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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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박. 찰박.

반의 오라가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는, 온통 진득한 핏물이 고여 있었다. 자리에 우두커니 선 카델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보호하던 임시 주둔지를 제외하고는,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민가도, 농지도, 마물도.

[사자의 강]이 만들어 낸 것은 단순한 피의 파도가 아니었다. 지금껏 반의 대검이 머금고 있던 핏물과 대량의 오라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종의 ‘초대형 검기’였다.

마땅히 몸을 지킬 수단이 없던 마물들이 그런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히 살아 있을 리 없었다. 그 증거로, 황폐해진 마을에는 여기저기 마물의 떨어진 사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대단해.”

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저 벅찼다. 이 광경을 만들어 낸 이가 자신의 부하라는 사실이.

카델은 촉박한 시간을 잠시나마 잊은 채 반이 남긴 여운에 잠겼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으로, 가르엘이 다가왔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 정도 수준의 광전사는 어딜 가도 보기 힘들 겁니다.”

“제 부하들은 특별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가르엘의 시선이 황야나 다름없어진 마을의 바깥을 향했다.

“이 기술의 사용이 제 부하들과 미리 상의된 일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순간 뜨끔한 카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상의된 일일 리가. 카델 역시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비장하게 눈을 빛내던 반이 [사자의 강]을 사용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혹시 마물 군단과의 전투로 지친 황혼 기사단이 공격에 휩쓸렸으면 어쩌지. 뒤늦게 밀려오는 걱정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가르엘이 대신 입을 열었다.

“괜찮겠죠. 카델 경이 부하를 믿는 만큼, 저도 제 부하들을 믿습니다.”

그는 수려한 얼굴 위로 산뜻한 미소를 띤 채 등을 돌렸다.

“마물이 더 몰려올 기미는 안 보이는군요. 부하들을 확인하러 가 봐야겠습니다.”

“그러시죠. 전 살아남은 잔당이 있는지 살펴볼게요.”

짧은 대화를 끝으로 가르엘은 곧장 마을 외곽을 향해 이동했다. 그의 모습이 시야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크게 숨을 고른 카델이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02 : 08 : 46」

‘2시간이라.’

예상에 없던 마물 군단의 습격. 그들로부터 심핵을 사수하느라 3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이 안에 심핵을 부수지 못한다면, 치열했던 전투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 사실을 마주하자, 심장이 불길한 고동을 만들어 냈다. 속이 메슥거리고 진창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누군가의 목숨이 달렸다는 생경한 감각이, 그 부담감이. 무엇보다 빠르게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대장.”

뒤늦게 주둔지를 빠져나온 루멘이 그런 카델을 불렀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카델의 시선이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

“왜 또 죽상을 하고 있어?”

다가온 그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카델의 눈가를 매만졌다. 닿아 오는 온기에 녹아 굳어 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어지고, 카델의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겨우 시작인데.”

“그래서 불안해?”

“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아.”

“봐 봐, 대장.”

카델의 뺨을 쓸어내린 손끝이 작은 턱을 감싸 쥐었다. 살짝 힘을 주어 턱을 들자, 카델의 떨리는 눈빛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없지만, 가끔씩 보이는 이 불안감과 동요가. 루멘은 싫지 않았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끝을 볼 수만 있다면, 불안해하든, 울든, 화내든. 상관없는 거라고.”

처음보다 풀어진 얼굴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멘은 그런 카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둥근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내가 원하는 대장은 그런 대장이니까. 못생긴 표정 그만 짓고, 바깥 좀 둘러보고 와. 난 주둔지를 지키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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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델이 반을 발견한 것은 임시 주둔지 근처를 순찰한 지 10분 남짓이 지난 뒤였다.

저 멀리에서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듯 느리게 걸어오던 반은, 카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단장!”

고통스럽게 구겨져 있던 얼굴이 단숨에 피어났다. 그는 언제 골골거렸냐는 듯 힘차게 카델의 앞으로 달려갔다.

“단장, 저 해냈어요! 처음으로 이 힘을…… 아니, 제 힘을 제 의지대로 다뤘다고요!”

“응, 전부 다 봤어. 잘했어, 반.”

큰 기술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갓 각성한 반은 [사자의 강]의 위력만큼이나 강한 반동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 냈다. 카델은 그것이 너무도 대견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반의 얼굴을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기대에도 없던 포옹에 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다, 단장?”

“고마워. 날 위해 싸워 줘서.”

“……당연한 일인걸요.”

주책맞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바짝 힘을 주며, 반은 카델의 어깨 위로 이마를 올렸다. 불편한 자세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델의 온기를 느끼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모든 건 전부 단장을 위한 거예요. 마음대로 써 주세요. 단장이 원한다면 엉망으로 망가져도 좋아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지금이라면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진심. 언젠가 한 번쯤 카델에게 닿기를 바랐던 속내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

“흐응, 갑갑해서 잠을 못 자겠네. 날 눌러 죽일 셈이야, 카델?”

내내 카델의 품속에 있던 라이돈이 불쑥 고개를 빼 들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후다닥 반을 밀쳐 낸 카델이 라이돈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미안. 너무 가벼워서 까먹었다.”

“너무하네! 마음이 아파졌어. 뽀뽀해 줄래?”

“영원히 자고 싶어? 들어가.”

거침없이 라이돈을 쑤셔 넣은 카델이 설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허망함을 숨기지 못한 반이 뿌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꼭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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