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델이 날 겁탈하려고 했어.”
선실 내부에는 카델과 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이돈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비좁고 갑갑한 풍경이었으나, 라이돈의 화려한 날개 탓에 마음대로 창문을 열 수도 없었다.
“헛소리 말고 내 식사나 내놔라.”
라이돈의 손에 들린 접시를 낚아챈 반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옆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델은 라이돈의 말을 모조리 무시한 채 해산물 파스타를 흡입하는 데 열중했다.
‘내가 뭐 때문에 그딴 짓을.’
처음부터 반이 ‘저 반이에요.’ 한마디만 했어도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치솟는 원망에 슬쩍 눈을 흘기자, 눈길을 받은 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단장?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다른 걸 부탁해 볼까요?”
“……됐어.”
카델은 치욕스러운 기억을 통째로 씹어 삼키고자 전투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라이돈은 그런 카델을 조롱하듯 간간이 ‘변태’, ‘음흉한 인간’ 등을 속삭이며 성질을 긁어 댔다.
그렇게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꾸역꾸역 식사를 마친 카델은, 배고프다며 칭얼거리는 라이돈에게 간식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시선을 돌린 채 화를 삭이던 그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그런데 루멘은?”
“루멘이요? 음…… 본 기억이 없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니 어디서 뱃멀미나 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직 선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까.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으나, 막상 그가 의도적으로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지막이라도 좋게 장식할 순 없는 걸까.
애꿎은 그릇만 포크로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반이 조심스레 말했다.
“데려올까요?”
“어? 아니, 괜찮아.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데려올게요.”
단호하게 답한 그가 먹던 그릇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카델과 루멘 사이의 기류가 묘해졌다는 것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으나, 알아서 카델을 피해 주니 딱히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하지만 그 때문에 카델이 시무룩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은 카델의 거듭되는 만류를 부드럽게 뿌리치며 기어코 루멘을 찾아 나섰다.
감히 단장의 기분을 가라앉히다니.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
“고상한 귀족 도련님은 밥 대신 바닷바람을 마시나 보지?”
루멘을 찾아낸 곳은 선미의 끄트머리였다. 서늘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빈정거림에, 루멘의 시선이 작게 움직였다.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흑발 아래 자리한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무감했다.
“언제부터 내 식사에 신경을 썼다고.”
“지금도 신경 안 써. 앞으로도 안 쓸 거고.”
루멘의 옆으로 다가간 그가 난간에 손을 올린 채 정면의 바다를 응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장은 꽤 신경을 쓰는 것 같네.”
묘한 짜증이 담긴 말투에 루멘의 눈썹이 움찔했다. 얼핏 드러난 동요는 빠르게 거둬졌으나, 탁했던 눈빛엔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알아서 잘 먹고 있다고 전해.”
“네가 직접 전해라. 구질구질하게 뒤에서 청승이나 떨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반은 대놓고 야유를 퍼부었으나, 루멘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한마디도 지지 않고 꿋꿋하게 얄미운 말을 쏟아 냈을 남자가 묵묵히 제 비난을 듣고 있는 꼴이 재수 없었다. 루멘은 언제나 재수 없었지만, 무게를 잡을 때면 특히나 더 재수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단장 옆에서 떨어질 줄 몰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대놓고 피하는 건 무슨 심보야?”
날카로운 어투에도 루멘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저 너머에 대단한 무언가라도 있다는 듯, 일렁이는 수평선을 묵묵히 응시할 뿐.
원래라면 더 상대하기도 싫어 침묵하는 루멘을 놔두고 돌아갔겠지만. 이번 대화의 주제는 카델이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반이 삐딱한 자세로 난간 앞에 기대섰다. 꼴 보기 싫은 루멘의 옆얼굴을 직시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해. 네놈의 단순한 변덕 때문에 단장의 기분이 상한 거라면, 이대로 바다에 빠뜨려 버릴 거니까.”
“……집요하게 구는군.”
“단장이 관련됐으니까.”
기어코 루멘의 입 밖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그가, 곧 반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이 유난히 정적이었다.
“용병단을 떠날 거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에, 일순 반의 미간에 금이 갔다. 멍하니 루멘을 마주 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심이냐?”
“그래.”
“……왜지? 평생 함께할 것처럼 들러붙더니.”
“그것까진 알 필요 없어.”
반은 난간에 기댔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다시 시선을 돌린 루멘의 단정한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조소를 머금은 채 일갈했다.
“잘됐네. 잘 꺼져라.”
싸늘하게 돌아선 반은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루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린 반이 완전히 사라지자, 갑판 위에는 루멘 혼자만이 남았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살갗을 때렸다. 지그시 난간을 움켜쥔 손등 위로는 퍼런 핏줄이 돋았고, 루멘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