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521)

언덕처럼 봉긋하게 쌓인 수십 마리의 마물. 숨구멍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빼곡하게 쌓인 마물들은 들썩이는 몸에 힘을 주어 내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루멘이었다. 그는 수십 마리의 마물에게 짓눌린 채, 가까스로 팔꿈치를 바닥에 댔다.

“크윽…….”

장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마물이 들이닥쳤다. 당시 루멘이 있던 방위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던 마물은, 그들이 루멘의 위치를 미리 알고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소름 끼치는 집착이었다.

몇 번이고 달려드는 마물을 끈질기게 베어 낸 루멘이었으나.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힘이 부족해지고 있어.’

그는 괴물 같은 쾌검을 구사하며 뛰어난 순간 폭발력을 과시하는 검사였다. 하지만 초반의 위력이 뛰어난 만큼, 후반의 뒷심은 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스피드와 근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과는 정반대의 성향. 루멘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선수를 점해 상대가 자신의 속도에 적응하기 전 담판을 지었다. 그것이 그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더럽게, 무겁…군!”

엎어진 자세로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린 그가 마물의 다리 아래 깔린 검을 집기 위해 팔을 뻗었다. 마물 수십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대는 탓에 움직임이 더뎠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야 해.’

몰아치는 마물을 상대하느라 미처 카델을 찾아가지 못했다. 마물이 이쪽에 집중됐다고는 해도, 다른 인원을 상대할 만큼의 전력도 분산해 두지 않았을 리는 없다.

용병단이 바로 자신을 지원하러 와 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루멘은 어떻게든 자력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잡았다.’

가까스로 검을 움켜쥔 그가 떨리는 숨을 골랐다.

‘어설프게 힘을 아끼려 했다간 죽을 수도 있어.’

최우선은 심핵의 보호. 그걸 위해서는 생존과 탈출이 급선무였다.

온몸을 짓누르는 아찔한 무게감 속에서, 루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기운이 전신을 순환하는, 맹렬하고도 쾌속한 감각을 느꼈다.

원하는 것은 극한까지 정제된 힘.

[일도백섬(一釖百纖)]

고요한 검날이 땅 위를 스치며 단 하나의 검기를 그려 냈다. 그것은 잔상을 남기며 흐려지는 대신, 점점 뚜렷하게 떠올랐다.

산처럼 쌓인 마물의 틈새로부터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겉면을 이룬 마물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잠시.

끄에에엑! 끼에엑!

그들이 짓누르고 있던 내부에서부터, 수백 개의 검기가 폭발하듯 휘몰아쳤다. 넓게 퍼진 검기가 삭풍이 되어 그들을 베어 내고 밀쳐 냈다.

붉은 피와 푸른 검기가 공간을 어지럽게 물들이고. 천천히 사그라지는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루멘이 비틀비틀 몸을 세웠다.

살아남은 마물은 없다.

‘심핵은…….’

가장 먼저 심핵이 든 안주머니를 확인한 그가 손에 닿은 단단한 감촉을 느꼈다.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 잠깐.’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더듬거리며 품속의 심핵을 쓸어내린 루멘의 미간에 금이 갔다.

‘느낌이 묘하게…….’

표면의 감촉에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몇 번이고 부수려 노력했던 만큼, 심핵의 감촉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두워진 낯빛으로 입술을 달싹인 그가 주머니 속 심핵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젠장!”

심핵과 엇비슷한 모양을 가진 돌멩이였다.

이렇게 바꿔치기를 당할 줄이야. 대체 어느 틈에? 대체 누가?

다급한 시선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루멘은 앞선 곳에서 얄밉도록 활기차게 뛰어가는 ‘베이비 데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놈의 품을 한가득 채운 보라색 심핵. 루멘은 곧장 베이비 데빌을 쫓아 몸을 날리려 했으나, 차곡차곡 적립되어 온 데미지가 기어코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왜 하필 지금……!”

픽 꺾인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루멘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푸른 눈에 실핏줄이 터지며 꽉 다문 턱이 경련했다.

충혈된 눈 안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베이비 데빌의 모습이 담겼다. 이렇게 허무하게 심핵을 빼앗길 순 없다. 간절한 발악이 입 안을 맴돌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루멘!”

누구보다 바랐던 원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려오는 카델을 발견한 루멘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대장! 그놈을 잡아!”

⚔️

카델은 자신의 맞은편에서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작은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놈이 들고 있는 것은, 실눈 뜨고 봐도 심핵이었다.

‘베이비 데빌…… 맞지?’

마족의 수하로 활동하는 소악마. 스토리를 보지 않는 카델에게 ‘베이비 데빌’이란 존재는 ‘이벤트 시즌에 종종 등장하는 보상 드랍용 몬스터’에 불과했다. 이런 부류의 적은 등장 확률이 낮을 뿐 피통은 적어서, 공격을 받기도 전에 스킬 하나로 삭제된다.

