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521)

「남은 시간 05 : 36 : 21」

최악이었다.

카델은 거대한 크레이터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심핵을 노려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합동 공격도 실패……. 대체 어떻게 돼먹은 심장인지 모르겠군요.”

모들렌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현재 크레이터를 둘러싸고 모인 인원은 적린 용병단 전원과 가르엘, 모들렌, 성검술 전개에 필요한 최소 인원인 성기사 6명이었다.

총 12명의 인원이 약 1시간 30분 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은 물론, 검기와 마법, 성검술의 합동 공격까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공격을 실행했다.

그런데도 진전은 없었다. 굳이 말은 안 해도 대부분은 심핵의 파괴를 포기하고 에르고 2차 토벌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델은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최후까지 남은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심핵 파괴를 실패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구보다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당장 부활한다 해도 고작 다섯 시간. 다섯 시간 안에 녀석의 심핵까지 완벽하게 파괴하는 일이 가능할까?’

당연하게도, 답은 불가능이었다. 최대한의 힘을 끌어모아 일점사를 하는 데도 부수지 못한 심핵이다. 치열한 전투 중에 파괴가 가능할 리가.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진 않았으니, 다들 표정 풀자고. 용병단 분들도요.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이어야죠?”

가르엘이 넉살 좋게 웃으며 카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델은 필요한 말을 할 때가 아니고는 가르엘에게 시선 한 번 두지 않고 있었다.

가르엘이 까다로운 성검술의 전개를 위해 약간의 힘을 보태 주었을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된 기술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그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가르엘은 그런 카델의 무관심이 살짝 즐거워지려는 참이었다.

카델은 어김없이 심핵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짧게 대답했다.

“두 개의 파편 모두 말도 안 되는 힘을 들여서 겨우 파괴했습니다. 심핵의 크기가 파편의 50배는 넘으니, 파편 파괴라는 성과가 그리 긍정적이지만도 않죠.”

“이런, 어떻게든 분위기를 끌어 올려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가르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으나, 돌아오는 용병단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반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고, 루멘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며, 라이돈은 ‘역대급으로 재미없는 인간’이라며 손뼉을 쳤다.

황혼 기사단은 자신의 단장이 무시당하는 분위기에 기분이 나빠진 듯했으나, 모들렌의 눈짓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주민들의 마물화가 언제 완성될지 모릅니다. 지금은 파괴 불가능한 심핵에 매달리는 것보단 최악의 수를 상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리 말한 모들렌이 가르엘의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가르엘은 시큰둥하게 눈을 굴릴 뿐이었다.

모들렌이 말하는 ‘최악의 수’란 에르고의 부활과 주민 전원의 마물화. 그렇게 되면 에르고를 상대하는 인원은 물론 주민들의 치유를 맡고 있던 기사단의 피해 또한 막심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들렌 경의 말이 옳아. 하지만…….’

마물화까지는 아직 5시간의 여유가 남았다. 벌써 ‘최악의 수’를 대비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그것보다는 에르고의 부활이 시작되기 전까지 심핵 파괴에 힘쓰는 편이 나았다.

‘그걸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겠는데.’

카델은 끊임없는 마력 사용으로 핼쑥해진 얼굴을 무성의하게 쓸어내리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피로도가 사고력을 둔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카델이 이렇다 할 명안을 내놓기도 전. 임시 주둔지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는 가르엘과 모들렌에게 빠르게 예를 갖춘 후,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 주민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심상치 않다니? 자세히 말해 봐.”

“몇몇 주민들이 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주민들도 심각한 복통을 호소하고 있고요. 치유술을 사용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르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멈춰 있던 그의 시선이 문득 카델을 향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카델을 향해 묘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결하지. 모들렌, 임시 주거지에 있는 부하들을 전부 심핵 파괴에 집중시킨다. 네가 지휘해.”

“설마 단장님 혼자서 치유를 맡으시려고요?”

“뭘 새삼스럽게. 예전엔 자주 해 줬잖아.”

적린 용병단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그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르엘의 널찍한 등을 응시하던 카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몇 명이 죽어 나가든 절대 실력 발휘는 안 할 줄 알았는데. 보는 눈이 없으면 웬만큼 구실은 해 주겠다, 이건가.’

그건 다행이었다. 가르엘이 움직이는 만큼 일의 진행은 훨씬 수월해질 테니. 다만.

