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추락하는 마물을 피해 대피한 루멘. 그는 일생일대의 난관을 맞닥뜨린 상태였다.
“젠장……!”
길목을 내달리는 속도가 눈으로 좇기 어려울 만큼 재빨랐다. 그 속도를 유지하며 루멘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수십 개의 가느다란 잔상이 새겨졌다. 실선을 따라 번뜩이는 섬광. 살짝 뽑힌 검을 납검하자, 잔상의 위로 푸르스름한 검기가 덧그려지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번졌다.
누구도 쉽게 반응 못 할 경이로운 공속이었으나. 루멘의 표정은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저건 대체 뭐야?’
무언가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본래라면 전부 라이돈의 [폭설화]에 묶여 그를 쫓는 마물이 없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 살육의 현장 속에서도, 당당히 도망친 마물이 존재했다.
끼기! 끼기긱! 끼히잇!
날붙이를 긁는 듯한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루멘과 비등비등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한 뼘만 한 크기의 생명체.
작은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울룩불룩한 근육과, 그와 대비되는 툭 튀어나온 배. 발가벗어 드러난 살구색의 쭈글쭈글한 피부와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
루멘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이 기묘하고 불쾌한 생명체의 정체는, 바로 ‘베이비 데빌’이었다. 주로 마족의 밑에서 배달 심부름을 하며, 마족이 죽인 인간이나 짐승을 주식으로 삼는 역겨운 종족. 항상 마족과 함께 행동하기에, 마계가 봉인된 이후로 덩달아 자취를 감춘 종족이기도 했다.
‘내 공격을 전부 피하고 있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날쌘 몸놀림. 담벼락 위를 내달리는 엄청난 각력과 속도. 툭 튀어나온 눈이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루멘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군.”
아직 이렇다 할 반격을 해 오지는 않았으나, 놈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심핵. 하늘에서 떨어진 마물 군단이 일시에 달려들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 마물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감각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장막에 가로막힌다. 방향을 틀면 다시 대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돼. 그럼 기껏 대피한 의미가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맹렬한 추격전을 벌이는 마물의 정체를 모르는 만큼, 섣불리 전투를 개시하기도 애매했다.
‘단순히 속도만 빠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힘이 있을 수도 있어. 대응하지 못하면 심핵을 빼앗긴다.’
장막 밖의 기사단도, 중심의 용병단도. 전부 심핵의 사수를 위해 마물 군단과 싸우고 있다. 그런 중요한 물건의 보호를 맡은 이상,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신중히 고민하는 와중에도 마물은 괴성을 내지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건……!’
귀청 따가운 폭음을 동반하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화염구.
루멘이 대피하기 전, 카델은 ‘합류해도 좋다는 판단이 선다면 신호를 보내겠다’고 했다.
더 잴 것도 없이 분명한 신호였다. 루멘은 곧바로 복귀를 결정했다.
‘대장이라면 마법으로 저 정체불명의 괴물을 가둘 수 있을 거야.’
홀로 맞서 싸우기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용병단이 합세한다면 딱히 피할 이유도 없는 마물이었다.
그리 판단한 루멘이 화염구가 쏘아진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으나.
쩌적. 쩌저적.
그와 가까이 있던 장막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파열음이 들려왔다.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루멘의 푸른 눈동자 위로, 한가득 퍼진 눈부신 빛의 파편이 떠올랐다.
⚔️
“장막이…….”
카델의 굳은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처음의 균열을 제외하곤 꿋꿋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장막이, 손쓸 틈도 없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황혼 기사단이 당한 건가……?’
카델은 장막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마물이 몰려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장막을 유지할 힘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불길한 가정을 예고했다.
마지막 발악, 혹은 전멸.
더 이상 장막을 유지하면서 전투에 임할 여유가 없어졌거나, 장막을 유지할 인원이 전부 사망했거나.
떨어지는 장막의 파편과 함께 라이돈이 내려왔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몸에는 눈에 띄게 힘이 빠져 있었다. 카델은 비틀거리는 라이돈을 부축했다.
“우와, 기운이 다 빠졌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대단해. 몽롱하네.”
