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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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는구만.”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방문한 식당에서 난데없이 아는 얼굴을 만난 것도 황당한데,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마력도 없이 빌빌대고 있다니.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스튜를 휘젓는 카델을 보며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화이트 왕국을 위협한 마족을 처리했다는 용병단의 마법사 얘기를 들었을 때, 대충 네 녀석일 거라 짐작은 했다. 그런데 뭐? 폭혼을 써?”

“하하……. 일생일대의 위기였다구요, 마밀 님.”

“그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고 말이다. 네놈은 그것도 안 막고 뭘 하고 있었어?”

묵묵히 냉감자 스튜를 퍼먹던 루멘이 갑자기 튄 불똥에 놀라 흠칫했다.

“네? 그건…….”

도움을 바라는 시선이 닿아 왔으나, 카델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무시했다. 마밀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절친한 친우가 목숨을 하루살이처럼 굴리는 멍청한 선택을 하고 있으면 말리는 게 도리지. 안 그런가? 응?”

“……예. 제 불찰입니다.”

테이블 아래서 루멘의 기다란 다리가 부딪혀 왔다. 그 충격에 입 안으로 가져가던 스튜를 절반이나 흘렸으나, 카델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마밀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도 마력은 확실하게 돌아오고 있어요. 다행이죠?”

“운이 좋았던 게지.”

“맞아요. 그래서 이 좋은 운의 흐름을 타고 ‘피의 사막’에 가 볼 예정이에요.”

“피의 사막? 자살 시도가 아예 취미가 됐나 보구나.”

마밀이 질색을 하며 오만상을 썼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약초 하나에 사람을 환혹의 숲으로 보내 버린 장본인에게 저런 소릴 들으니 웃기긴 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은 아니에요. 꼭 가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자세한 얘기는 해 드릴 수 없지만…… 그곳에 ‘증폭의 풀’ 못지않은 엄청난 게 있다는 것만 알아 주세요. 괜히 가는 게 아니라고요.”

“죽음보다 가치 있는 물건이길 바라마.”

“불길한 소리 하시긴. ……그래서 말인데요, 마밀 님.”

흐흐,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린 카델이 바닥에 두었던 짐가방을 주섬주섬 들어 올렸다. 테이블 위에 부지런히 마법서와 약초를 정렬한 그가 애교스럽게 눈을 휘었다.

“뼛가루는 없지만 귀한 약초는 많은데.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스승님?”

이 척박한 땅에서 마밀을 만난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이 행운을 빨대 삼아 마밀의 지식을 쪽쪽 빨아먹으리라. 음흉한 속내를 숨긴 카델의 광대가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아르헴의 밤은 낮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서늘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얇은 옷을 걸치고 나왔던 카델은 그 역풍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아오, 어떻게 된 게 기온에 중간이 없어.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여관은 또 왜 이렇게 먼데?’

차갑게 식은 팔을 벅벅 문지르며 옆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 루멘이 시선을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곧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틱 공국은 일교차가 커. 바깥을 돌아다닐 거면 가벼운 겉옷 정도는 챙겨 다니는 게 좋아.”

그리 말한 루멘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카델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훅 끼쳐 오는 박하 향과 따뜻한 온기가 전신을 감쌌다.

카델은 주섬주섬 외투를 끌어모으고는, 고맙다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외투를 벗은 루멘은 얇은 셔츠 차림이었으나, 덜덜 떨던 카델과는 달리 그다지 추워 보이지 않았다.

금세 거둬진 시선에 묘하게 아쉬운 감정이 맴돌았다. 카델은 조금씩 옮겨붙는 체온을 느꼈고, 점점 느려지는 자신의 걸음을 느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주는, 루멘의 익숙한 배려를 느꼈다.

그랬기에 앙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이해가 안 돼.”

우뚝 멈춰 선 카델이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앞에서 뒤돌아보는 루멘의 표정은 여전히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웃기다는 건 알아. 잔뜩 부려 먹어 놓곤 정식 입단도 권하지 않았고, 애매하게 관계만 질질 끌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나쁘지 않았잖아.”

앞으로 조금이면. 당당하게 기사단으로 임명받고, 지금까지의 공적이 널리 알려져 남부럽지 않을 유명세를 떨칠 것이다. 그럼 오랫동안 함께 고생해 왔던 루멘을 데려올 수 있다. 지긋지긋한 간 보기를 멈추고, 진정한 동료로서 함께 싸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또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해 루멘을 떠나보내야 한다니.

“……내 개인적인 결심이야. 대장이 잘못한 건 없으니, 신경 쓸 거 없어.”

