위를 경계했다. 꿀렁거리며 흘러내린 벽 너머에는, 익숙한 인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 저 여자네요.”
스텔라. 벅찬 표정으로 양손을 맞잡은 그녀가 긴 녹색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두 남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대검을 겨눴다. 스텔라의 새하얀 눈동자는 그녀가 어딜 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으나, 적어도 본인을 조준한 대검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아가는 걸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카델은 점점 좁혀지는 스텔라와 대검 사이를 불안하게 살폈다. 잘 벼려진 날은 조금만 찔려도 피가 날 것이었다.
결국 카델은 스텔라가 대검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멈추시죠.”
스텔라는 얌전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한 발짝만 더 움직였다면 꼼짝없이 가슴팍을 찔렸을 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느다란 입꼬리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카델은 반의 팔에 손을 올리곤 지그시 힘을 주어 끌어 내렸다. 마주친 시선에선 스텔라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으나, 카델이 작게 고개를 젓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검을 거두었다.
확연히 줄어든 살기에 그제야 갑갑했던 공기가 느슨해졌다. 스텔라는 가볍게 눈을 휘며 명랑하게 말했다.
“전부 지켜보고 있었어요. 여러분의 협동 작전, 정말 흥미롭던데요? 무사히 시련을 통과해서 스텔라는 정말 기뻐요!”
“저희의 개고생을 좋게 봐주셨다니 이쪽이야말로 기쁘네요. 당신은 이게 첫 번째 시련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두 번째도 있겠죠?”
“스텔라에게 시련의 내용을 알아내려는 건가요? 곤란해요. 저의 헤소니아는 이런 부정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거든요!”
“딱히 시련의 내용을 알아내려던 건 아니었지만…… 좋습니다. 그럼 시련이 몇 가지 남았는지 정도는 알려 줄 수 있겠죠?”
카델의 물음에 스텔라가 곧장 두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총 3개의 시련이 있다는 건가……. 이미 첫 번째 시련에서 힘을 다 뺀 것 같은데. 두 번이나 더 굴러야 한다고?’
마물 교환을 통해 극단적인 체력 소모를 막기는 했으나,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하룻밤도 제대로 못 자고 사막을 헤쳐 오기까지 했으니.
절로 나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스텔라를 바라보자, 그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라든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라든가.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애교가 묻어나는 사랑스러운 여성이었으나.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눈동자는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 과하게 신묘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어서, 막연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빤한 시선을 감지한 그녀는 카델을 향해 몸을 틀어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반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지만, 거친 손길은 스텔라의 몸을 건들지 못했다.
허공을 스치듯 통과되는 팔. 놀란 반의 입술이 벌어지고, 스텔라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카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 하는…….”
가볍게 까치발을 든 그녀가 주춤거리는 카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곳에 가짜는 없어요. 명심해요, 카델.”
영문 모를 말이었다. 짧은 충고를 끝으로 훌쩍 멀어진 스텔라가 뒷짐을 진 채 밝게 웃었다.
“저의 헤소니아에겐 비밀이에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들어차는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신뢰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또다시 시야가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