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521)

「기사 ‘반 헤르도스’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87/100」

“쟤는 대체 호감도 오르는 기준이 뭐야……?”

알다가도 모르겠다. 설설 고개를 저은 카델이 수십 개의 [바람 칼날]을 날려 그새 더 성장한 화이트 스파이더를 추격했다.

*

[혈류검 제1식, 가시]

세 갈래로 뻗쳐나간 오라가 거침없이 아머 오우거의 허리를 휘감았다. 단숨에 아머 오우거 셋의 움직임을 봉쇄한 반이 놈들의 뒤편으로 도약했다.

뿌드드득.

살인적인 악력이 [가시]를 촘촘하게 조이며 아머 오우거의 갑옷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마물과 등을 맞댄 상태로 놈들을 끌어당기듯 양팔에 힘을 주었다. 무게중심을 지탱한 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며 바닥이 얕게 꺼졌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포악하게 번뜩이고. 어깨 위로 치켜들었던 대검을 가슴 앞으로 천천히 끌어 내렸다. 대검의 움직임을 따라 이어진 [가시]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성난 팔뚝과 유연하게 비틀린 허리가 아머 오우거 3마리의 무게를 감당하며 움찔거렸다.

‘가시를 한계까지 조여서 놈들의 갑옷을 동시에 깨부순다.’

그것이 반의 계획이었다. 낌새를 느낀 아머 오우거가 거칠게 몸부림치며 버텼으나, 반은 끝까지 대검을 놓치지 않았다. 흡, 숨을 들이켠 그가 대검을 완전히 끌어 내리고.

콰드득!

[가시]에 묶여 있던 아머 오우거 3마리의 갑옷이, 일시에 파괴됐다. 그의 오라가 마물의 연약한 살갗을 뚫으며 그 안의 핏물을 양껏 빨아들였다.

계획의 성공을 감지한 그가 빠르게 뒤를 돌아 자세를 바로잡고는, 곧장 [가시]를 해제했다.

본능적인 시선이 포효하는 놈들의 몸뚱이를 훑어 내리고. 한눈에 들어온 약점을 노리며 강하게 응축된 검기를 날렸다.

푸슈슉—

거침없는 공격이 아머 오우거의 드러난 살점을 깊게 갈라냈다. 후드득 떨어지는 갑옷 파편에 약점은 늘어나기만 했고, 반은 잔인하리만치 집요하게 그 틈을 공략했다.

방망이의 궤적조차 피해 가는 검기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놈들은 속수무책으로 온몸을 난도질당했으며,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쿵, 묵직한 진동을 동반하며 아머 오우거가 쓰러졌다. 가벼운 동작으로 놈들의 시체를 타고 오른 그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조금 더 빨리 죽일 수도 있었는데. 카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경직된 듯했다.

씁쓸한 아쉬움을 남긴 그가 카델을 찾았다. 남은 마물이 있다면 전투를 도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반이 발견한 것은, 치열하게 싸우는 카델도, 모든 전투를 마치고 느긋하게 휴식하는 카델도 아니었다.

“바아안! 저 새끼, 저 새끼 좀 잡아 봐!”

성체가 된 화이트 스파이더 세 마리와, 그들을 쫓아 힘겹게 달리고 있는 카델.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허덕이던 카델이 한껏 억울해진 얼굴로 마물 무리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쟤가 내 가방 훔쳐 갔어!”

짐가방의 내용물이 손상될까 봐 섣불리 마법을 날리지 못했다. 확실한 조준을 위해 화이트 스파이더의 뒤를 바싹 추격하는 것이 최선. 저질스러운 체력의 한계로 한참을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다, 뒤늦게 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녀석의 움직임을 멈췄으나.

“내 가방…….”

놈을 죽이기도 전, 제한 시간이 끝났다.

눈앞에서 가방을 물고 소멸한 화이트 스파이더가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 안에 든 것만 팔아도 대여할 수 있는 마차가 몇 댄데.

넋이 나간 채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던 카델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깐. 가방이고 자시고, 제한 시간 내에 마물을 죽이지 못했잖아. 그럼 설마…….’

시련에 실패했나? 황급한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벽이 허물어진다거나, ‘스텔라’가 나타나 시련의 종료를 알리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혹시 한 번의 실패는 봐주는…… 걸 리가 없는데.’

