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521)

‘이야, 이게 되네? 진작 시도해볼걸.’

미리 알았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가벼운 아쉬움을 넘긴 후에는, 루멘을 찾았다.

“반을 도와서 마을 주민을 보살펴 달라고?”

“지금 내 상태론 직접 나서기가 힘들어서 그래. 도와줄래? 물론 네가 내 부탁을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니야. 거절해도 이해해. 난 이미 네 신뢰도 저버렸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

“됐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루멘은 정식 단원이 아니니 퀘스트를 활성화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브 퀘스트를 반에게 몽땅 떠넘기는 것도 미안하니, 이런 식으로 루멘을 활용하기로 했다.

‘코스트 올리기 전까진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아야겠어. 미안하다, 루멘. 나중에 꼭 갚을게.’

그렇게 루멘과 반을 떠나보낸 뒤.

카델은 치유사를 피해 작은 요정으로 변해 있던 라이돈을 찾았다. 그는 탁자 위 화병 뒤에 쭈그려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라이돈, 이제 다 됐어. 슬슬 갈까?”

로브의 후드를 쓰고 있는 카델을 발견한 라이돈이 곧장 그의 품 안으로 날아들었다.

“무리하는 것 같으면 저번처럼 계속 유지하지 말고 바로 환혹술을 해제해.”

“흐응, 고작 인간한테 거는 환혹술 따위로 무리할 리 없잖아?”

“어쨌든!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니까, 눈 조심하라는 얘기야.”

대충 고개를 끄덕인 라이돈의 눈동자 위로 선명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를 확인한 카델이 조심조심 창틀을 넘었다.

⚔️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왕실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탈출한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노점과 식당이 즐비한 시가지였다.

“레몬주스 하나랑 아몬드 초콜릿 한 봉지, 아, 이건 딸기 타르트인가요? 이것도 하나 주세요. 그리고…… 응? 알겠어. 저기, 아몬드 초콜릿 한 봉지만 더 주세요!”

카델은 빵빵하게 채워진 종이봉투를 양손 가득 끌어안은 채 인파로 가득한 거리를 누볐다. 봉투 안에 든 것은 전부 주전부리로, 하나부터 열까지 라이돈의 의사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과연 다 먹을 수 있기는 한지 의심이 가는 양이었으나. 이것으로 라이돈을 구슬릴 수만 있다면야.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있다고 해도 들고 갈 순 없을 것 같지만.”

“카델은 너무 작아. 벌써 이렇게 가득 차다니, 품이 비좁잖아.”

“비좁은 품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뭐어, 됐어. 이제 먹고 싶으니까 적당한 곳을 찾아 줘.”

조그만 게 상전이 따로 없었다. 카델은 속으로나마 툴툴거리며 사람이 없을 법한 곳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낡은 시계탑 위였다. 시가지 중심에 번듯한 시계탑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부수지 못해 방치 중인 건물인 듯했다. 인적이 드문 데다 돌아다니는 사람을 신경 쓰는 분위기도 아니다. 잠시 몸을 숨기기에 적합해 보였다.

정직하게 계단을 밟아 가며 꼭대기까지 올라간 카델이 종이봉투를 던지듯 내려 두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허억, 심장, 터질 것, 같아…….”

안 그래도 약해진 몸인데, 짐까지 짊어지고 몇 층인지 가늠도 안 되는 탑을 걸어 올랐다. 그의 저질 체력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라이돈은 괴로워하는 카델의 로브 밖으로 빠져나와 곧장 인간형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하! 카델 심장 소리 엄청나게 크던데! 폭발하는 줄 알았더니, 인간은 의외로 튼튼하구나.”

“그게 할 소리냐? 됐다, 됐어. 보는 사람 없을 때 빨리 먹기나 해.”

카델은 벽면에 자리한 아치형의 창문을 열고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몇 차례 호흡하자, 찢어질 것 같던 고통도 잠잠해졌다.

‘그나저나, 고작 새로운 음식을 마음껏 먹어 보는 게 조건이라니. ……좀 허탈하네.’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겠다 제안했을 때, 카델은 나름의 결심을 마친 상태였다.

