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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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무려 다섯 번째 절단이었다. 반은 장막의 틈을 가로막고 차곡차곡 쌓인 자이언트 트롤의 팔뚝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골랐다.

“더 나와, 더……. 더 많이…….”

이 다섯 번의 절단으로 마물이 들이닥치던 틈새는 완벽하게 틀어막혔으나. 방심할 순 없었다. 자이언트 트롤의 팔은 아주 작은 틈새로도 꾸역꾸역 외부의 마물을 한 움큼 집어 들고 기어들어 왔으니까.

마지막 ‘발사’에 포함된 마물의 수는 자이언트 트롤의 손바닥을 꽉 채울 만큼 방대했다. 한 번의 검기로는 팔뚝을 베어 낼 수 없었기에 결국 저지하지 못했다.

‘슬슬 한계다.’

그리고 반은, 자신의 이성이 벼랑 끝까지 몰려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을 물들인 혼탁한 오라. 점점 검게 변해 가는 오라를 따라 반의 눈동자 또한 색이 짙어진 채였다.

원래의 그였다면 끝도 없이 들이치는 자이언트 트롤의 팔을 베어 내는 대신, 장막 바깥에 있는 기사단과 합류해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적어도 세 번째 자이언트 트롤이 장막 안으로 팔을 빼냈을 때는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서지 않았다. 그저 눈에 들어온 팔을 베어 냈고, 들이닥친 마물을 도륙했다. 그들의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그것이 옳다는 속삭임이 뇌를 지배했다.

‘트롤의 팔이 장막을 막아 주고 있을 때 단장과 합류해야 한다.’

여기서 계속 마물을 상대했다간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었다. 반은 억지로 [혈류검]의 해제를 시도했다.

근육 한 올 한 올을 비틀고 찌르는 듯한 격통. 얄팍한 의지를 끌어모아 간신히 각성 상태에서 벗어나자, 범위가 줄어든 대신 더욱 검어진 오라가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

새까만 동공. 섬찟한 눈빛이 손목을 향했다.

[안식의 팔찌]가 채워져 있어야 할 손목이 텅 비어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두 동강 난 팔찌가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탁하게 물든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

반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팔찌를 주워 들었다. 단장이 선물해 준 이 팔찌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폭주했을 터였다.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는데…….”

자신의 나약함은 단장이 건넨 선물 하나 지키지 못한다. 문득 차오른 울분에 손에 힘을 주자, 쥐고 있던 팔찌가 볼품없이 휘어졌다.

망연한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대로 손을 주먹 쥔 반이 자신의 이마를 거칠게 내리쳤다. 숙인 고개 아래 드러난 눈빛이 살벌했다.

“전부 저 새끼들 때문에…….”

끓는 듯한 중얼거림. 간신히 억눌렀던 오라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시금 범람하기 시작했다.

“전부 죽인다. 전부 죽여서, 단장에게…….”

삐걱거리는 걸음이 움직였다. 반은 잔뜩 우그러진 팔찌를 움켜쥔 채, 카델이 있을 후방을 향했다.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내고 싶다는 본능과, 우선 카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성. 미친 듯이 충돌하는 두 감정을 따라, 그를 감싼 오라 또한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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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반 헤르도스’의 각성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기사 ‘반 헤르도스’가 광전사의 힘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실패 시, 각성 퀘스트 소멸. 기사 ‘반 헤르도스’ 전투 불능.」

‘아주 가지가지 하네.’

개떼처럼 몰려드는 고블린 무리를 막아 내며, 거슬리는 시스템 창을 흘긴 카델이 헛웃음을 뱉었다.

다섯 번째로 추락한 마물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놈들은 전부 루멘을 노렸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이렇게 많은 마물에게 포위당한다면 빈틈을 보이지 않기 힘들다. 마물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심핵의 탈환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멘의 방심을 노릴 것이 뻔했다.

그 때문에 카델은 루멘을 대피시켰다.

‘마물은 우리가 막을 테니 넌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합류해도 좋다고 판단되면 화염구를 쏘아 올릴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심핵을 사수해라.’

‘……조심해, 대장.’

‘오냐.’

그는 루멘을 쫓아 돌진하는 마물을 처리했고, 라이돈은 날뛰는 놈들의 움직임을 구속했다. 한 마리도 루멘을 쫓아가게 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카델의 최우선 목표였는데.

‘왜 하필 각성 퀘스트가 지금 떠? 각성 주인공은 또 어디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각성 퀘스트. 심지어 함께 있지도 않은 반의 각성 퀘스트였다. 마물을 처리하느라 미처 신경을 써 주지 못해, 어떤 식으로 퀘스트가 발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델은 마물의 시체를 지르밟으며 다급히 고개를 움직였다. 달갑지 않은 타이밍이라고는 해도 각성 퀘스트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일뿐더러, 실패 시의 페널티가 신경 쓰였다.

‘퀘스트 소멸에 전투 불능까지……. 일시적인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애매하게 적어뒀어. 노린 건가?’

각성 퀘스트의 소멸이 두 번 다시 각성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인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 ‘오라’를 포함한 각종 스킬을 영영 상실하게 된다는 뜻인지. 무엇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가지 전부 최악의 가정이었기에, 카델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반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응? 카델, 저기 좀 봐. 아하하! 반이 엄청난 꼴이 됐는데!”

라이돈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

그림자처럼 반의 주위를 물들인 새까만 오라. 함께 검어진 동공의 흐릿한 초점. 바닥에 질질 끌리는 대검의 위로는 피와 오라가 너저분하게 뒤엉켜 있었고, 느릿한 움직임과는 달리 거친 숨소리가 위태로웠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상태에 카델의 표정이 굳었다.

‘안식의 팔찌가 없어. 부서진 건가?’

일부러 벗어 던지진 않았을 테니, 반의 오라를 버티지 못해 파괴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보다 훨씬 좋지 못하다. 당장 폭주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반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까.

‘우선 뭐라도 말을 해 봐야…….’

그러나 카델이 한 발짝 다가감과 동시에, 우두커니 선 반의 뒤편으로 고블린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반의 몸집에 가려져 있던 놈이기에 카델이 막아 줄 새가 없었다.

“반, 뒤에―!”

막아 줄 필요도 없었다. 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어깨를 물어뜯으려 한 고블린의 머리통을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끝을 구부렸다.

얼굴 뼈와 가죽이 그대로 짓이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고블린의 머리통이 일그러지며, 그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 위로 핏물이 흘러넘쳤다.

툭.

반의 손아귀에 갇혀 발버둥 치던 고블린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망설임 없이 시체를 던져 버린 반이 피로 흥건해진 뺨을 쓸어내렸다. 쓸어내린 손 역시 피 칠갑이었기에, 반의 얼굴엔 더 짙은 핏물이 펴 발라질 뿐이었다.

“저 돌아왔어요, 단장.”

검은 눈동자에 섬뜩한 안광이 스쳤다. 흉측하게 쥐어짜인 고블린의 머리통과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린 반. 그 둘을 번갈아 본 카델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막연히 생각했다.

‘저건 이미 폭주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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