당장 시련이 종료되는 일은 없었으나, 그건 그것대로 찝찝했다.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입맛만 다시고 있자, 대검을 바닥에 찔러 넣은 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휴식 없이 바로 마물이 나올 모양이네요.”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집힌 붉은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한 번 상단부를 채운 붉은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든 양이었다.

반을 따라 모래시계를 확인한 카델.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떨어지는 모래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가볍게 턱을 쓸어내렸다.

‘이거 혹시.’

시간 내에 죽이지 못한 마물. 시간이 끝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화이트 스파이더. 두 번 연속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푸른 모래시계.

조금만 더 단서가 나온다면, 시련의 정체에 대한 감이 잡힐 것도 같았다. 다시금 개방되는 벽면을 응시하는 카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젠장, 모래의 양이 너무 적어졌어. 나오는 마물도 상성 안 맞는 놈들뿐이고……. 화이트 스파이더는 왜 또 튀어나온 거야?’

일곱 마리의 레드 와이번이 공중을 순회하며 끊임없이 브레스를 흩뿌렸다. 루멘은 빼곡한 화염으로 바닥을 달궈 대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라이돈을 노려보았다.

“혼자 장막 두르고 있을 거면 와이번 머릿수라도 줄여 보지 그래.”

“으음, 슬슬 마력이 부족한걸. 내가 얼마나 많은 마물을 죽였는지 잊은 거야, 루멘?”

“누가 들으면 혼자 처리한 줄 알겠군.”

라이돈은 뻔뻔스럽게도 홀로 얼음 장막을 두른 채 제자리에서 브레스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방팔방 굴러다니며 공격을 피하는 루멘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얄미울 만큼 멀쩡한 겉모습이다. 하지만 마력이 부족하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현재 라이돈에게 남은 마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반에 쓸데없이 마력을 낭비한 탓도 있었지만, 신전에 들어온 후부터 미묘하게 약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의 운용도 평소보다 배는 신경을 써 주어야 겨우 평소 수준의 마법이 나왔으니. 무리해서 마력을 쥐어짰다간 후폭풍을 맞게 될 것이었다.

그런 진실을 알 리 없는 루멘은 빠득 이를 갈며 화를 삭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 공중에 얼음판이라도 띄워.”

“얼음판?”

“밟고 와이번 앞까지 올라갈 거다.”

“아하하! 그건 좀 재밌어 보이는데!”

기발하다며 손뼉을 친 라이돈이 짧은 영창과 함께 얼음을 생성했다. 그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얼음 발판이 삐뚤빼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루멘은 레드 와이번의 브레스를 피하며 쏜살같이 발판을 밟고 도약했다. 재빠른 도약이 이어지며 흐릿한 신형이 레드 와이번과의 거리를 차근차근 좁혀 갔다.

“비행 마물은 딱 질색이라고.”

마물을 마주한 루멘의 푸른 눈동자 위로 서늘한 이채가 스쳤다. 검집에 올라간 손이 작게 움직인다 싶더니, 이내 레드 와이번의 몸을 횡으로 가르는 기다란 섬광이 스쳤다.

루멘은 마물의 몸뚱이가 무너지기 전, 놈의 등을 밟고 올랐다. 무게가 집중된 각력에 밀려난 몸통이 섬광의 잔상을 따라 어긋나고. 그대로 점프한 그가 옆에 있던 또 다른 레드 와이번을 노리며 발도술의 시동을 걸었다.

아래에서 볼 때, 공중전을 펼치는 루멘의 움직임은 거의 기예에 가까웠다.

얼음판과 레드 와이번을 활용한 유동적인 움직임, 정면으로 뻗는 브레스를 유연하게 회피하는 속도감, 단 한 번의 발도술로 적을 두 동강 내는 파괴력. 참으로 시원스러운 전투였다.

라이돈은 다리에 날개라도 달린 듯 공중을 내달리는 루멘의 모습을 지켜보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싸워 보고 싶다.”

간만에 구미가 당기는 힘이었다.

싸우면 둘 중 누가 먼저 죽을까?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게 패배하겠지만, 능력을 되찾은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카델이 루멘과의 싸움을 허락해 주지는 않을 것 같으니, 한다면 몰래 해야겠지.

라이돈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루멘의 싸움을 구경했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그의 장막을 건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으응? 뭐야, 이거.”

