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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1초 남았었어.’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카델은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육체와 혼의 결속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시간 00분 01초」
그가 마지막으로 본 시스템 창이었다.
카델은 그 새까만 무의 공간 속에서, 목이 찢어져라 가르엘을 부르짖었다. 그가 아는 한, 현재 시스템이 말하는 ‘외부의 개입’이 가능한 인물은 가르엘뿐이었으니까.
육체와 혼의 결속이 종료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가 제때 와 주지 않으면, 자신은 죽는다.
그리고 죽기 1초 전에 간신히 눈을 떴다.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눈을 뜬 것이다.
시야 가득 들어찬 새파란 하늘을 보며 느낀 안도감과 환희는 말로 표현할 것이 못 됐다.
“생각보다…… 격하게 일어나네요?”
자신을 살려 낸 인물에 대한 애정 또한.
“가르엘 경, 역시 당신이란 사람은……! 이리 오세요! 안아 드릴 테니까!”
“음…… 아직 정신이 덜 돌아왔나?”
카델은 생존의 흥분에 취해 있었고, 눈앞의 가르엘이 본인의 예상보다 훨씬 저질스러웠다는 기억을 저 멀찍이 밀어 두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몇 번이고 카델을 궁지에서 구해 낸, 가장 사랑하는 기사일 뿐이었다.
카델은 재빨리 품에 안기지 않는 가르엘이 답답하다는 듯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의 단단한 팔에 무게를 실어 상체를 일으키곤, 단숨에 가르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건 안아 준다기보다 안기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 가르엘은 버릇처럼 카델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냉랭하게 거리를 두던 남자였다. 어지간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했더니. 죽다 살아난 것이 미친 듯이 기쁜 모양이었다.
카델은 가르엘의 머리칼을 헝클이며 속으로나마 미친 듯이 주접을 떨어 댔다. 정말 사람이 너무 예쁘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첫 만남의 끔찍한 음담패설은 잊은 지 오래였다. 당장 영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울 뿐.
“하하…… 적극적인 태도도 취향이긴 한데 말이죠. 너무 움직이면 몸에 무리가 갈걸요?”
“맞아요, 맞아. 경의 말이 다 옳아요.”
지금은 가르엘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그저 사랑스러웠다. 다 죽어 가던 파티를 살려 기어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던, 0티어 S급 기사 가르엘 몬자시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역시 성능이 최고야. 사랑한다, 가르엘.’
그의 치유술을 믿지 못했다면 [폭혼]의 사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런 보험 없이 목숨을 내던지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가르엘이 있었기에 에르고를 소멸시킬 수 있었고,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델 경의 열렬한 감사는 저도 꽤 마음에 들지만요.”
떨어질 줄 모르는 카델의 긴 포옹이 나쁘지 않았는지, 작게 웃은 가르엘이 그대로 카델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 없이 붕 뜬 몸에 놀란 카델이 가르엘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가르엘은 카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자신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게 하고는, 근처에 풀어놓은 백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경의 치료를 위해 뒷전으로 미뤄 둔 일들이 있어서요. 슬슬 찾으러 가야 합니다.”
“미뤄 둔 일이라뇨?”
“폭발의 충격을 막지 못했습니다. 장막이 깨졌고, 기사단과 용병단은 의식을 잃었죠.”
“네……?”
살아난 기쁨에 취해 미처 묻지 못했으나, 그래도 당연히 무사하리라 생각했다. 당황한 카델이 가르엘을 마주 보고자 몸을 뒤로 물렸으나,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등을 지그시 눌러 원래 자세로 되돌렸다.
“의식을 잃었다니, 설마 심각한 상태인 겁니까?”
“최악은 면했으니 걱정 마시죠. 가벼운 뇌진탕 정도일 겁니다.”
카델을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인 가르엘은 곧 근처를 서성이는 백마를 발견했다. 휘파람을 불어 백마의 주의를 끈 그가 다가온 말의 등 위로 카델을 앉혔다.
그러고는 좀 전과 달리 걱정이 가득해진 카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본인도 죽다 살아났으면서 아직도 남을 걱정할 여유가 있는 걸까.
“이동하는 동안…….”
뻗은 손이 카델의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손길을 거두고, 곧장 카델의 뒤에 올라탔다.
“얼굴에 묻은 검댕은 닦아 내는 편이 좋겠네요. 금방 지옥 불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은 데다, 제가 좋아하는 얼굴이 가려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게 엉망이에요?”
뚱한 표정으로 제 뺨을 문지른 카델이 손에 묻어난 검댕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문질렀는데도 손바닥이 새까매졌다. 꼴이 어떤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름대로 귀엽긴 해요.”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카델을 품 안에 가둔 채, 가르엘은 미리 기억해 둔 방향을 따라 말을 몰았다.
이후의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가르엘은 카델을 쓰러진 용병단과 하얀 파도 기사단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준 뒤, 왕국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러 떠났다. 그동안 카델은 반과 루멘, 라이돈의 상태를 확인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가르엘이 치유사와 위병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그제야 비로소 모든 긴장이 풀리며 의식을 잃었다.
