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521)

「기사 ‘라이돈’의 호감도가 5 상승했습니다.」

「현재 호감도 : 55/100」

연속으로 떠오른 시스템 창에 카델이 뿌득, 이를 갈았다.

‘……마력만 돌아와 봐. 저 복슬거리는 머리털부터 싹 태워 줄 테니까.’

기필코 저 낯짝에서 웃음기를 거둬 가리라. 다짐하는 눈빛이 흉흉했다.

⚔️

라이돈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카델은 다시 환혹술의 힘을 빌어 안전하게 왕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서브 퀘스트 ‘불편한 다리’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명성이 2 증가하였습니다.」

서브 퀘스트 또한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경쾌한 알림과 함께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카델이 작게 몸을 떨었다.

“라이돈, 나 너무 추운데…….”

“응? 안아 줄까?”

“아니, 그냥 마력 좀 천천히 넣어 줘.”

하인들이 준비한 식사와 치유사의 검진을 끝으로, 더 이상의 방문은 없으리라 판단한 카델은 곧장 작업을 개시했다.

마력 주입. 원리만큼이나 마력 주입의 과정은 간단했다. 카델이 침대 위에 정좌를 틀고 얌전히 앉아 있으면, 라이돈이 등 위에 손을 올린 채 본인의 마력을 흘려 넣는다. 그게 전부였다.

불편한 점이라면 라이돈의 마력 속성이 ‘얼음’이라, 작업이 길어질수록 느껴지는 추위의 강도도 세진다는 것이었다.

‘불 속성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불 속성이었다면 속부터 차근차근 익어 갔을지도 모른다. 카델은 코를 훌쩍이며 등을 곧게 폈다.

“이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 다 끝나면 따뜻하게 안아 줄게.”

“필요 없다니까.”

퉁명스럽게 말하자 라이돈이 즐겁게 웃었다. ‘충격의 사탕 사건’ 이후, 작은 스킨십이라도 진저리를 치며 경계하는 카델의 모습이 그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순조로운 작업의 끝이 보일 무렵. 누군가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하녀인가?’

필요한 건 없으니 아침까지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라이돈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진 카델이 몸을 일으키자,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들어가도 돼?”

루멘이었다. 안도한 카델이 곧장 걸음을 옮겨 문을 열자, 평소보다 배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루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감색 셔츠와 자연스럽게 넘긴 흑발이 루멘 특유의 무심한 표정과 어우러져, 금욕적인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저도 모르게 루멘을 위아래로 훑어본 카델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잘생겼어. 어디 무도회라도 가?”

“바빠 죽겠는데 무도회는 무슨.”

문을 마저 밀고 들어선 루멘이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닐라 폐하를 뵙고 왔어. 종일 돌아다니다 드디어 쉴 수 있나 했더니, 대장의 상태가 어지간히 궁금하신가 보더군.”

“내 상태……?”

“아직 더 휴식이 필요할 거라고 해 두긴 했지만, 치유사들이 선수를 친 모양이야.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을 거라고. 그러니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걸.”

카델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한 건데. 역시 치유사들을 속이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변명거리 생각해 둬야겠네.’

그는 다른 어디도 아닌 ‘오스마 제국’에서 적린 용병단을 기사단으로 승격시켜야 했다. 그것이 스토리였으니까. 그 전에 타국의 세력으로 흡수된다면, 스토리가 어떻게 꼬일지 몰랐다.

‘스트라 자작 때와는 달라. 무턱대고 도망칠 수도 없으니,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 내야 할 텐데.’

무려 국왕이다. 억지로라도 카델을 잡아 두겠다고 나선다면, 피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계의 근간은 신분제였고, 몰락 귀족 출신의 용병과 국왕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하……. 머리 좀 그만 굴리고 살고 싶은데.’

빙의자의 삶이란 참으로 고달픈 것이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린 카델이 뒤를 돌았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정도는 미룰 수 있겠지. 라이돈, 이제 마무리를…….”

오늘 치 마력 주입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이돈이 있어야 할 침대 위에는, 구겨진 이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라이돈?”

노크 소리 때문에 변신했나? 작은 요정을 찾아 이불과 베개 아래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라이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카델이 망연히 서 있자, 루멘이 창가를 가리켰다.

“저기 열려 있는데. 나간 거 아니야?”

“뭐? 어느 틈에?”

커튼까지 쳐 두었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정말 탈출한 모양이었다. 물론 모두가 잠든 밤이라면 요정의 모습으로 산책 정도는 나가도 된다고 하긴 했다만…….

“하던 건 마저 끝내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완전히 제멋대로인 요정이었다. 돌아오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리라. 허탈해진 그가 들고 있던 베개를 던지듯 내려놓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자연스럽게 방 안엔 루멘과 카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

보통 둘이 있을 땐 카델이 뭔가를 행동하고, 루멘이 그를 놀리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가끔 짜증스럽기는 해도 어색함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 사이에 묘하게 어색하고 무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날 이후로 둘이서만 얘기할 시간이 없었네.’

그날, 자신은 루멘의 신뢰를 저버렸고, 루멘은 크게 실망했다. 엉킨 마음을 풀어 볼 새도 없이 싸움이 계속됐고, 그 후로도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통에 마땅히 시간을 내지 못했다. 깨어난 이후로는 회복하기 바빠 미루던 게, 드디어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뭐라도 말…해야겠지?’

루멘에게 ‘임시’라는 구속을 달아 그를 떠나지도, 함께하지도 못할 애매한 상태로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루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를 일회성 도구로 생각하고 있진 않다는 걸 좀 더 확실하게 전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카델이 적당한 말을 고르는 것보다 루멘이 입을 여는 쪽이 더 빨랐다.

“반은 마을 주민들이 모인 보호소에 머물겠다고 하더군. 대장이 왕성에서 볼일을 전부 마칠 때까진 거기 있을 생각인가 봐.”

“반이? 일이 많은가…….”

“글쎄. 단순히 왕성에 묵는 게 싫은 걸 수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귀족 혐오증에 걸린 남자이니, 왕성에서 숨 쉰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을지도.

‘반도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텐데.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왕성이 싫다면 좋은 여관이라도 찾아 그곳에 묵게 해야 했다. 카델은 또 한 번 라이돈을 이용해 왕성을 몰래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루멘은, 그런 카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시선 위로 어둡고 괴로운 감정들이 한 차례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대장.”

“응?”

완전히 긴장을 푼 유순한 얼굴이 루멘을 향했다. 마주친 시선 사이로 결이 다른 몇 가지 감정들이 오갔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충동을 억누르듯, 짧게 숨을 들이켠 루멘이 말했다.

“마력을 되찾은 뒤엔 뭘 할 생각이야? 계속 화이트 왕국에 머무를 건가?”

“아니. 여기에 더 볼일은 없어. 미스틱 공국으로 갈 거야. 거기에 라이돈의 봉인을 풀 수단이 있거든.”

“……그렇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루멘이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처럼 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카델은 그에게서 무언가 좋지 못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러나 왜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지, 그것이 혹시 자신 때문인지 물을 새도 없이.

“그럼 거기까지 함께하도록 하지.”

“……응?”

“라이돈이 제 실력을 되찾는다면 더 이상 내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그러니…… 거길 마지막으로, 난 용병단을 나가겠어.”

루멘은 끝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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