알아서 브레스에 녹아내리기에 신경을 꺼두고 있던 화이트 스파이더였다. 그중 용케 살아남은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라이돈의 장막을 두드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놈을 죽이려던 라이돈은, 녀석의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익숙한 짐 가방을 발견하곤 뻗었던 손을 거뒀다.

“이건…….”

그 뜻밖의 발견이 이루어지는 동안. 루멘은 마지막 와이번을 베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브레스에 직접적으로 닿지는 않았으나, 끼쳐 오는 열기까지 피할 수는 없었기에 몸 곳곳에 그을은 자국이 남았다.

훅, 숨을 몰아쉰 그가 부드럽게 공중을 돌며 절단된 레드 와이번의 등 위에서 점프했다. 미리 봐 두었던 얼음판에 착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발판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다. 힘주었던 다리가 허공으로 쑥 빠지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눈을 굴려도 보이는 발판은 전혀 없다.

들끓는 욕설을 중얼거린 그가 함께 추락하는 레드 와이번의 다리를 붙들고는, 빙글 돌아 가까스로 등 위에 올라탔다.

쿵—

떨어진 레드 와이번의 몸뚱이가 지면과 맞닿으며 커다란 울림을 만들었다. 마물을 사이에 두었다고 추락의 충격이 전부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멘은 뼈가 시큰거리는 충격을 느끼며 쿨럭거렸다. 격한 기침에 핏방울이 섞여 나왔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간 것 같았다.

겨우 팔에 힘을 준 그가 전에 없이 살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고.

“라이돈…….”

추락의 원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당장 저 요정 놈의 머리통을 베어 내지 않으면 이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루멘! 이것 좀 봐. 이게 왜 여기 있을까?”

하지만 라이돈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내보인 익숙한 짐 가방을 발견한 순간.

“……대장 가방이잖아?”

분노보다 큰 당혹감이 들어찼다.

덜그럭거리는 몸을 움직인 루멘이 라이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편에는, 다리가 얼어붙은 채 거꾸로 뒤집힌 화이트 스파이더가 있었다.

“쟤가 물고 있더라고. 카델이 고작 화이트 스파이더에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뭐지? 뭘까? 뭘 것 같아, 루멘?”

루멘은 라이돈의 물음을 무시한 채 가방을 받아 들었다. 입구를 풀자, 여러 약초와 옷가지, 붕대, 물약 등등 카델의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물건들이 보였다.

‘확실히 대장 가방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이 가방이 왜 이쪽까지 옮겨 온 걸까. 방이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이건 카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고, 뚝 떨어졌다면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저 마물이 왜 대장 가방을…….’

화이트 스파이더. 지난 턴에 등장했던 마물이었다. 예상치 못한 새끼의 부화에 시간 내에 놈들을 처리하지 못했었고, 놓친 후엔 전부 사라졌다.

‘……그래. 사라졌지. 그럼 사라진 놈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대로 소멸? 아니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되나?

문득 피어난 의문에 루멘의 행동이 다급해졌다. 그럴싸한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라이돈, 그 마물 죽이지 말고 놔둬.”

“제한 시간이 거의 다 끝나 가는데?”

“어차피 못 잡는다고 시련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잖아. 살려 둬. 그리고…… 너, 뭔가 대장이 알아볼 만한 물건 같은 거 없어?”

“글쎄…….”

“시간 없어. 있으면 뭐라도 꺼내 봐.”

잠시 생각하던 라이돈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거. 카델이 준 거야.”

“좋아. 그걸 이 가방 안에 넣어.”

“왜?”

“시간 없다고 했을 텐데.”

“으음, 이거 풀려면 마력 많이 들어가는데…….”

목걸이에 담긴 마력의 주인이 아닌 자가 목걸이를 풀어내려 할 경우, 상당한 양의 마력이 소모된다. 고민하는 라이돈을 지켜보던 루멘이 카델의 가방 안에서 약초를 한 무더기 꺼내 들었다.

“이거 먹으면 마력 찰 거 아니야. 고민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해.”

“……맛없어서 싫은데.”

결국 성화에 못 이긴 라이돈이 대부분의 마력을 뽑아내 목걸이를 풀어냈다. 곧장 그것을 낚아채 가방 안에 집어넣은 루멘이, 뒤집힌 화이트 스파이더의 앞으로 다가갔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대장도 눈치챌 수 있을 거야.’

그는 마물의 아가리 안으로 가방을 욱여넣고는,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남아 있던 한 줌의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방을 문 화이트 스파이더가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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