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의 정체는 가르엘이었다. 라이돈은 문틈으로 드러난 가르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몸집을 줄여 이불 속에 파묻혔다.
“이런,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본데요.”
방 안으로 들어선 그가 곤란한 척 눈썹을 늘어뜨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카델과 그를 끌어안듯 감싼 루멘.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가르엘의 뒤편에 있던 남자에게는 짜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단장!”
손님은 한 명이 아니었다. 가르엘의 뒤에 있던 반이 그의 어깨를 밀치며 카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루멘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반의 흉흉한 옆모습을 일별하며, 가르엘이 침실의 문을 닫았다.
“깨어나자마자 카델 경은 어딨냐며 난동을 피웠다기에 데려왔습니다. 기껏 좋은 일을 해줬는데, 용병단의 이미지가 실추되면 곤란하잖아요?”
반은 좀 전의 험악한 표정을 완전히 지운 채 쭈그려 앉은 카델과 눈을 맞췄다.
가르엘을 따라 카델의 침실로 향하던 중, 자신이 의식을 잃은 나흘 동안 카델 역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고작 의식 하나를 잡지 못해 카델을 홀로 두었다는 사실이 한스러웠다.
“단장, 몸은 괜찮아요? 불편한 곳은요? 너무 야위었잖아요……. 식사는 아직이에요?”
카델의 손목을 움켜쥔 그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상태를 물었다. 원래도 턱없이 가늘어 힘주어 잡는 것조차 겁이 나는―적어도 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손목인데, 오늘따라 유독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당장 무언가를 잔뜩 먹이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카델은 반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받아 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푹 쉬었더니 개운해졌어. 그나저나, 깨어나자마자 날 찾았다니. 너도 방금 일어난 거야? 하긴 무리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후유증 같은 건? 없어?”
“전 멀쩡해요. 쓸데없이 너무 많이 잤죠.”
속상함이 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전장에서 그렇게나 활약해 놓고는,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걸까. 하여간 욕심 많은 녀석이었다.
카델은 부하들이 전부 무사하다는 데에 안심하며 몸을 일으켰고, 루멘이 그를 부축했다. 반 또한 반사적으로 카델의 반대쪽 팔을 잡아챘다.
“좀 떨어져. 대장이 움직이기 불편하잖아.”
“네놈이 할 소리냐? 단장은 내가 부축할 테니까, 넌 저기 가서 귀족들이나 상대하라고.”
“네가 팔자 좋게 늘어져 자는 동안 충분히 상대했으니 걱정 말지.”
예상대로 둘은 만나자마자 옳다구나 하며 싸워 댔다. 익숙한 래퍼토리였다. 카델은 양쪽에서 시끄럽게 쏘아 대는 목소리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채 문 위에 기대 선 가르엘이 있었다. 이쪽을 훑어내리는 시선이 흥미로 가득했다. 카델과 눈이 마주친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카델은 자연스럽게 반과 루멘의 사이에서 벗어났다. 그가 사라졌음에도 서로를 비꼬기 바쁜 것이, 어지간히 반가운 듯했다.
“가르엘 경.”
한숨과 함께 가르엘의 앞으로 다가가자, 시원스럽게 뻗은 가르엘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고맙습니다. 제가 쓰러져 있던 동안 숙소도 알아봐 주시고 치료도 도맡아 주신 듯한데…….”
“음, 둘 다 틀렸는데요?”
“네?”
“일단 이곳은 국왕 폐하께서 용병단이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묵으라고 내어 주신 왕실 별채의 객실입니다.”
“왕, 왕실 별채요?”
“치료도 전부 왕실 소속 치유사들이 힘써 줬고요. 그러니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폐하께 용병단의 공적을 빠짐없이 전달한 저의 청렴함을 칭찬해 주세요.”
왕실 별채라니. 평범한 여관이라기엔 과하게 고풍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설마 왕실 소유의 저택이었을 줄이야.
순식간에 태도가 뻣뻣해졌다. 참으로 정직한 카델의 반응에 가르엘이 웃음을 참으며 뒷머리를 문에 기댔다. 한참 씰룩거리는 입가를 매만지던 그가 뒤늦게 눈을 굴려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제일 먼저 깨어난 루멘 경이 폐하를 뵙기는 했지만, 폐하는 카델 경과의 대화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컨디션을 되찾는 대로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저, 저랑요? 저랑 대화를?”
“그럼요. 그 ‘황혼 기사단’마저 어쩌지 못한 마족을 살해한 장본인이잖아요? 온 왕실이 떠들썩했답니다.”
카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용병단의 활약이 널리 알려진 것은 분명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왕과의 대면이라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데.’
마이뉴 왕국의 스트라 자작.
카델의 능력을 탐냈던 그는 골칫거리를 없애 준 마법사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본능적으로, 카델은 화이트 왕국의 국왕 또한 비슷한 욕심을 가졌으리라 직감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갓 떠오르고 있는 신성 세력이었다. 타국의 귀족인 루멘 도미닉이 포함되어 있으니―아직 정식 단원은 아니지만― 용병단 전체를 끌어들이기는 어려울지라도, 카델 하나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표정이 안 좋은데. 긴장돼요?”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하죠. 국왕 폐하잖아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신경 쓸 곳과 안 써도 될 곳 정도는 구분합니다.”
격한 전투를 치르고 깨어나자마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막막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던 카델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르엘 경.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걱정 마세요. 자다 깬 얼굴도 충분히 귀여우니까.”
