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521)

멍청하게 굳은 채로 루멘을 떠나보냈다.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인가? 더 이상 단장인 자신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어서?

덜떨어진 얼굴로 이별의 이유를 짐작하는 것만이 카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마저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영영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날 이후, 루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는 카델의 부탁을 따라 반과 함께 서브 퀘스트를 처리했고, 새벽 늦게야 돌아오거나 아예 바깥에서 날을 새웠다.

「축하드립니다! 서브 퀘스트 ‘그날의 영웅담’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명성이 1 증가하였습니다.」

느지막이 뜨는 시스템 창만이 루멘의 부재를 대신할 뿐이었다.

카델도 카델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매일같이 라이돈을 달래 마력을 주입받은 데다, 이제는 ‘완전 회복’이라는 치유사의 진단이 국왕의 귀에 들어가 알현을 준비해야 했다.

“아, 목욕 시중은 필요 없습니다. 옷도 혼자 입을 테니 두고 가 주시겠어요?”

“그럼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우르르 몰려온 하인들을 돌려보내자, 구석에서 짜증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라이돈이었다. 하인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그가 침대 밑에서 빠져나와서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매번 숨어 다니는 거 지루해. 그냥 이 공간 전체에 환혹술을 걸어 두면 훨씬 편할 텐데.”

“쓸데없이 힘쓰지 말라고 했잖아. 난 이제부터 국왕 만날 준비를 해야 하니까, 넌 바깥에서 돌아다니든가 해. 들키지는 말고.”

“카델의 목욕을 지켜보는 건?”

“보든가 말든가.”

남자가 씻는 거 봐서 뭐 하겠다고. 구시렁거리며 윗옷의 단추를 끄르자, 라이돈이 혀를 내두르며 창가로 날아갔다.

“그게 끝이야? 보여도 상관없어?”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건데.”

“언제부터 이렇게 재미없어진 거야? 실망이네, 카델!”

여느 때와 같은 투정일 뿐이다. 별 의미 없는 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카델은 자신의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비틀리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을 느꼈다. 그 기묘한 감각에 입매가 일그러지며 절로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재미없어서 싫증 나? 이딴 지루한 단장이랑은 한시도 같이 못 있겠어?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이놈이나 저놈이나, 멋대로 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하니까!”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카델이 창가를 향해 벗은 상의를 힘껏 집어 던졌다. 펄럭거리며 날아든 옷가지를 가볍게 피한 라이돈은 ‘이렇게 매력 없는 탈의는 처음’이라며 투덜거리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적막해진 방 안. 한동안 씩씩거리며 창밖을 노려보던 카델이 입을 앙다문 채 바지춤을 움켜쥐었다. 문득 서러운 감정이 찾아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억울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스토리 진행을 위해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부하들의 신임을 얻어 보고자 아등바등 노력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게 없었는데도.

“……짜증 나.”

반이 보고 싶어졌다. 자신이 아무리 한심하게 굴어도, 전혀 단장답지 못해도 언제나 곁을 떠나지 않고 응원해 주던 남자였다. 이 세계에서 눈뜬 순간부터 함께한 동료.

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고, 그저 뜻이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루멘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신이 유일하게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그에게—

‘아니, 가졌다고 할 수 있나?’

결국 반이 옆에 있어 주고자 하는 남자는, 위로해 주고 지지해 주는 남자는 자신이 아닐 텐데. 그는 진짜 카델 라이토스를 원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몰아쳤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고독감이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난.”

일일이 곱씹어 봤자 득도 없는 감정이다. 감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꾹 입술을 깨문 카델이 남은 옷을 모조리 벗어 내곤 준비된 목욕물 안으로 들어갔다.

루멘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유대감이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라도, 이별의 원인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야 했다.

흡, 숨을 멈춘 카델이 따뜻한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이대로 모든 감정이 씻겨 나가기를 바랐다.

⚔️

다닐라 왕이 카델을 부른 곳은 알현실이 아닌 본인의 집무실이었다. 보이는 경호 인원은 두 명으로, 그마저도 전부 출입문 앞에 딱 붙어 있어 카델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닐라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게 맞나? 무릎을 꿇어야 하나? 눈치를 보며 슬쩍 다리를 굽히자, 다닐라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네. 이곳에 자네의 태도를 일일이 품평할 자는 없으니,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되네.”

“아…… 감사합니다.”

쭈뼛대며 몸을 세운 카델이 고개를 들자, 기다란 책상 앞에 앉은 다닐라 왕의 얼굴이 보였다. 외관만 봤을 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으나, 역시 느껴지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상대를 응시하는 눈빛이나 얼굴의 각도, 손짓 하나하나에 여유와 기품이 흘러넘쳤고, 동시에 위엄이 느껴졌다. 위압감과는 달랐다. 그 둘은 차이가 컸다. 위압감은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지만, 위엄은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언제까지 서 있을 셈인가? 앞의 의자는 앉으라고 둔 것이네만.”

다닐라의 가벼운 한마디에도 반사적으로 행동이 경직됐다. 카델은 서둘러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는 상태로 다닐라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으나, 마땅히 피할 방법도 없었다.

‘쫄지 말자. 어차피 똑같은 사람이잖아?’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치는 남자라 한들, 결국 그도 똑같은 사람이다. 눈이 있으니 볼 것이고, 귀가 있으니 듣겠지.

카델은 애써 긴장감을 털어 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짐작이 가는가?”

다닐라는 카델 앞에 놓인 찻잔을 눈짓하며 말했다. 사양 말고 마시라는 뜻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델은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바지 위로 문질렀다.