‘여성향 게임이잖아? 좀 더 불순한…… 그런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잠시나마 긴장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게임 정체성에 익숙해지긴 한 모양이지. 조금 더디게 적응해도 괜찮은데.

카델은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라이돈이 잘 먹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앉아 있으리라 여겼던 라이돈은, 어느샌가 카델의 바로 옆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깜짝이―”

그리고 카델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 아무런 전조도 없이, 둘의 입술이 포개졌다.

마른 입술 위로 매끄럽고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꾹 짓누르는 힘에 반사적으로 물러서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었다. 황당함과 충격만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라 있을 뿐.

곧 정체불명의 둥그런 무언가가 굳은 잇새를 억지로 벌리며 들어섰다. 힘을 주어 반항해 보았으나, 억센 손끝이 양 뺨을 파고들며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못 한 채. 무방비한 혓바닥 위로 진득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입 안을 가득 메운 달콤한 향기. 사탕이었다. 뒤늦게 이 발칙한 불청객의 정체를 밝혀낸 카델의 뺨이 짧게 경련했다.

“맛있지?”

목적을 달성한 라이돈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음욕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천진한 얼굴이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꼭 값비싼 조각품을 보는 것 같았다. 창 너머로 뿌려지는 빛줄기는 새하얀 피부를 눈부시게 밝혔고, 붉은 눈동자는 세공된 보석처럼 단정하게 반짝였다. 빈틈없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여과 없이 빛을 발하는 라이돈의 앞에서. 카델은 멍한 얼굴로 꿀꺽, 사탕을 삼켰다.

“으응? 삼켰어?”

“너…… 컥, 너 지금 뭐 한…….”

알사탕을 통째로 삼켜 버린 목구멍이 쓰라렸다. 카델은 욱신거리는 목을 움켜쥔 채 말을 더듬었고, 라이돈은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다 보니까 맛있어서, 좀 나눠 줬어. 왜?”

“왜냐니……. 누가 맛있다고 자기가 먹고 있던 걸, 그것도 입으로 넘겨주냐? 미쳤어?”

“안 돼? 왜?”

“자꾸 왜냐고 묻지 마! 당연히 안 되지!”

“왜지…….”

여성향 게임답지 않은 순탄한 흐름이라며 안심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이렇게 대뜸 남의 타액이 묻은 사탕을 받아먹게 될 줄이야.

‘한 놈은 입술을 물어뜯질 않나. 한 놈은 사탕…사탕 키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주먹으로 시계탑을 전부 부숴 바깥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아니지, 이게 무슨 키스야. 학교 다닐 때도 종종 있었잖아, 빨던 막대 사탕 아무렇지도 않게 나눠 먹는 애들. 딱 그런 거지.’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문 카델이 라이돈을 노려보았다. 라이돈은 화를 내는 카델을 아예 무시하기로 했는지, 새로운 타르트를 꺼내 한 입 베어 무는 중이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다신 입 안에 있는 거 넘겨주지 마. 네가 먹던 걸 권하지도 말고!”

“다른 인간들은 잘만 나눠 먹던데.”

“대체 어떤 인간이? 나눠 먹었다고 해도 그냥 한 입씩 베어 먹은 거겠지.”

“사탕은 한 입씩 베어 먹을 수 없잖아.”

“그럼 그냥 주지 마! 안 먹어도 돼!”

라이돈은 되레 카델 쪽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별걸 다 따진다는 듯.

상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아니면, 혹시 요정족은 원래 다 이런가? 남이 먹던 걸 받아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그런 의문이 들다가도, 멜피스의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리면 단순히 문화의 차이는 아니지 않나 싶은 것이다.

갑갑해진 가슴을 퍽퍽 두들기는 카델의 앞에서, 라이돈은 어울리지 않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너무 깐깐하잖아, 카델. 혀를 넣은 것도 아닌데.”

“넣었으면 넌 이미 죽었어.”

“날 죽여? 조그맣고 마력도 없는 카델이?”

“야! 먹지 마. 먹지 마, 그거! 내놔!”

몸뚱이가 커지니 귀여운 맛도 사라졌다. 라이돈은 타르트를 뺏으려 드는 카델을 피해 살짝 몸을 물리고는, 얄미우리만치 샐샐 눈웃음을 쳤다.

“먹고 싶으면 말해. 나눠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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