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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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받은 선실에는 작은 원형 창 하나와 딱딱한 침대, 싸구려 술이 놓인 선반이 전부였다.

호화 유람선이 아니니 당연하다. 다닐라는 좀 더 편안한 여행이 가능한 배편을 권했지만, 이 무역선이 미스틱 공국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배편이었기에 거절했다.

‘왕국에 더 머물러서 좋을 것도 없고. 오스마 제국 스토리가 정확히 언제쯤 진행되는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라이돈의 봉인을 풀어둬야 해.’

기사단 승격 퀘스트가 코앞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스토리 순서로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고, 퀘스트의 정확한 발생 시점은 알지 못했다. 답답하지만 감내하기로 했다. 이것이 스킵충의 말로였으니.

거친 물살에 선체가 술렁이자 슬슬 멀미가 났다. 환기를 위해 창을 여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밀려왔다. 바깥에 쌓인 목재 상자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은 감상할 수 없었으나,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카델, 비린내 나.”

하지만 라이돈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만상을 구긴 그가 카델의 품속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진동하는 마족의 악취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놈이 바다 비린내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기분 나쁜 비린내가 나는걸. 카델 몸에서 나는 건 아닌데.”

“당연하지. 이건 바다 냄새야.”

“……응?”

건조한 대답에 일순 라이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충격에 물든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동요하는 그의 모습에, 카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라이돈이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요정이었단 말인가.

한편 라이돈의 입장에서,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비록 [환상의 날개]로 모습을 바꿀 수 없게 되어 몰래 승선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피의 사막’을 찾아갈 것이라는 카델의 계획을 전해 들은 뒤, 라이돈은 용병단의 그 누구보다 설레 했다.

그야, 바다가 아니던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원로들의 대화나 책 속의 그림으로나 몇 번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바다.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무한의 소금물이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언제 바다로 떠나냐며 카델을 독촉하던 그였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다. 분명 꽃보다 산뜻하고 사탕보다 달콤한 향내가 풍길 테지.

그리 상상하며 벅찰 정도로 기대했다. 카델의 로브 속에 몸을 파묻은 채, 짙은 바다 냄새가 흘러들길 기다렸었는데.

“이게…… 이 비리고 짠 냄새가, 바다 냄새라고?”

“뭐, 그렇지. 원래 바닷물은 비리고 짜잖아.”

“……재미없어, 카델. 놀리지 마.”

“내가 뭐 하러?”

진심을 담아 묻자 라이돈의 표정에서 억지스러운 웃음기마저 가셨다. 힘없는 날갯짓으로 카델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그가 이내 인간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가 보면 어쩌냐는 카델의 타박도 깔끔히 무시했다.

거구의 몸을 딱딱한 침대 위에 앉힌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일그러진 눈매와 축 처진 입꼬리가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말도 안 돼.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전이랬어. 그럼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워야 하는 거 아니야?”

재미없어. 기분 나빠. 우울한 중얼거림이 세상의 행복을 모조리 갉아먹을 기세로 선실을 채워 나갔다. 혹여 지나가던 누군가가 우울에 빠진 거대 요정을 볼세라, 급히 창을 닫고 커튼까지 친 카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실망을 해? 직접 바다를 본 것도 아니잖아. 냄새는 이래도 아주 예쁘다고. 햇빛에 비친 물결이 꼭……. 음, 어…쨌든, 예뻐!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카델은 자신의 허접한 묘사력을 한탄하며 라이돈을 위로해 보려 애썼다. 이렇게라도 달래지 않으면 싫증을 느낀 거대 요정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하지만 라이돈은 카델의 애타는 노력에도 굳은 얼굴로 제 발끝을 노려보기만 했다.

“햇빛에 비친 물결을 어떻게 봐? 낮에는 돌아다니지 말라며. 해는 낮에나 뜨는 거 아니야?”

“어……? 그, 그렇지. 하지만! 달빛에 비친 바다도 만만치 않게 예쁘니까! 밤바다 정도는 선원들 피해서 몰래 보러 나올 수 있어.”