“바스킨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짐이 그대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그 정도로 인덕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거늘.”

“예……? 아, 아뇨,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보상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태껏 짐이 봐 온 용병들은 언제나 대가를 바랐지.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네. 오히려 당연해. 그러니 괜히 내숭 부리지 말게나.”

사람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다. 카델은 다닐라의 노련한 화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기 바빴다. 앞서 무슨 이야기를 하던, 어차피 그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을 것이다. 카델은 이미 그의 요구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마이뉴 왕국의 루멘 경을 ‘임시 단장’으로서 이끌었다고 들었네만. 아주 성공적이었다지?”

“아…… 네. 뛰어난 검사였죠.”

“처음에는 믿지 않았네. 도미닉 후작이야 이웃 나라인 이곳까지 명성이 자자한 데다, 그의 자식들까지 뛰어난 인재라며 소문이 났으니. 그런 도미닉가의 차남이 용병단을, 그것도 일개 단원의 신분으로 명령을 따랐다는 건 역시 믿기 힘들지 않겠나?”

루멘은 다닐라 왕에게 카델과 본인의 관계는 ‘임시’였을 뿐이라고 설명해 둔 모양이었다.

‘……뭐, 좋네. 일일이 해명하지 않아도 되고.’

애매한 위치에 있던 루멘이 용병단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로써 다닐라 왕의 요구도 좀 더 명확해진 셈이었다.

“가르엘의 세세한 증언이 없었다면, 아마 끝까지 믿지 못했겠지. 루멘 경뿐 아니라 전장의 모두가 자네의 의지를 따라 움직였다니……. 처음 들었을 땐, 그래. 딱 자네의 반대. 반대의 모습을 상상했네. 시원하고 우람한 풍채를 가지고 실로 영웅다운 후광을 두른 채 전장을 호령하는, 그런 사내 말일세.”

“하하…….”

“직접 보니 여러 의미로 상상 이상이군.”

단순히 놀리는 건지,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것뿐인 건지. 둘 중 무엇이라도 카델의 선택지는 ‘어색하게 웃기’가 전부였다.

다닐라는 멋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카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한층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아뇨, 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

“자네가 의무감을 가질 일은 아니었네. 대가를 바랐다 해도 과한 일이었지. 목숨보다 귀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부담스러워 말고 짐의 인사를 받게나.”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에 ‘감사합니다’라니! 짐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겠다는 의미인가?”

“예?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놀란 척 눈을 홉뜨던 다닐라가 이내 짓궂은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자로군! 짐은 순진한 자를 좋아하지. 자, 어떠한가? 분위기도 풀어졌으니, 슬슬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해 보게나.”

“제가 원하는 건.”

“루멘 경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네를 극진히 돌봐 달라고 청했네. 업적에 비해 하찮기 짝이 없는 요구였다만, 가진 게 많은 자이니 겸손으로 넘어갈 수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당연하다. 이렇게 판을 깔아 주는데 원하는 게 없다고 겸손 떨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다닐라는 카델이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말을 끊고 나섰다.

“출신 불명의 용병이 감히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말해 보게. 자네가 해치운 마족은 ‘부식의 악마’였다고 하지. 기록대로라면, 차후 세계에 막대한 해를 끼쳤을 수도 있는 악의 근원이었어. 그러니 무엇을 말해도 과하지 않네.”

“그게, 저는…….”

“작위? 영지? 무엇이든 가능하네. 물론, 짐을 호위하는 정예 기사의 자리도 내어 줄 수 있지.”

올 것이 왔구나. 적어도 이쪽이 원하는 보상 정도는 들어 주고 본론을 꺼낼 줄 알았더니. 그의 숨길 수 없는 흥분과 다급함에, 카델은 전혀 달갑지 않은 다닐라의 인간미를 느껴야 했다.

“분에 겨운 기회를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짐의 정예 기사들은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네. ‘강함’만이 그들을 나누는 척도지. 원한다면 당연히 따로 작위를 내려 줄 생각도 있어.”

“폐하. 제 이름은 카델 라이토스입니다.”

이보다는 더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말하고 싶었건만. 더 놔뒀다간 기사단 입단 날짜를 정하고 있을 것 같았다.

카델은 처음부터 다닐라의 목적이 인재 등용임을 알고 있었다. 귀한 마법사, 심지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오지 마을에 나타난 강력한 마족을 처리해 준 존재이다. 출신도 껄끄러운 것 없는 한낱 용병에 불과하니. 다닐라에게는 카델이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현재에도. 카델은 그들의 욕심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라이토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라이토스 가문은 오스마 제국에서 ‘황족 암살 시도’라는 중죄를 짓고 몰락했습니다. 황제께선 라이토스의 몰살을 바라셨겠지만, 서자인 저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죠. ……도망자 신세입니다. 만약 제국에서 저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폐하께 폐를 끼칠 것이 자명하죠. 그러니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조용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 그뿐입니다, 폐하.”

어디 구석진 영지를 관리하는 만만한 귀족의 핏줄이 아니다. 무려 ‘제국’의 역적. 만약 카델이 한 나라의 국왕을 모시는 기사가 된다면, 느리든 빠르든 황제는 ‘라이토스’의 힘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제국의 이름난 마법 명가였다. 오랫동안 황실을 보좌한 힘인 만큼, 들통나는 것은 더욱 빠르겠지. 화이트 왕국은 7대국 중 하나였으나, 그 힘이 제국에 비할 바는 못됐다.

그는 ‘라이토스’를 감당할 수 없다.

다닐라의 제안이 카델에게 그렇듯, 그에게 있어 카델 역시 버릴 수밖에 없는 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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