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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서늘하고, 어둡다. 좁은 복도는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으며, 벽면의 틈새에서는 연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델을 선두로 한 용병단은 작은 불꽃에 의지한 채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라이돈은 신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몰아치는 강대한 기운에 무엇하나 제대로 판별하지 못했다. 그러니 봉인 해제를 위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일일이 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거야? 끝까지 가면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뭔가가 나오나?”
카델이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복도 너머를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리자, 루멘이 입을 열었다.
“라이토스가 보관하고 있던 고서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어? 신전에 봉인을 풀 만한 뭔가가 있다든가, 그것의 위치라든가.”
“음……. 없…었던 걸로 기억해.”
애초에 고서 자체가 꾸며 낸 이야기였다. 그는 봉인 해제를 위한 ‘신전의 존재’만 알고 있을 뿐, 그 안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지는 몰랐다.
라이돈도 마찬가지였다. 바깥 세계에서 본래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피의 사막’에 있는 ‘균형의 신전’을 찾아가야 한다는 정보는 알았지만, 그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아무리 아는 정보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뭐, 마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계속 걷기만 하잖아.’
들어온 지 15분은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어두운 신전을 내리 걷고 있으려니 현실 감각마저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카델이 걸음을 멈췄다.
“라이돈, 정말 여기가 맞긴 한…….”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레 몰아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작은 불덩이를 담아낸 시야가 크게 일그러졌다.
“큭……!”
느껴지는 지독한 두통에 카델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으나, 그의 손은 그대로 벽을 뚫고 통과됐다. 기울어지는 중심을 버티지 못한 그가 바닥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
누군가 뇌를 움켜쥐고 빨랫감처럼 거칠게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두통이었다. 몇 분인지 짐작도 못 할 시간 동안 그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서야, 서서히 시야가 맑아졌다.
카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불꽃을 피우자, 쓰러지기 전까지 서 있던 비좁은 복도가 보였다.
“갑자기 무슨…….”
평범한 현기증 같진 않았는데.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가까운 곳에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 단장, 들려요?”
“반……?”
서둘러 불꽃의 크기를 키운 카델이 맞은편에 있는 반을 발견했다. 반 또한 카델의 불꽃을 확인하곤 곧장 그에게로 달려왔다.
“단장! 괜찮아요? 다친 덴 없어요?”
“난 괜찮아. 너는?”
“저도 괜찮아요.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아무래도 반 역시 똑같은 증상을 겪은 듯했다. 카델은 반의 부축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애들은?”
“잘 모르겠어요. 정신 차렸을 땐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기척도 안 느껴져요. 아무래도 떨어진 것 같은데.”
“떨어져……? 여기서?”
카델은 비좁기 짝이 없는 일직선의 복도를 돌아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하면 이곳에서 동료를 잃어버릴 수 있는가? 흩어지려야 흩어질 수 없는 일방통행의 통로인데. 조금 먼 거리로 이동했을 수는 있어도, 다른 공간에 떨어졌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반은 카델을 부르며 팔을 길게 뻗었다.
“이것 보세요.”
그의 손이 복도 옆 벽면에 닿았다. 하지만 단단한 손바닥은 벽면을 제대로 짚어 내는 대신, 그대로 안쪽을 통과했다. 믿기 힘든 장면에 카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벽을 통과할 수 있어요. 처음 들어왔을 땐 분명 평범한 벽이었는데……. 환혹술이라도 걸린 걸까요?”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정신을 못 차리던 때, 분명 벽을 짚었음에도 그대로 나자빠졌던 감각은 남아 있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던 걸까.
“환혹술은 허상을 보여 줄 뿐이야. 비좁은 복도를 넓게 보여 줄 순 있어도, 정말 내부를 넓힐 순 없지. 환혹술에 걸린 거라면 오히려 반대였어야 해.”
사람 열 명은 들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복도가 사실은 한 명밖에 설 수 없는 면적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이동이 제한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들이 있던 곳은 분명 비좁은 복도였다. 실체는 확실하게 확인했고, 암만 환혹술이라도 실체까지 지워 낼 순 없었다.
뺨을 쓸어내린 카델이 신중한 얼굴로 반의 손목을 집어삼킨 벽을 훑어보았다.
“……일단 반대편으로 넘어가 보자.”
반신반의하며 발을 뻗자, 무언가 진득한 것이 몸을 감싸는 기분 나쁜 감각과 함께 몸이 통과됐다. 반대편으로 넘어온 카델이 불쾌한 듯 팔뚝을 문지르며 새로운 불꽃을 띄웠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사 ‘라이돈’의 고유 퀘스트 시작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십시오. 클리어 시, ‘해방의 문’이 생성됩니다.」
“와아아,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네요! 그것도 두 명이라니. 스텔라, 정말 기뻐요!”
긴 녹색 머리를 찰랑거리며 양손을 맞잡은, 아름다운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스텔라……?”
“맞아요! 제 이름은 스텔라에요. 그쪽은요?”
기묘하게 변해 버린 신전 속, 밝은 낯으로 붙임성 좋게 말을 붙여 오는 낯선 여자. 경계해야 마땅한 존재였으나. 카델은 차분하게 그녀의 외관을 뜯어보았다.
허리께까지 부드럽게 늘어진 짙은 녹발. 건강미가 느껴지는 어두운 피부색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눈동자. 동공과 홍채 전부 새하얗게 물든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랄 것이 없었고, 언뜻 눈을 까뒤집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여자, 틀림없어.’
미스틱 공국이 숭배하는 세븐 나이츠, ‘헤소니아’. 그를 가호하는 여신인 스텔라였다. 하지만 왜? 왜 균형의 신전에 그녀가 있는가?
스텔라를 발견하자마자 떠올랐던 시스템 창의 내용도 거슬렸다. 시련이라니. 대충 몬스터 웨이브만 몇 번 넘기면 되는 게 아니었나?
몰아치는 의문을 정돈하며, 카델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델 라이토스라고 합니다.”
“와아아, 멋있는 이름! 옆에 계신 분은요?”
반은 그녀의 살가운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카델을 자신의 뒤편으로 잡아끌었다. 스텔라를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에 진한 경계심이 어렸다.
“조심하세요, 단장. 저 여자,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어머, 단숨에 제 정체를! 맞아요, 전 인간이 아니에요. 하지만 음…… 죽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데요.”
“정체가 뭐지?”
“스텔라라고 해요!”
반의 날 선 태도에도 스텔라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도통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의 시선에는 분위기와 맞지 않는 섬뜩한 면이 있었다.
방긋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스텔라는, 내내 맞잡고 있던 손을 풀고서 양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아쉬워요! 아직 그쪽의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저의 ‘헤소니아’가 벌써 시련을 시작해 버렸네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저도…… 첫 번째 시련을 내려 볼까요?”
새하얀 눈동자에 일순 안광이 번뜩였다.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반이 반사적으로 대검을 뽑아 드는 순간. 주춤하며 물러선 카델의 눈앞으로,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