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객실 안엔 카델과 반, 본래 크기로 돌아온 라이돈과 루멘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 사이로 진지한 목소리가 오갔다.
“가르엘 경이 알려 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겠군.”
“단장, 걱정 마세요. 마력은 꼭 돌아올 거예요. 문제는 마력을 불어 넣어 줄 마법사를 어디서 찾느냐인데…….”
루멘과 반은 하루빨리 카델의 마력을 되찾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고민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그런 부하들을 번갈아 보던 카델은, 자신의 뒤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거대한 요정 하나를 가리켰다.
“마법사라면 여기 있잖아.”
“……라이돈이요?”
“라이돈의 능력은 봉인당했다며. 마력이 부족하지 않겠어?”
비록 라이돈이 절반의 능력을 봉인당했다지만, 그건 ‘압도적인 천재’에서 ‘아쉬운 범재’ 정도로 내려간 수준이었다.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라이돈은 다양하고도 강력한 마법을 구사했고,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체내의 마력관을 채우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라이돈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방탕한 자세로 드러누운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델을 응시하고 있었다.
“라이돈, 해 줄 수 있지? 내 마력이 돌아올 때까지만 네 마력을 불어 넣어 주면 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딱히 손해 볼 것도 없다. 그저 약간의 신경만 써 주면 되는 문제였다. 때문에 카델은 라이돈이 별 고민 없이 부탁을 들어주리라 여겼지만.
“내가 왜?”
라이돈은 정말 그럴 이유가 하등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명한 적안에 악의 없는 의문이 감돌았다. 당황한 쪽은 되레 카델이었다.
“왜냐니……. 같은 용병단이잖아? 도움이 필요할 땐 서로 도와줘야지!”
“흐응, 싸움이라면 몰라도 그런 건 흥미 없어. 게다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카델이라니, 재미도 없잖아.”
참으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카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고, 그를 대신해 격분한 반과 루멘이 ‘저딴 쓰레기는 당장 폐기 처분하자’거나 ‘싹수부터 배은망덕했던 빌어먹을 요정놈’이라며 라이돈을 비난했으나. 그들의 분노 역시 라이돈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설마 라이돈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곤란하다고. 여기서 다른 마법사를 구하면 무조건 화이트 왕국에 발이 묶이게 된단 말이야.’
게다가 라이돈의 태도도 문제였다. 카델이 재기 불능이라는 판단이 서는 즉시 호기심을 채워 줄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떠나 버릴 기세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팔자에도 없는 보호자 노릇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배신감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아니야. 진정하자. 라이돈이 재미에 미친 놈인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쟨 미친 만큼 단순한 놈이라고.’
다른 마법사를 구인하면 앞으로의 계획이 크게 틀어진다. 한번 틀어진 노선은 계속해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고를 것이고, 스토리 진행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바로 옆에 쓸 만한 마법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런 일을 두고 볼 순 없다.
‘구슬려 보는 수밖에.’
비장하게 눈을 빛낸 카델이 루멘과 반을 돌아보았다.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주겠어? 라이돈이랑 따로 얘기하고 싶은데.”
“단장, 단장의 힘만으론 저 쓰레기를 죽이기 어려워요. 제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굳이 설득할 필요 없어. 마법사는 내가 구해 오면 돼. 겸사겸사 요정을 묻을 자리도 알아보지.”
아무래도 저 둘은 라이돈이 부탁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마뜩잖은 듯했다. 거절당한 당사자보다 화를 내고 있으니. 카델은 단단히 뿔이 난 두 남자를 다독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라이돈은 죽이지 않을 거고, 벌써 다른 마법사를 찾는 건 일러. 나 방금 깨어나서 화낼 힘도 없으니까, 가라고 할 때 얌전히 가자?”
그들에게도 환자를 향한 배려심은 있었다. 결국 카델의 의사를 존중한 루멘과 반이 꾸역꾸역 방을 나서고. 조용해진 방 안에는 카델과 라이돈, 둘만이 남았다.
라이돈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카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델은 그 곧은 시선을 마주한 채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자, 이제 여긴 우리 둘뿐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마음껏 말해 봐.”
“원하는 거?”
“네가 나한테 마력을 불어 넣는 조건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줄게. 일종의 거래지.”
흐음. 건조하게 굴러가는 붉은 눈동자가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는 커튼과 너머의 풍경을 응시했다. 딱히 원하는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 내가 재미없어지면 제일 괴로워지는 건 너잖아? 심심한 걸 그렇게 못 버텨 하면서. 네가 여기서 나만큼 재밌는 인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급한 마음을 숨긴 채 차분히 말을 잇자, 라이돈의 시선이 다시금 카델을 향했다. 흐트러진 금발 아래 자리한 오묘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느긋하게 훑어내렸다.
한참을 멈춰 있던 라이돈은 불시에 카델의 손목을 낚아챘다. 침대에 앉아 있던 카델의 무게 중심이 한순간에 기울어지며 상체가 무너졌다.
버텨 볼 새도 없이 쓰러진 카델이 그대로 라이돈의 가슴팍에 얼굴을 처박았다. 둔탁한 통증에 순간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듯했다.
“갑자기 뭐야!”
“정말 뭐든지 들어줄 거야?”
단단한 가슴에 짓눌린 코를 붙들며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냥한 얼굴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시력이 상승할 것만 같은 화사한 미모였으나, 그를 향한 시선엔 오로지 흥미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카델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자, 올라간 입꼬리가 애교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무르기 없어, 카델. 이건 약속이니까.”
⚔️
카델은 메인 퀘스트를 완료한 뒤, 화이트 왕국에서 발생하는 서브 퀘스트를 통해 더 많은 명성을 모을 계획이었다. 곧 있을 기사단 승격 퀘스트를 위해.
하지만 마력을 상실한 몸으로 서브 퀘스트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명성을 포기해야 하느냐? 말도 안 된다.
카델은 어떻게 해서라도 명성을 긁어모을 생각이었고, 마침내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냈다.
“바스킨 마을 주민들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요?”
“부탁해, 반. 내가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바람에 집도 농지도 전부 사라져 버렸잖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어. 응?”
“아무도 단장을 탓하진 않을 텐데요…….”
“필요한 게 있는지만 알아봐 줘.”
“알겠어요, 단장. 그럼 그동안 푹 쉬어 두세요.”
부하들을 이용한 퀘스트 대리 진행.
메인 퀘스트라면 몰라도, 서브 퀘스트의 발생 정도는 단원을 통한 활성화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확인을 위해 카델은 반을 보냈다.
사실 퀘스트 수락 자체는 카델이 직접 해 두는 쪽이 더 확실하고 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멀쩡히 돌아다닐 만큼 회복됐다는 걸 들키면 국왕을 만나게 될 거야. 그건 최대한 미루고 싶다고.’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치유사 앞에서 기력 없는 환자 행세를 하며 국왕 알현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런 처지이니 서브 퀘스트를 직접 찾으러 다니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시스템 창은, 카델의 바람대로 떠올라 주었다.
「기사 ‘반 헤르도스’가 서브 퀘스트 ‘불편한 다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수락 시 퀘스트가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