“……세계를 보여 준다며, 카델.”

카델이 말한 세계는 여기저기 마족이 침이나 뱉는 어두컴컴하고 비린내 나는 그런 곳이었어?

신랄한 비난에 순간 골이 띵해졌다. 카델은 점점 어두워지기만 하는 라이돈의 안색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뭘 얼마나 기대했길래 비린내 좀 나는 것 가지고 이렇게 우울해해? 어디 천국이라도 상상한 거야?’

자신이 바다를 만든 것도 아닌데, 라이돈의 짙은 실망감에 진땀이 났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선실의 문을 두드렸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홱 돌아간 고개 위로 당혹감이 스쳤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절망한 거대 요정이 침대에 떡 버티고 앉아 꼼짝도 안 하는 때에 손님이 온 것인가. 없는 척이라도 해 보려 숨을 죽였으나,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문을 두드려 댔다.

금세 울상이 된 카델이 라이돈를 붙들었다.

“라이돈, 밖에 사람 왔어. 빨리 숨자, 응?”

“내가 왜 거짓말쟁이의 말을 들어야 해?”

“야, 난 거짓말한 적 없거든? 제발 부탁이야. 어? 빨리 작아져!”

“싫어.”

“고집부리지 마! 여긴 바다 한가운데라 뭘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단 말이야!”

목소리를 낮춰 가며 혼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라이돈은 이미 바다에 대한 실망감을 카델에 대한 배신감으로 연결한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뚱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를 인내하듯 질끈 눈을 감은 카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긴 날숨과 함께 분노와 타협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래. 트럭에 치여서 빙의한 내가 죄인이지.’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의 시선이 라이돈의 곱상한 얼굴에 닿았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 잠시 그 얼굴을 응시하던 카델이 손을 뻗어 라이돈의 턱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단단한 턱을 들어 올리자, 라이돈의 미간이 구겨졌다.

크게 심호흡한 카델이 허리를 숙여 라이돈과 눈을 맞췄다. 코앞까지 다가간 탓에 뺨 위로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카델?”

공기를 가르고 흘러드는 웃음기 없는 건조한 목소리. 비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삼킨 카델이 살짝 고개를 꺾었다. 차마 라이돈과 눈을 맞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애처로울 만치 파르르 떨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려 대는 동공 속으로 라이돈의 매끄러운 입술이 한가득 들어찼다.

‘여성향은…… 여성향은 일단 스킨십을 하면…… 대부분이 해결된다…….’

그러니 라이돈의 비틀린 심기도, 뽀뽀 한 번이면 간단히 풀릴 것이다. 어차피 이리저리 물어뜯기고 먹던 거나 받아먹던 입술이다. 입술끼리 살짝 비비는 것쯤이야. 끄떡없다. 이걸로 바깥 손님에게 거대 요정의 존재를 숨길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아아악! 못 해! 못 한다고!”

좋지 못했다! 부끄러움? 수치심? 어떤 것이든 카델은 그 감정을 이겨 내지 못했다. 먼저 나서서 뽀뽀를 한다니. 직접 고개를 꺾고 라이돈의 입술을 노려서 정확하게 포갠다니?

“너 빨리 안 작아지면 앞으로 평생 디저트 안 사 줄 거야. 챙겨 온 쿠키도 내가 다 처먹을 거야!”

“허! 최악이네, 카델!”

“시끄러! 변해! 당장 변하라고!”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친 카델이 냅다 라이돈의 머리를 두드리며 씩씩거렸다. 난데없는 구타에 거대한 몸을 웅숭그리던 라이돈이 결국 헛웃음을 뱉으며 작은 요정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씨발…….”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작아진 라이돈을 빠르게 낚아챈 카델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아, 단장. 배고프실까 봐 밥 가져왔는데. 혹시 자고 계셨어요?”

한 손에 접시 두 개를 받친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반이었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카델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너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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