“고생했어, 라이돈. 날개는 그대로 둘 테니까, 지금부턴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어.”
라이돈의 고생과는 별개로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장막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너머에서 얼마나 많은 마물이 몰려올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라이돈을 지켜 줄 여력이 있을 리 없다.
그 때문에 카델은 라이돈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 했으나.
“날개 움직일 힘도 안 남았는걸. 카델이 업어서 데려다줄래?”
“지금 네 덩치를 봐.”
“하하! 역시 그렇지? 그럼 그냥 이렇게 할래.”
그리 말한 라이돈의 모습이 변화했다. 처음 환혹의 숲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한 뼘만 한 크기의 요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작아진 그가 맥없이 흔들거리며 카델의 로브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어딜 들어가는 거냐. 당장 안 나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반이 인상을 구겼지만 라이돈은 가뿐히 무시했다.
“그럼 난 좀 잘 테니까, 다 끝나면 깨워 줘.”
카델 또한 안주머니에 쏙 들어간 라이돈을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도망 못 갈 거면 차라리 이게 낫겠지. 찌그러지지 않게 조심해라.”
“단장, 그냥 제가 들고 있을게요.”
“됐어. 네 전투 방식이면 라이돈은 그대로 압사당할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음험하게 중얼거리는 반을 뒤로한 채, 카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장막은 벌써 하늘이 휑하게 뚫려 있었고, 선명하게 드러난 외부에선 짙은 연기와 시끄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기사단의 함성인지, 마물의 비명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루멘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반의 폭주를 막고, 라이돈의 마법이 마무리된 직후. 카델은 화염구를 날려 루멘에게 합류의 신호를 보냈다.
그가 알기로 새어 나간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안전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면, 루멘은 신호를 보는 즉시 달려와 지금쯤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단장. 외부의 마물이 들이닥치면 전부 루멘을 공격하려 들 거예요.”
“알아. 그래서 신호를 보내고 기다리고 있는 건데……. 계속 돌아오지 않는다면 장막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찾으러 가야 해.”
“……단장 혼자 가 주세요.”
“응?”
혼자 가라니?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반을 올려다보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대검을 어깨 위에 걸쳤다.
“평범한 공격으론 이 싸움을 끝낼 수 없어요. 이곳에 모일 마물을 한 번에 끝장낼 만한 큰 기술이 필요한 때죠. 제게 딱 적당한 기술이 있어요.”
“무슨……. 너 방금까지 폭주할 뻔했다는 걸 알기는 해?”
통제 불가 상태의 오라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런데 또다시 대량 학살을 위한 오라를 끌어내겠다니.
한 번 폭주를 막아 줬으면 됐지, 두 번이나 막으라는 소리인가? 게다가 이젠 반에게 신경을 쏟을 상황도 못 됐다. 루멘과 심핵이 1순위였으니까.
하지만 카델이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기도 전. 반의 올곧은 시선이 그를 막았다.
“무모하게 보인다는 거 알아요. 폐 끼친 주제에 또 날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장.”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확신이었다. 드높은 벽을 앞둔 자의 기세였고, 비장한 첫걸음을 내딛는 자의 자신감이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큰 힘을 갈망하는 그의 욕망은 카델에게까지 닿았다.
‘……이제야 본격적인 각성 퀘스트에 돌입하려는 건가.’
카델이 반의 각성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넘어지려는 그의 등을 살짝 받쳐 주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중심으로, 눈앞의 벽을 깨부수는 것은 반의 몫이다.
“그럼 해 봐.”
카델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반이 본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갈림길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드시 성공할게요.”
“당연하지.”
반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만큼이나 카델 역시 그의 성장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카델은 결심을 마친 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반의 각성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장막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마물이 몰려들기 전. 무조건 루멘을 찾아내야 했다.
‘벌써 당한 건 아니겠지.’
점점 빨라지는 걸음을 따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루멘의 능력을 확신했기에 심핵을 맡겼다. 쉽게 빼앗길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제발 멀쩡히 있어 줘.’
잠시 길을 헤맨 것뿐이기를. 무너지는 장막 아래 흩날리는 빛의 파편 속에서, 카델은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