그동안 쌓인 지독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카델은 스토리 감상을 모조리 거부한 채 단잠에 빠졌다. 기절에 가까운 잠이었다.
“으음…….”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을까. 시간은 가늠할 수 없어도, 지독했던 피로를 씻어 낸 몸은 너무도 개운했다.
카델은 몸을 위아래로 쭉 늘이며 자리에서 뒤척였다. 몸을 감싼 부드러운 침구와 코끝에 맴도는 은은한 꽃향기. 적당한 온도에 기분이 붕 떴다.
한참을 몽롱한 의식 속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카델, 언제까지 잘 거야? 나 심심한데.”
꿈결처럼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덮치듯 엎드려 있는 라이돈의 해사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드디어 눈을 뜬 카델이 반가운 듯 곱다랗게 눈을 휘더니, 이내 상체를 지탱하던 팔에 힘을 풀어 카델을 짓눌러 왔다.
“야……! 숨, 막혀!”
순식간에 거구의 남성에게 깔려 찌그러진 카델이 있는 힘껏 바둥거렸다. 라이돈의 아래에서 팔다리만 겨우 내비친 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꽤나 필사적이었다.
그런 그의 노력이 가상하지도 않은지. 라이돈은 연신 자신의 등을 내리치는 카델을 꼭 끌어안고는, 침대를 한 바퀴 굴렀다.
가뜩이나 힘없는 몸뚱이는 반항 한 번 못하고 라이돈의 의지대로 휘둘렸다. 위아래가 반전된 자세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카델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헤실거리는 라이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몸을 짓누르던 갑갑한 무게감이 사라지긴 했으나, 폭신한 침대 대신 자리한 딱딱한 근육들이 거슬렸다.
“일어나자마자 뭐 하는 짓이야? 불편해. 놔.”
“카델이 자는 동안 얼마나 지루했는지 알아? 얌전히 기다렸으니까, 상을 줘야지.”
“상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애냐? 됐고, 빨리 작아지기나 해.”
현재의 라이돈은 190이 넘는 거대 요정의 모습이었다. 펜던트에 마력을 불어 넣기도 전에 기절한 탓이었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어린애로 돌려놔야지.’
침대에서 깨어난 걸 보니 어딘가의 여관일 것 같은데. 직원이라도 들이닥치면 큰일이었다. 우려한 카델이 곧장 목걸이를 낚아챘으나, 그보다 먼저 라이돈의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잠깐. 이거, 다 나은 거야? 이제 괜찮아?”
어긋나 있던 동공의 형태가 본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손을 뻗어 눈꺼풀 위를 더듬거리자, 라이돈이 간지럽다며 작게 고개를 비틀었다.
“응! 카델이 자는 동안 다 회복했지.”
“내가 자는 동안……. 라이돈. 혹시, 나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어?”
“나흘.”
“나흘? 나흘이나 잤다고?”
나흘이라니. 사람이 피곤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오래 잘 수도 있는 것이었나.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 당황하자, 라이돈은 이제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겠냐며 투덜거렸다.
“야, 이거 놔 봐.”
카델은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라이돈의 팔을 두드리며 몸을 뒤척였다. 순순히 그를 놓아 준 라이돈이 시건방진 자세로 돌아누우며 카델의 뒤를 좇았다.
“여긴 어디야? 여관…이라기엔 좀.”
깨어나자마자 라이돈에게 놀아난 탓에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늦었다.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카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뭐가 이렇게 호화로워?’
방의 크기가 범상치 않음은 물론, 가구와 인테리어 또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금박이 새겨진 벽지에 섬세한 자수가 박힌 카펫, 눈부신 채광과 깨끗한 창문,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살랑이는 순백색의 커튼까지.
만약 이곳이 여관이라면, 제발 계산은 황혼 기사단이 해 주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라이돈을 돌아보자, 침대에 누워 출처 모를 쿠키를 와작거리던 그가 눈썹을 까딱였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별로 궁금하지 않았거든. 곧 루멘이 올 테니까 물어보지 그래?”
“루멘이 온다고?”
되묻기가 무섭게 누군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멘인가?’
곧 루멘이 온다고 했으니 그일 확률이 높았다.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은가.
‘……만약 아니면?’
하지만 그 어디에도 다가오는 발소리가 루멘의 것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방을 청소하러 온 직원일지도.
카델의 시선이 침대 위에 늘어진 라이돈의 날개를 향했다. 라이돈은 자신의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날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새로운 쿠키를 집어 들고 있었다.
“너, 너 빨리 목걸이 이리 내.”
“으응?”
“뭘 으응이야!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다급해진 카델이 라이돈의 목걸이를 낚아챘다. 변신은 금방이니 당장 아티팩트를 활성화한다면 들킬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펜던트에 마력을 불어 넣은 그 순간.
“……?”
카델의 눈빛이 떨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달싹이고, 힘없이 풀어진 손아귀 아래로 목걸이가 떨어졌다. 카델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소리의 주인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