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521)

「남은 시간 01 : 20 : 29」

이동 중인 주민과 원군이 중간 지점에서 교차하는 시간을 1시간으로 잡는다면, 남는 시간은 고작 20분 남짓.

그 안에 담판을 짓겠다.

“마지막 수로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수인지는 몰라도, 실패한다면 카델 경은…….”

아군 하나 없이 부활한 에르고를 상대해야겠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최악을 상정하고 몸을 사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에게는, 주민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가르엘 경. 저도 실패보단 죽음이 더 두렵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런 사람치곤 볼 때마다 불사신처럼 구는 것 같지만요.”

카델의 결정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의 고집엔 근거가 부족했고, 보다 나은 수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가르엘은 카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만약 자신의 선택으로 결국 카델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뭐, 금방 뒤따라갈 테니까.’

원망은 지옥에서나 들으면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이 표현할 수 없이 강렬한 이끌림이 가리키는 대로…… 카델의 도박에 어울려 주겠다.

“정말 방법이 있다는 건가?”

“그렇대도.”

“위험하지 않은 게 확실해?”

“아, 그렇대도! 지금까지 이 방법을 안 썼던 건 준비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이젠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그러니 써 봐야지.”

카델의 설명에도 루멘은 의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단원들을 전부 떠나보내고 마을에 홀로 남아 ‘비장의 수’를 사용하겠다니. 위험 부담은 전혀 없으니 마음 놓고 주민의 대피를 도우라 해도, 선뜻 믿기가 힘들었다.

그야, 전적이 있으니까.

“시간 없으니까 그만 꾸물거리고 가. 반, 너도! 좀 떨어져!”

“하지만 단장…….”

순순히 떠나기 힘든 것은 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카델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고, 카델의 호통에도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버틸 뿐이었다.

카델은 그런 반의 손등을 찰싹 때려 떼어 놓고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임시 주둔지. 그곳에선 황혼 기사단이 주민 운반에 한창이었다.

“빨리 가서 도우란 말이야. 눈치도 안 보이냐?”

“제가 저 사람들 눈치를 왜 봐요…….”

“이미 충분히 도왔어.”

어떻게 된 게 이놈들은 날이 갈수록 고집만 늘어 가는 것 같다. 여기에 라이돈까지 합세했다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겠지.

카델은 반의 품에서 숙면 중인 라이돈에게 속으로나마 감사를 표하며 차오르는 폭력성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누가 보면 부모 자식인 줄 알겠어. 그것도 내가 자식이고 너희가 부모야! 작작 좀 해라, 어? 너희가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용병단이 공을 가로채이는 비극이라고. 알아들었으면 잽싸게 달려가서 자리 꿰차! 온몸으로 적린 용병단의 수고를 표현하란 말이야!”

거칠게 등을 떠밀자 루멘과 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밀려 나 주었다. 둘은 영 찜찜하다는 듯 몇 번이고 카델을 돌아보더니, 폭발 직전의 표정을 발견한 뒤에야 주둔지로 이동했다.

“아오, 진짜 저것들은 언제쯤 재깍재깍 명령을 따르냐? 떨어뜨려 놓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카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슬쩍 시선을 옮기자,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수레에 주민을 싣고 있는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그마저도 부족해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기사는 직접 주민을 업어야 했다. 격한 전투에 데려왔던 말이 전부 죽거나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예상보다 더 걸리면 안 될 텐데.’

대피 인원이 최대한 마을과 멀리 떨어진 상태로 지원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 ‘그 마법’을 제대로 전개할 수 있을 테니.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금세 털어 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결과가 어찌 됐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카델이 한창 마무리되어 가는 운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때. 지휘를 마친 가르엘이 카델을 찾아왔다.

“대피 준비는 다 됐습니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돼요. 지원군과 합류하면 바로 신호를 보내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음, 어떤 게요? 혼자 마족을 상대하라고 남겨 놓은 부분이?”

기껏 예의를 차렸더니 돌아오는 게 없다. 성능만큼은 최고인 기사였으나, 역시 인성은 성능과 비례하지 않는 듯했다. 카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말을 믿고 움직여 준 부분이요.”

“아하, 그런가요…….”

가르엘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미소지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곧 제비꽃처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위로 카델의 얼굴을 담아냈다.

“전에 말했다시피, 얼굴이 취향이라서요. 제가 예쁜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지라. 부탁도 거절을 못 하겠네요.”

“……못 들은 걸로 하죠.”

“하하, 좋아요. 그럼 이것만 들어 주세요.”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가르엘이 허리를 숙여 카델과 눈높이를 맞췄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눈빛이 카델을 천천히 훑어 내리고.

“무운을 빌겠습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듯 맴돌았다. 카델은 그의 자색 눈동자와 검은 안대를 번갈아 보고는, 한 발짝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예. 그럼 나중에 뵙죠, 가르엘 경.”

돌아오는 담백한 대답에 작게 웃은 가르엘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짧은 눈인사를 끝으로 기사단에 복귀했다.

주민 운반 작업도 마쳤고, 반, 루멘과도 인사를 끝냈다. 남은 일은 없다.

이젠 혼자가 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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