‘주민들이 벌써 이상을 보일 줄이야. 뭔가 일어나더라도 제한 시간이 끝난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 페널티에 대한 의문을 품었을 때처럼, 퀘스트를 실패하자마자 깜짝 상자처럼 주민들이 전부 마물로 변한다는 것은 억지스러웠다. 제한 시간이 약 5시간 남은 현재. 슬슬 마물화의 전조가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했다.

‘……너무 편할 대로 생각했군.’

퀘스트의 페널티는 모종의 예언. 마찬가지로, 카운트다운 역시 ‘최악의 최후’까지 남은 시간에 불과했다.

“카델.”

그렇게 카델이 더욱 까다로워진 시간 분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조금 회복한 마력으로 나름대로 심핵 파괴를 돕고 있던 라이돈이 그를 불렀다.

시선을 내리자 오묘한 표정으로 카델을 응시하는 앳된 얼굴이 보였다.

“왜 불러? 힘들면 근처에서 쉬고 있어.”

“아니, 딱히 힘들진 않아. 그것보다…….”

라이돈이 손을 들어 자신의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냄새가 나.”

“냄새……? 설마 에르고?”

벌써 에르고의 부활이 시작됐단 말인가. 심장이 발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사색이 된 카델이 다급히 묻자, 라이돈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물의 냄새야.”

“마물? 이 근처에 마물이 있었나?”

“아니. 처음엔 맡지 못했던 냄새야. 아마도…… 멀리서 몰려오는 중인 것 같은데.”

“몰려온다니…….”

잠시 입을 다문 채 후각에 집중하던 라이돈. 그의 어긋난 동공 위로 이채가 돌았다.

“으음, 이미 포위당했네. 원래라면 훨씬 멀리 있을 때부터 알아챘을 텐데 말이야, 감각이 다 무뎌졌거든! 최소 삼백…… 아니, 사백인가? 하하! 헷갈리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라이돈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카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시스템 창을 향했다.

「남은 시간 05 : 20 : 51」

라이돈의 정보가 틀렸을 확률은 없었고, 황혼 기사단에게 정보의 진위를 판별한 시간을 줄 여유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마물 군단에 대한 정보를 알린 카델이 단신으로 마족을 해치울 만큼의 강자라는 것. 그리고 그의 힘을 가르엘과 모들렌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소 삼백의 마물 군단이라니…….”

“30분 정도의 시간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 진열을 맞추고 대비를 해 둬야 해요. 가능하겠습니까?”

“30분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가르엘 단장님의 치유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치유술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접근하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상관없습니다. 가르엘 경은 계속 주민의 치유를 맡아 주시는 편이 나아요. 그쪽이 주민들의 안전도 보장될 거고요. 문제는.”

카델은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반은 대검의 날을 갈고 있었고, 라이돈은 사약이라도 먹는 얼굴로 회복초를 질겅거리고 있었으며, 루멘은 심핵을 품 안 깊숙한 곳에 집어넣은 뒤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심핵 사수입니다. 지금 몰려오는 마물 군단은 마족 에르고의 수하일 확률이 높아요.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몇백이나 되는 마물이 이런 작은 마을까지 몰려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주인의 심장을 탈환하려는 속셈이군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마물이라니……. 확실히, 평범한 마물을 상대하는 것보다 번거롭겠어요.”

번거로운 데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물 수백 마리의 목적이 심핵의 탈환, 단 하나다. 얼마나 집요할지 짐작도 안 가. 이쪽은 마물의 능력도, 종류도 몰라. 그런 상황에서 심핵 사수는 물론 주민들의 보호까지 해야 한다니.’

주민의 보호는 가르엘이 알아서 해 주리라 생각하지만, 마물이 임시 주둔지를 깨부숴 내부가 노출된 상태에서도 가르엘의 보호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의 가르엘은 자기 힘을 들키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니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이 빠른 루멘이 심핵을 담당하긴 했지만, 전투 중엔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마물을 전부 처리하기 전까진 절대 방심할 수 없어.’

마물 토벌 중에 에르고가 부활한다는 가정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건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비극이었으나,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니까.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몰려오는 마물 군단의 토벌도, 심핵의 파괴도. 전부 해내야만 한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5시간. 실패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곧 주민의 몰살과 기사단, 용병단의 괴멸을 뜻했다.

다음은 없다. 카델은 언제나처럼, 목숨을 걸어서라도 승리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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