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선 반의 전투를 막고 오라를 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다. 카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루멘을 쫓는 마물의 격퇴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힘이 절실했다. 미련 없이 반을 전력에서 제외하기에는 굴러가는 상황이 너무도 좋지 못했다.
그러니 일단은 눈앞의 마물을 전부 처리할 때까지만. 그의 힘을 빌리도록 하자.
“반! 오라의 사용을 최소화해! 정신 놓지 말고!”
폭주 직전의 반은 야차와 같은 움직임을 구사하며 무차별적으로 적을 살육했다. 오라의 사용을 줄이라는 명령을 듣기는 한 것인지 순수 검술만으로 마물을 상대하긴 했으나, 그건 그것대로 잔인했다.
육중한 대검을 휘둘러 단숨에 마물 대여섯 마리의 목을 베었고, 대검의 면을 세워 뭉쳐 있는 마물을 향해 돌진. 넘어진 마물 무리를 짓눌러 그대로 압사시키기도 했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피와 살이 낭자했다. 검기를 사용해 적들을 깔끔히 일망타진하는 평소의 전투법과는 다른, 짐승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카델은 끊임없이 불꽃을 피워 내면서도 불안정한 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게 변한 오라의 흐름이 거칠어졌다. 느껴지는 탁기가 불길할 정도였다.
그것은 라이돈 역시 느끼는 바였는지, 날뛰는 반을 주시하던 그가 카델의 근처로 다가왔다.
“반은 카델의 소중한 인간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환혹의 숲에서 내가 반의 환상을 죽였을 때, 엄청나게 화냈잖아. 소중한 인간이니까 화난 거 아니었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동료였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다. 소중하기에 더더욱. 그를 이용해야 하는 처지가 괴로웠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라이돈이 곧 반을 향해 턱짓했다.
“기절시켜서라도 오라의 사용을 멈추는 게 좋아. 인간이 버틸 만한 농도가 아니거든.”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근방을 가득 메운 마물의 시체. 그 시체 더미를 뚫고 튀어나오는 새로운 마물. 필사적으로 심핵을 찾아 달려 나가는 놈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는, 한 명도 빠짐없는 진영의 유지가 필요했다.
라이돈은 물론 카델 본인 또한 온전한 힘을 비축해 두지 못했다. 쉼 없는 강행군에 7성의 경지로도 보완할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고, 마물 군단으로부터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 명이 힘을 아낀다면, 다른 곳에서 그만큼의 힘을 끌어와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은 여유를 부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치열한 전장이었으니.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목걸이, 풀어 줘.”
라이돈이 조용히 말했다. 카델이 주춤하며 고개를 돌리자,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태연한 옆얼굴이 보였다.
“변신을 푼다고 네 마력이 돌아오는 건 아니야. 오히려 적의 눈에 띄기만…….”
“알아, 알아. 하지만 날개는 돌아오잖아?”
“날개……?”
“죽을 각오로 싸우되 죽지는 말라며. 모두에게 한 말이었지?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카델은 내 소중한 인간이니까.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라이돈이 목걸이의 펜던트를 건드렸다.
“써 볼 만한 마법이 있어. 마법이 성공하면 한동안은 전투 불능이 되겠지만, 적어도 반의 힘이 필요할 일은 없어질 거야.”
카델은 라이돈의 어긋난 동공과 점점 짙어지는 반의 오라를 번갈아 보았다.
마법이 성공하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것. 그것은 라이돈이 전개하려는 마법이 현재 가진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도 한계를 넘어서야만 성공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얘기였다.
‘……라이돈은 이미 충분히 무리했어.’
힘이 봉인된 상태로 너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게. 죽을 각오로 싸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마물을 홀로 감당했다. 본인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한참 벗어났음에도, 억지로 힘을 쥐어짜 내 죽을 각오로 아군을 보호했다.
지금도 그는 폭주의 위험 속에서 아군을 위해 버티고 있다.
‘뭐 이런 엿 같은 상황이 다 있지.’
카델은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후들거리는 손을 꾹 그러쥐었다.
아무리 강해져도 혼자만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번이고 절감했지만, 그 감각은 언제나 불쾌했다.
승리를 위해 동료를 사지로 끌어들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
결국 이번에도 카델은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라이돈의 목걸이를 낚아챈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부탁한다.”
라이돈은 대답 대신 평소같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델은 자신이 선택한 인간이었다. ‘세상을 보여 주겠다’는 전대미문의 약속을 해 준 만큼, 되도록 오랫동안. 망가지지 않고 한결같이 재미있는 인간으로 남기를 바랐다. 카델이 망가질 만한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실력 발휘를 해야 할 때.
“하하! 역시 윗공기가 맑네!”
앳된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카델의 앞에 자리한 것은 190이 넘는 거구의 사내. 등에서 자라난 두 쌍의 날개가 빛을 투과하며 아름답게 반짝였다.
라이돈은 자라난 덩치 속 여전히 천사 같은 미모를 과시하며, 카델의 양 뺨을 쥐었다. 카델의 표정은 진중했으나, 커다란 손에 가려져 이목구비만 겨우 빠져나온 모습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사르르 눈꼬리를 휜 라이돈이 말했다.
“기다려, 카델. 재밌는 걸 보여 줄 테니까.”
기다란 엄지가 카델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마지막으로 습관처럼 카델의 머리에 입을 맞춘 그가 손길을 거두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참혹하기만 했다. 볼품없이 무너져 내린 민가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켜켜이 쌓인 트롤의 팔과 마물의 시체로 틀어막힌 장막의 틈, 널찍하게 퍼진 피 웅덩이.
이렇게나 본격적인 전장이라니.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힘이 봉인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게 전투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뭐, 이렇게 목숨이 아슬아슬한 싸움도 재밌지만.’
실없이 웃은 그가 엄지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힘 조절을 못 해 아예 떨어져 나간 살점의 위로 핏물이 차올랐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무시한 그가 반대쪽 엄지에 흥건한 핏물을 문지르고, 지면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곱상하게 접힌 눈매 속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이걸 쓰는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카델을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그가 선택한 마법은 [폭설화(暴雪花)].
핀하이족의 후계자에게만 계승되는 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