“……경은 본인의 재능에 감사하십쇼.”
뛰어난 능력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갖다 버릴 기사였다. 가르엘은 카델의 떨떠름한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능글맞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건?”
“절 치유해 주셨을 때 말입니다.”
카델의 시선이 반과 루멘이 있는 쪽을 가볍게 훑었다. 여전히 말싸움에 한창인 둘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가르엘은 자신의 어깨를 꾹 누르는 손길에 카델이 귓속말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기꺼이 허리를 숙여 주었다.
“제 안에, 마력이 느껴졌습니까?”
살짝 고개를 돌리자, 욕망 하나 없는 진지하고도 맑은 눈빛이 닿아 왔다. 가르엘은 채 반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웬일로 물러섬이 없는 긴 눈맞춤이었다. 그에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린 가르엘이 카델의 귓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델 경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야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뭔, 미쳤— 아니, 돌았습니까?”
“흐음, 여기서 카델 경에게 단단히 돌았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나요?”
“경의 머리가 한 바퀴 돌아가게 될 겁니다.”
“이런, 그럼 참을게요.”
예고 없는 수작질에 놀라 고마웠던 마음마저 달아날 뻔했다. 카델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물렸다. 가르엘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상한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 주시죠.”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반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용병단 전원이 무사히 모인 자리에서 분위기를 초상집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혹시 자신을 치유해 주었던 가르엘이라면 몸의 이상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물었던 것인데. 뛰어난 성능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주먹을 내다꽂았을 것이다.
가르엘은 카델의 까칠한 표정을 일말의 타격도 없이 즐겁게 감상하다, 느긋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치유술은 보통의 마법과 다릅니다. 외상이나 내상 같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상처를 찾아내 되돌리거나, 해로운 기운을 정화하는 일종의 복원 기술이죠. 그러니 상대의 마력이 역류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감지하지 못해요.”
“……그렇군요.”
카델은 애써 실망한 기색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 희망의 끈을 놓는 것은 일렀다. 다만, 대체 무슨 수를 써야 마력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겁이 나긴 했다.
그리고 가르엘은, 카델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카델 경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거죠?”
“……어떻게 알았어요?”
“수많은 전장을 누비다 보면, 다양한 무인과 법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개중에선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 쓰다 불상사를 당한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죠.”
쭉 뻗은 검지가 카델의 가슴께를 지그시 압박했다. 미미한 통각이 직선을 그리며 상체를 가로지르고. 복부를 훑듯이 내려간 하얀 손끝이 배꼽 바로 위까지 다다랐다.
의미 모를 행동에 긴장한 듯, 주춤거리며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가르엘은 불안하게 떨리는 카델의 긴 속눈썹을 진득하게 응시하다, 천천히 손끝을 떼어 냈다.
“제가 봐 온 바로는, 확률은 반반이었습니다. 영영 마력을 되찾지 못하거나, 빈 몸에 새로운 마력이 들어차거나.”
“……새로운 마력을 얻은 사람은,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거죠?”
“몸속의 ‘마력관’이 마르지 않도록 관리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타인의 마력이 체내를 순환하도록 유도한 거죠.”
타인의 마력으로 체내의 ‘마력관’을 관리한다. 카델은 무의식적으로 가르엘의 손이 닿았던 배를 문지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 한 방울도 없으니, 방치된 마력관은 바싹 말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건가.’
자신의 ‘마력관’ 또한 실시간으로 말라가고 있을 것이다. 언제 제 기능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뭐, 도움을 드리고는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성기사라서요. 타인의 마력관을 꽉 채울 만큼의 마력은 뽑아내지 못합니다.”
가르엘이 부러 강조하듯 말했다. 그는 단순한 성기사가 아니다. ‘마기’를 사용한다면 카델의 몸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마력을 운용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가르엘도 카델도 원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필요하다면 적당한 마법사를 소개해 드릴 수는 있어요. 문제는 언제까지 마력관을 관리해야 하는지, 기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건데……. 그동안 행동이 꽤 제한될 겁니다.”
“……아뇨. 그 건은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가르엘 경. 덕분에 마력관이 말라비틀어지는 비극은 피할 수 있겠어요.”
“항상 말로만 고마워하는군요. 이건 좀 서운한데.”
질타의 느낌은 없는 가벼운 어투였으나, 카델은 곧장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정도가 어떻든 가르엘은 몇 번이고 카델에게 도움을 줬고, 목숨까지 구해 줬다. 하지만 여태 이렇다 할 보답 하나 해 주지 못했으니.
멋쩍어진 카델이 괜히 뒷목만 쓸어내리자, 가르엘의 눈빛이 은근해졌다. 쭈뼛거리는 카델의 작은 얼굴을 요목조목 살피는 집요한 시선에 이채가 감돌았다.
“진심으로 고맙다면, 오늘 밤 단둘이―”
하지만 그가 까만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기도 전. 어느새 다툼을 끝낸 루멘과 반이 둘 사이를 가르며 등장했다.
가르엘의 어깨를 잡아챈 루멘의 얼굴엔 미미한 짜증이 섞인 형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더 볼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지금부터 용병단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호의라곤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두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가르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 됐군요. 그럼,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찾아오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카델과 눈을 맞춘 그가 밖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단끼리 할 얘기라면 너도 나가라’ 따위의 실속 없는 견제들이었다.
“다들 참 사이가 좋단 말이지.”
돈독한 부하들이 있어 든든하겠군. 작게 중얼거린 가르엘이 휘파람을 불며 복도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