“떠나는 이유도 못 알려 주겠다는 거야?”

만약 그가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 신뢰를 보일 것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졌다면 스토리를 미뤄서라도 함께 가 줄 것이다. 끝까지 입단을 제안하지 않는 것이 서운했다고 한다면, 멀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며 조금만 더 참아 달라 애원할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루멘은 그의 두 번째 동료였다. 소중한 부하였다.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 필요 없어. 알아도 바뀌는 건 없거든.”

루멘은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았다.

허탈했다. 그에게도 자신은 소중한 동료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정말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루멘의 건조한 눈빛이 우두커니 선 카델을 피해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그렇게 더 이어지는 말도, 돌아오는 걸음도 없이. 그는 카델을 버려둔 채 홀로 떠났다.

“…….”

카델은 점점 멀어지는 루멘의 그림자를 좇으며 외투의 옷깃을 꾹 그러쥐었다. 몸을 덥히는 온기가 유독 덧없게 느껴졌다.

⚔️

카델의 마력이 돌아오는 데엔 정확히 10일이 걸렸다. 그것도 마밀이 직접 마력 주입을 도운 덕에 단축된 것이었다.

더불어 마밀은 두 권 있던 마법서도 전부 해독해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한 권뿐이었다.

「중급 마법서(불)의 해독을 완료했습니다!」

「중급 마법서(암흑)의 해독을 완료했습니다!」

「속성 포인트(불)이 10 증가하였습니다.」

불과 암흑 속성. 암흑은 미리 찍어 두지 않은 속성이기에 활성화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딱히 개방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지만 화염 마법을 강화했다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엔 [마족의 뼛가루]가 없었기 때문인지, 마밀은 지난번처럼 상세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았다. 현재 카델이 가진 속성 마력을 활용할 만한 몇 가지 마법을 추천해 주었을 뿐.

‘어쩔 수 없지, 교환원이니까. 솔직히 스킬을 전수해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이야.’

원래라면 받은 만큼만 지식을 알려 준 뒤 곧장 종적을 감췄을 위인이다. 그 나름대로 제자로 인정해 주고 있는 듯하니, 서운해할 건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 카델은 ‘피의 사막’에 대한 정보와 여행길에 필요할 물품들을 부지런히 모아 두었다.

아르헴에서 ‘피의 사막’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 그 자체였다. 호기심으로라도 기웃대선 안 되는 그런 장소.

‘환혹의 숲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네. 소문만 무성했던 숲과는 달리 현실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인가.’

사막의 낮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모래 폭풍이 이어지고, 밤은 모래의 수만큼이나 방대한 양의 마물이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밤마다 사막의 경계를 지키는 보초병들의 존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한때는 공국에서 주기적으로 인원을 꾸려 사막을 탐험하게 했으나, 여태껏 단 하나의 원정대도 복귀하지 못했고, 공국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막의 조사를 포기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 곳에 들어가야 하니, 보초병들이 출몰하는 밤을 피한 은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막에 가자마자 모래 폭풍부터 보겠군.’

밤을 피하면 남는 건 낮뿐이다. 끔찍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라이돈의 봉인을 풀 신전은 ‘피의 사막’ 안에 존재했고, 그것은 빙의자인 카델과 요정족인 라이돈 모두 장담하는 사실이었다.

‘게임에서처럼 알아서 신전 앞에 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아?’

히오나에서 미스틱 공국은 메인 스토리와 연관이 없는 서브 지역 중 하나였다. 특징이라곤 S급 요정들에게 부여된 ‘봉인’이라는 성가신 구속을 해제하는 스테이지의 존재 정도.

그러니 S급 요정족 기사를 보유한 플레이어는 무조건 미스틱 공국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했다.

‘이곳에서만큼은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미 라이돈을 가져 버렸으니. 선택지는 없다.

푹 한숨을 내쉰 카델이 빵빵한 짐가방의 입구를 꽉 동여맸다. 뒤편에서 그를 구경하던 라이돈이 물고 있던 알사탕을 반대쪽 볼로 밀어 넣으며 히죽거렸다. 카델의 마력이 돌아온 덕분에 라이돈은 다시 인간 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드디어 이 봉인을 풀 수 있다니. 기대돼서 못 견디겠는걸.”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알겠어?”

“당연히 기회는 없겠지. 신전을 찾지 못하면 다들 사막에서 말라 죽을 테니까! 아하하!”

살벌한 소리를 즐겁게도 한다. 카델은 위기의식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라이돈을 흘기며 묵직한 짐가방을 들어 올렸다.

“사탕 그만 까고 일어나. 사막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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