그 말은 즉.

‘무슨 기술을 쓰는 놈이었더라?’

어렴풋한 정체만 파악하고 있을 뿐, 녀석이 어떤 스킬을 구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

‘일단 심핵부터 빼앗는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심핵을 탈환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카델이 화염구를 날렸다. 하지만 공격이 채 땅에 닿기도 전.

끼깃! 끼기깃!

베이비 데빌의 신형이 사라졌다. 빈 땅으로 처박힌 화염구에 당황한 시선이 움직이고, 곧 그를 피해 도망가는 베이비 데빌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무슨 움직임이……!”

루멘을 연상케 하는 이속이었다. 물론 현재의 베이비 데빌은 본인 몸만 한 심핵을 안고 있었기에 처음보다 느려진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카델을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쫓아가는 건 불가능해.’

루멘이라면 몰라도 몸 쓰는 일을 누구보다 못하는 자신이 저 속도를 쫓는 것은 무리였다. 카델은 멀어지는 베이비 데빌의 동선을 예측해 그 앞으로 낙뢰를 퍼부었다.

앞을 가로막은 번개에 멈칫한 베이비 데빌이 몸을 세우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카델이 바람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 이상 멀어지지 못하도록 잡아 둬야 한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굵직한 바람결. 순식간에 뻗어 나간 바람이 그대로 베이비 데빌의 몸체를 휘감고.

끼이이잇!

베이비 데빌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카델은 마력의 강도를 높이며 녀석을 가둔 [바람 감옥]을 서서히 압축시켰다.

에이든에게 썼을 때는 포획 이외의 쓰임새가 없었지만, 본래 [바람 감옥]은 마력의 압축을 통해 자유자재로 감옥의 범위를 조절할 수 있는 마법. 물론, 한 점으로 압축해 대상을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게임에서 상대했던 베이비 데빌은 이벤트용 몬스터답게 약해빠졌었어.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보유 스킬이 불분명하다면, 스킬을 사용하기 전에 죽이면 된다. 카델은 [바람 감옥]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끼잇! 끼이잇!

심핵을 보물처럼 끌어안은 채 과할 정도로 거대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소악마. 베이비 데빌이 좁은 감옥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카델은 거리낌 없이 마력을 퍼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심핵을 마물 군단에게 넘겨줄 수 없다. 그 일념이 무엇보다도 거대했다.

하지만 베이비 데빌을 제대로 쥐어짜 보기도 전.

끼이이이이이—

녀석이 귀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음파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으윽……!”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은 카델이 인상을 구겼다. 마력은 거두지 않았다. [바람 감옥]은 꾸준히 압축되고 있었지만, 베이비 데빌은 좁아지는 공간 속에서도 심핵을 보호하듯 몸을 웅크리며 입을 다물지 않았다.

계속되는 고주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를 막은 손바닥을 타고 무언가 축축한 것이 흘러내렸다.

‘빨리 죽여야…….’

찢어지는 음파에 일순 집중력이 흐트러지긴 했으나, 카델은 꿋꿋하게 마력을 끌어모아 베이비 데빌을 압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빠지직. 뿌득.

“으으, 내 귀…….”

베이비 데빌이 완벽하게 압축되었다. 여전히 건재한 심핵을 적신 핏물만이 녀석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라진 음파에 카델이 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코앞에서 고주파를 감당하느라 고막이 손상된 듯했다.

‘심핵은 확보했으니 괜찮아.’

마력을 거두고 떨어지는 심핵을 낚아챈 그가 일순 닥쳐오는 어지럼증에 짧게 비틀거렸다. 기울어진 중심을 받쳐 준 것은 그를 뒤따라온 루멘이었다.

“대장, 괜찮아?”

“……너야말로.”

탄탄한 가슴팍에 기댄 카델이 엉망이 된 루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전투와 압박감이 심신을 갉아먹은 결과였다.

카델은 루멘의 앞으로 심핵을 내보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미니 루멘한테서 뺏었어.”

“설마 그 징그러운 괴물더러 미니 루멘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속도가 딱 널 닮았던데.”

“빠르다고 다 내가 아니야.”

카델은 한껏 어이없어하는 루멘의 품에 심핵을 안겨 주고는, 천천히 중심을 잡았다.

“바깥 상황을 봐야겠어. 대체 얼마나 많은 마물이 몰려오고 있는 건지. 그걸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이어지려던 카델의 말은, 근방을 울리는 진동에 가로막혔다.

“무슨……!”

루멘은 거센 지진으로부터 카델을 보호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진동의 근원지.

임시 주둔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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