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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늦었고, 바깥은 조용했다. 잔잔한 물결이 간간이 선체를 둥실 떠올릴 뿐, 잠든 선원들이 깨어날 만큼 격한 항해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다.
“라이돈, 일어나 봐.”
카델은 작은 요정의 몸으로 베개 옆에 웅크리고 잠든 라이돈을 흔들어 깨웠다. 손길이 귀찮다는 듯 뒤척이던 그가 느릿느릿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으응……. 왜 깨우는 거야, 카델…….”
“그만 자고 나가자. 바다 보러 가야지.”
“……바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삽시간에 또렷해졌다. 단숨에 날아오른 그가 카델의 품속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비록 고대했던 바다에선 비린내만 났고, 이미 날이 저물어 바다의 본래 색도 제대로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바다는 바다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임은 여전했으니, 기대감 또한 여전한 것이다.
카델은 조심스럽게 선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선미에는 조타수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선수의 끝으로 이동했다.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카델이 로브를 들추며 속삭였다.
“나와도 돼.”
재빠르게 로브를 헤치며 빠져나온 라이돈이 힘껏 날개를 펼쳤다. 훅 상승한 고도. 공중에 뜬 그의 시선이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담아낸 순간, 반짝이던 붉은 눈동자가 경직됐다.
“음, 구름이 좀 껴 있네. 그래도 달빛은 제대로 비추니까……. 어때? 인간들 사이에선 밤바다도 꽤 인기 있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거든.”
살짝 벌어진 입새로 얕은 숨이 빠져나왔다. 바다의 풍경을 새겨 두듯 꼼짝도 않던 시선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내 서늘한 달빛을 일그러뜨리며 찰랑이는 잔잔한 파도를 담아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파도 소리가 악기처럼 감미롭게 귓가를 매만졌다. 내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비린내는 시원한 풍랑이 되어 피부를 산뜻하게 감싸 오고 있었다.
“이게…….”
기대는 감탄이 되었고, 감탄은 흥분이 되었다. 정점을 찍은 고양감이 머릿속에 폭죽이라도 터뜨린 듯 연신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순간 숨을 흡, 들이켠 라이돈이 급작스레 하강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빠르게 추락한 그가 그대로 바닷물 속에 풍덩 몸을 빠뜨렸다.
“미친……! 라이돈!”
당황한 카델이 급히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어두컴컴한 바닷속에서 한 뼘 만한 요정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잠한 수면 위를 살피며 경악하고 있으니, 이윽고 눈에 익은 머리통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샌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라이돈이 해맑은 얼굴로 카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하하! 카델, 바닷물 엄청 짜! 조금 마셨을 뿐인데 속이 안 좋아졌어!”
“이 미친놈아! 배에 치이고 싶어? 누가 보기 전에 빨리 올라와!”
“우와, 차가워. 끝이 어디야? 어디까지가 바다인 거야? 어두워서 아래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안 보여, 물고기는 어디 있어?”
원래도 나사 빠진 녀석이었다만, 잔뜩 흥분한 라이돈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느낀 감정과 떠오른 의문을 나열하기 바빴다. 종종 카델을 잊지 않았다는 듯 말을 시켜 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카델은 라이돈을 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고 있을 거고…… 어두우니까 잘 보이지도 않겠지. 됐다. 즐겨라, 즐겨.’
평생을 숲 안에만 갇혀 있다 난생처음으로 ‘바다’라는 것을 보았다. 그가 느낀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바다를 봤을 땐 무슨 반응이었더라.’
신났던 기억은 있는데. 무슨 감상을 느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의 라이돈처럼 바닷속을 마구 헤엄쳤던 장면은 생생했다.
“……귀엽네.”
난간 위로 상체를 기댄 카델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귀엽다니. 환혹의 숲에서 죽일 듯이 싸워 댔을 때만 해도, 자신이 라이돈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수면에 떠올라 폐부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러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방싯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힘든 모험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지.
“카델! 나 물고기 잡았어!”
“……잘했네. 들고 오지 말고 놔줘.”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물고기를 자랑스럽게 흔들고 있는 라이돈을 보며, 카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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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서 소금이 느껴져. 엄청나지 않아? 카델, 바다 아래에서 뭘 봤는지 말해 줄까?”
“이미 뭘 발견하는 족족 잡아서 보여 줬잖아.”
“하하! 엄청난 곳이었어! 숨을 더 오래 참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 그래.”
타올을 들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카델이 바닥에 앉은 라이돈의 머리칼을 살살 말려 주었다. 스스로 하면 좋을 텐데, 여전히 흥분한 라이돈은 제 젖은 몸을 닦아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남의 침대를 축축하게 만들 게 뻔하니, 직접 나서야 했다.
“아침에 보는 바다는 무슨 느낌일까? 어떤 색일까? 보고 싶다. 보여 줘, 카델! 응?”
홱 고개를 젖힌 라이돈이 카델을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이 허락을 구하듯 애교스럽게 깜빡였다.
이 녀석은 자신의 외모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툭하면 얼굴을 활용하려 들지.
뻔뻔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얼굴을 빤히 노려보던 카델이 타올을 끌어 그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그건 다음에. 네 봉인이 풀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야. 지금은 이걸로 참아.”
“치사해, 카델.”
“이제 알았어?”
시큰둥하게 답하자 라이돈이 얼굴을 가린 타올을 걷어 냈다. 토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드러난 표정엔 장난기 섞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좋아. 그냥 바다도 좋지만, 카델이 옆에 있는 바다가 더 좋아. 나 카델을 엄청나게 좋아하나 봐!”
단숨에 결론을 내린 그가 벌떡 일어나 침대 위로 엎어졌다. 졸지에 함께 떠밀리게 된 카델이 라이돈 아래에 깔린 몸을 바르작대며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악! 야, 무거워……! 비켜!”
“응응, 좋아해, 카델!”
괴로워하는 카델은 안중에도 없는지. 라이돈은 그의 머리와 이마, 뺨과 콧등에 마구잡이로 입술 도장을 찍으며 연신 ‘좋아해’를 외쳤다. 밀어 내려 해도 꼼짝 않았고,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니 그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60/100」
호감도를 후하게도 올려 주었다. 지금도 좋다고 난리인데 이 이상 높아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두려우면서도 호감도와 함께 상승하는 충성도를 생각하면 무턱대고 밀어 내기도 뭣했다. 그야, 얼마 전까지 재미없는 단장이라며 투덜거리던 녀석이었으니까. 루멘의 이탈만 해도 벅찬데, 라이돈까지 감당할 순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카델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조금 참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