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틱 공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흐른 뒤였다. 이곳의 선박은 마력이 담긴 특수한 기계의 도움을 받기에 일반적인 무역선보다 훨씬 빠르게 대양을 가로지를 수 있다. 카델로서는 다행인 부분이었다.
항구로 들어서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대기의 무게감과 온도가 남달랐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긴 카델이 로브의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겉옷부터 벗어 내고 싶은 더위인데, 안주머니에 라이돈이 들어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탈의를 포기한 그가 훅 숨을 몰아쉬었다.
“단장, 일단 여관부터 찾을까요?”
“응. 그래야지.”
내리쬐는 태양, 대지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자글거리는 공기와 얇은 천으로 피부를 꽁꽁 싸맨 사람들, 진하게 풍기는 살냄새. 이곳은 미스틱 공국의 수도, ‘아르헴’이었다.
‘내 마력이 돌아올 때까진 이곳에 머무르면서 사막을 찾아갈 준비를 해 둬야지.’
다행히 마력 주입이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뻑뻑한 마력관에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감지된 것이다. 평소의 양을 되찾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주일 안에는 마력이 돌아올 것 같단 말이지.’
짐작일 뿐이지만 느낌상 그랬다. 마력이 돌아오는 대로 ‘피의 사막’을 찾아갈 계획이니, 일주일 안에 최대한 많은 정보와 물품을 수집해야 했다.
‘음, 일단 물약이랑 약초…… 붕대도 사야지. 괜찮은 아티팩트가 있으면 그것도 사 두고. 아, 반 갑옷이 낡았던데. 바꿔 줘야겠다.’
할 게 아주 많았다. 그렇게 카델이 빠듯한 계획 세우기에 열중하는 동안, 반과 루멘은 적당한 여관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저쪽 여관이 괜찮은 것 같은데. 식당가도 가깝고.”
“근처에 주점이 많잖아. 밤에 시끄러울 거다. 단장은 잠귀가 밝아서 시끄러우면 잠을 못 자.”
“조용한 곳을 찾으려면 쓸데없이 비싸거나 외진 곳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타협을 해야지.”
그날의 짧은 대화 이후, 둘 사이엔 ‘용병단 이탈’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각자 아예 없던 일처럼 서로를 대하며 필요한 말만 건조하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럼 외진 곳이 낫겠어. 라이돈도 있으니까.”
짧은 상의 끝에 그들은 광장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위치한 작은 여관 하나를 찾아냈다. 도착했을 즈음엔 전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으, 옷부터 새로 사야겠네.”
카델은 기분 나쁘게 들러붙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어떻게든 바람을 일으켜 보려 노력했다. 그동안 루멘은 자연스럽게 방값을 치르고 있었는데,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델이 뒤늦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루멘, 방값은 내가 낼게.”
여태껏 루멘의 돈을 빼먹으며 숙박비를 충당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곧 이탈할 사람의 돈을 쪽쪽 뽑아먹기도 싫었고. 카델이 멋쩍게 말하자,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멘이 고개를 돌렸다.
“방 하나 비용만 결제해 주시죠.”
“옙! 나머지 방 두 개는 이쪽 손님이 계산하시는 건가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멘을 바라보며, 카델이 입술을 삐죽였다. 루멘 몫까지 내 줄 생각이었는데, 빚을 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칼 같았다고.’
남처럼 구는 서늘한 표정이 적응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놀려 대며 친근하게 굴었던 루멘이었으니. 벽을 치듯 냉랭한 태도가 어색하기만 했다.
“쉬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무뚝뚝한 목소리에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할 말을 마친 루멘은 그대로 제 방을 찾아 떠났고, 카델은 열쇠를 받아 반에게로 돌아갔다.
긴 항해에 피로가 축적되었을 테니, 오늘은 자유롭게 휴식하기로 했다. 터덜터덜 방을 찾아가자, 바깥과 마찬가지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넘실거렸다.
“더워…….”
문을 닫은 카델이 거치적거리는 로브를 빠르게 벗어 던졌다. 그제야 자유를 얻은 라이돈 또한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땀에 전 머리를 흔들었다.
“카델, 여기 지옥이야? 뭐가 이렇게 뜨거워?”
“네 봉인을 풀러 갈 ‘피의 사막’은 더 더울걸. 아, 찝찝해!”
에어컨이 필요했다. 카델은 누구보다 간절히 현대 문물을 그리워하며 푹 젖은 몸을 침대 위로 날렸다. 죽은 듯 누워 있으니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이며 들어와 아주 약간은 시원해졌다.
한편 라이돈은 난생처음 겪는 더위에 맥을 못 추렸다. 힘없이 비틀거리며 시원한 곳을 찾아 날아다니던 그는, 곧 어딜 가도 똑같이 덥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만스레 미간을 좁히고 있던 그가 이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응?”
옆으로 돌아누운 카델이 반쯤 풀린 눈을 끔뻑였다. 그의 앞에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새하얀 얼음 결정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것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곧 방 안을 가득 채운 얼음 조각들이 비쳤다. 그 중심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허공에 드러누운 라이돈이 있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에어컨이다.”
마력 낭비를 타박하기엔 너무도 기분 좋은 시원함이었다. 카델은 땀을 식히는 냉기에 감복하며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
짧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카델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웅크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얼음 조각들은 전부 사라졌으나, 냉기는 여전히 공기를 바싹 얼리고 있었다.
그는 침대 맡에서 숙면 중인 라이돈을 일별하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음. 밥부터 먹으러 갈까.”
저녁이 늦었는데도 반이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그 역시 여독에 지쳐 곯아떨어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혼자 갔다 오는 편이 낫겠지. 라이돈이 먹을 음식도 사 둬야 하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카델은 침대 아래에 놓인 짐가방을 뒤적여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돈주머니를 챙기기도 전, 주머니와 함께 딸려 나온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건…….”
노르스름한 양피지 한 장. 마밀이 선물한 [인연의 종이]였다. 무심코 종이를 들여다본 카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미스틱 공국?”
[인연의 종이]는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주인이 있는 현재 위치를 알려 준다. 이것은 마밀의 마력이 담긴 선물이었으므로, 종이 위에 적힌 [미스틱 공국. 아르헴 도시. 하늘과 별의 스튜]는 현재 마밀이 있는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짜 마밀이 여기 있어? 대박이잖아?’
기사단 승격 퀘스트를 진행하기 전에 한 번쯤 마밀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만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횡재였다.
잠기운이 싹 달아난 카델이 급히 가방을 뒤적였다. 마밀에게 해독을 맡겨야 할 마법서도 있고, 배우고 싶은 것들도 산더미였다.
금세 짐을 꾸린 카델이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하늘과 별의 스튜’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찾아가야 했다.
그렇게 다급히 계단을 내려가던 카델은, 마침 층을 오르던 루멘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루멘은 한가득 짐을 끌어안고서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카델의 모습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어디 가?”
“마밀 님 보러!”
“마밀 님……? 여기 계신대?”
“응, ‘하늘과 별의 스튜’라는 곳에 있대. 어딘지 알아?”
“거기라면―”
“안다고? 그럼 같이 가!”
카델은 루멘이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냅다 손목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층을 내려갔다. 그래 봤자 루멘에겐 얼마든지 저항이 가능한 미미한 힘이었으나. 그는 짧은 고민 끝에 얌전히 끌려가는 쪽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