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 뚫린 천장과 그 너머로 고개를 빼든 마물들. 가르엘은 미묘한 표정으로 놈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와 버렸군.”
외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야,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함성과 비명, 짙은 피 냄새가 진동했으니까. 모르는 편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마물화의 부작용으로 발작하는 주민들의 안정화를 도왔다. 전투를 피해 홀로 치유를 맡은 모습은 유능한 기사단의 단장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가르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러운 힘을 사용해 부하들을 욕보이는 것보단 무능한 단장으로 남아 있는 편이 낫지.’
빛의 마력을 일정량 이상 사용하거나, 몸에 작은 상처가 생기는 즉시. ‘그 힘’이 개방된다. 모욕적인 힘이었다. 그의 근간을 뿌리째 썩게 만든 소모적인 힘이었다.
그렇기에 가르엘은 ‘그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락된 힘의 개방 조건은, 사람을 살릴 때뿐.
물론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자신이야 죽거나 말거나, 오히려 죽는 편이 세상에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부하들을 전장으로 떠밀고, 자신은 ‘그 힘’을 개방해 주민들을 치유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화 되었다고 판단할 무렵.
기어코 주둔지를 찾아낸 마물이 건물의 외벽을 쥐어뜯으며 몰려들었다.
“여기서 싸우면 무조건 힘이 개방될 텐데 말이지.”
가르엘은 검집에 손을 올린 채 부서진 천장 모서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마물들을 응시했다. 땅이 진동할 만큼 폭력적인 등장과는 달리 놈들은 섣불리 이쪽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주민들의 중심에 우두커니 선 가르엘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게 무엇보다 기분 나빴다.
‘무슨 생각으로 안 달려드는지 뻔해서 짜증 나네. 확 다 죽여 버릴까.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으면, 어쨌든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뭐, 아직도 날 의지하는 부하들은 잠깐 방황할지 몰라도, 강한 녀석들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자리 잡겠지.’
무덤덤한 얼굴로 위험한 생각을 하던 가르엘. 언제까지고 마물들과 견제만 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사실을 인정한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끌어 내렸다.
드러난 왼쪽 눈에는, 흰자위가 없었다. 흰자위가 있어야 할 곳은 섬뜩하리만치 새까만 어둠에 잠겼다. 오른쪽 눈과 같은 보라색 홍채를 가진 역안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눈동자. 가르엘은 자신의 왼눈을 툭툭 건드리며, 여전히 그를 관람하듯 모여든 마물을 향해 말했다.
“인간이 이런 거 갖고 있으니까 이상해? 혼란스러운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아군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지는 마. 기분이 더럽잖아.”
좋다. 정했다. 어차피 오래 살 생각도 없었고, 기사단이 독립하면 어디 황폐한 곳을 찾아가 죽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믿음을 배신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꽤 오랜 시간을 싸웠음에도 결국 마을 내부까지 쳐들어온 마물. 황혼 기사단이 고전하고 있음은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황혼 기사단이 고전할 만한 수준의 싸움이라면, 자신이 죽었다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으리라.
그리 결론을 내린 가르엘의 왼쪽 몸을 타고,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보라색 오라가 넘실거렸다. 끝이 둥글게 말린 기묘한 형태의 오라는 신비롭다기보단 불길했고, 성기사보단 마족에게 어울리는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 사용하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검을 바꿔 든 그가 검날을 곧게 세웠다.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 주겠지.’
죽은 후의 일을 고민해 봤자 망설임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게 가르엘이 본격적으로 주둔지를 포위한 마물을 사냥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화르륵!
갑작스레 끼쳐 오는 열풍과 함께, 뻥 뚫린 천장을 가리는 불의 장막이 생성됐다.
⚔️
카델은 루멘과 함께 다급히 임시 주둔지를 찾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뻥 뚫린 천장과 그 위를 덮듯이 모인 마물. 그리고 구멍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색의 오라였다.
그 오라를 발견하자마자, 카델은 천장을 덮는 불의 장막을 생성시켰다.
“루멘! 주변의 마물을 처리해 줘!”
갑작스런 불꽃에 놀라 굴러떨어진 마물은 뒤이어 날아드는 루멘의 검기에 양단되었다. 카델은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추락하는 마물의 틈에서, 성기사단의 마력으로 보호된 주둔지의 문을 두드렸다.
“가르엘 경! 안에 계십니까?”
“카델 경……?”
문 너머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델은 불안한 표정으로 뒤편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부 끝났습니까?”
“음, 주민이라면 전부 잠들었―”
“정말 다 끝난 거 맞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대체 뭘 물어보고 싶은 거야?’라고 생각할 만한 질문이었으나. 가르엘의 ‘그 힘’을 알고 있는 카델로선 이것이 최대한 에두른 말이었다. 가르엘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한 듯, 짧은 침묵을 끝으로 입을 열었다.
“예. 다 끝났습니다.”
확답을 들은 카델이 문에서부터 몇 발자국 물러났다. 구부러진 손안에는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럼 들어갑니다!”
“예? 들어온다고요?”
일일이 상황을 설명해 줄 시간은 없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문을 통째로 날려 버리자, 얼떨떨한 얼굴을 한 가르엘이 보였다. 카델은 외부의 마물을 처리한 루멘을 불러 다급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가르엘이 뭔가를 묻기도 전, 빈자리를 찾아 정좌를 틀었다.
“지금부터 주둔지를 보호하는 장막을 만들 겁니다. 충격까지 막아 줄 순 없으니, 주민들이 튕겨 나가지 않게 보호해 주세요.”
“카델 경, 갑자기 이게 무슨…….”
“제 부하가 힘 좀 쓰겠답니다.”
그리 말한 카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임시 주둔지를 시작으로, 붕괴된 장막을 넘어온 마물들은 무차별적으로 마을을 파괴했다. 무수히 많은 자이언트 트롤이 민가를 짓밟았고, 오우거들은 지면을 다졌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숫자인 데다 위치 또한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그들은 더 이상 심핵을 노리지 않았다. 루멘을 찾아오지 않고, 그저 마을을 뒤엎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사실이 카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심핵의 탈환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의 우선순위를 바꿨을까.
하지만 그러한 고민들조차, 뒤이어 나타난 ‘그것’에 잡아먹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